〈 36화 〉진흙탕(2)
아내에게 준범이를 만나러 가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 시간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
내가 수진이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했는지 잠깐 눈이 가늘어졌다가 시계를 보곤 그건 아닐 거라 생각했는지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든다.
나에게 여유와배려심이 있는 아내를 뽐내려는 건가.
나는 어찌어찌 집을 빠져나올수 있었다.
차에 올라타 곧장 준범이의 집으로 향했다.
준범이 녀석이 결혼하지 않아서 지금 만큼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녀석이 결혼했으면 이렇게 찾아가지도 못했겠지.
준범이의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또라이쉑 어서오고."
준범이는 피곤과 짜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나를 집으로 들였다.
"아, 시발 오늘 장은 텃네 텃어. 넌 시발 아침에 단타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지? 30분이면 수백만원 잃을 수도 딸 수도 있는 시간이야. 존나 귀중한 시간인 거 아냐?"
그리 말하면서도 캔맥주랑 땅콩을 챙겨온다.
"아오 시발 병신새끼 얼굴 좆같은거 보소. 무슨 일 있었냐?"
그 거칠지만 사람 냄새가 나는 독촉에 조금은 기운이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
"어? 어...어? 레알?"
나는 맥주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씨발 이 새끼... 존나 인생이 노잼이니 뭐니 하면서 사는데 존나 개꿀잼으로 사네."
나는 준범이에게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설명했다.
"그래서 아내가 너 존나 개같이 강간하고 니가 좆지랄 하려고 하면 학원에서 깽판 칠 거라고 협박해서 그러고 산다고?"
"어, 그렇게 산다."
"와 씨발 그년 봤을 때 그냥 또라이다 싶었는데 리얼 개또라이에 미친년이네. 그거그거잖아. 내 청춘 뺏어 갔으니까 책임져 같은 거 아녀."
"뭐?"
"그런 거 아냐? 31살이면 완전 결혼 적령기였는데 너 땜에 신세 조졌다고 생각하고 너도 본인처럼 좆되바라 뭐 그런 거 아니냐? 그년은 아재나 만나면서 좆 빨고 다니는데 넌 고딩 만나고 있잖아."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 뭔가 그럴싸하다.
나를 원망하는 걸 수도있겠다.
목이 타서 맥주를 마시려니 준범이가 마시던 맥주로 테이블을 탁하고 두드렸다.
"야, 때려쳐."
"뭐?"
"너 씨발 강사 조또 하기 싫다며? 걍 때려치우라고."
"때려치우면 뭘 어쩌는데 이 새끼야. 내가 뭘 해 먹고 살라고."
"몰라."
나는 갑자기 이 새끼가 무슨 소린가 싶어서 준범이를 물끄러미쳐다봤다.
일을 그만두면 뭘 어쩌란말인가?
"너 씨발 솔직히 존나 양심 없는 거 알고있냐?"
"내가?"
"존나 그 수진인가 뭔가 여자애 따먹고 싶어서 미치겠는데 사회적인 지위니 강사니 뭐니지랄하면서 일선 안 넘으려고 참고 있는 거 아녀."
"..."
"근데 씨발 참아봤자 내년에 넌 39살이고 수진인가? 걔는 20살인데? 뭐 달라지는 게 있냐?"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나는 팩트 폭행을 당하고 있는 건가.
속이 타서 맥주를 마시려고 했는데어느새 맥주캔은 비어있었다.
"뭐 어른이니 수입이 있어야 하고 결혼이니 뭐니 존나 머리 아프겠지. 근데 걍 때려치운다고 생각해봐라."
때려치운 다라...
때려치우면 더 이상 학원에서 수진이를 만날 수 없다.
그건 괴롭다. 그것만큼은 안 된다.
"수진인가 걔 돈 존나 많다며 좋겠네~ 기둥서방하고 살아."
"미쳤냐? 걔 부모님이 좋다고 하겠다?"
"직업 있어도 좋다고는 안 할걸? 38살 처먹은 새끼가 딸 달라고 찾아오면."
맞는 말이긴 하네.
나는 빈 캔을 옆으로 치우고 새로운 맥주 캔으로 손을 뻗었다.
"그래도 그건아닌 거 같은데...지금 내가 그만두면 학원 일정도 꼬이고 후임 문제도 있고."
"그것도 그러네."
준범이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그럼 올해까지만 하고 그만두던지. 어차피 학생한테 손대는 새끼가 강사를 계속할 생각하고 그건 좀 아닌 거 같다. 난 기껏해야 학원 강사랑 바람난 줄 알았는데. 허, 씨발 능력도 좋은새끼."
준범이는 미친놈이니 개새끼니 개쩌네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술을 마셨다.
"어쩐지 갑자기 소설이 재밌다 했네."
재밌었냐? 그건 좀 다행이네.
"야, 학원 그만두고 할 거 없으면 내가 다니던 공장이라도 알아봐 줘?"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래라. 아, 씨발 근데 개 부럽네 씨발새끼. 여고생이랑 연애하고 미시랑 존나 떡 친다는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면 존나 부러운데?"
"그러냐?"
"어우 씨발 나였으면 암캐년아! 씨발년아! 이러면서 존나 박아댈 텐데. 잘하면 아날섹스도 하게 해주는 거 아니냐? 존나 개 꼴리는데. 존나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지 않냐?"
"아오 씨발새끼. 이딴 병신새끼한테 아나..."
뜬금없이 튀어나온 아날 발언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니까 병신아. 좆도 아닌 거로 징징거리지 말라고. 존나 쑤셔 박아서 앙앙하고 그럼 되지 뭐. 그 수진인가 뭔가 학교 졸업하면 가서 고백해. 존나 박력 있게 딱! 내 여자 해라 팍! 이렇게 어? 이렇게 하라고."
그러면서 뭔가 알 수 없는 손동작을 보인다.
뭐 어쩌란 거지?
그 모습이 뻘하게 웃겨나 낄낄거리며 웃어 버렸다.
"아무튼, 일 그만두면 딴 일 찾으면 되지. 뭘 그러냐? 걍 참고해라."
"뭘 참고하는데?"
"`참고`일하라고 병신새끼야 아ㅋㅋ."
씨발놈이.
별로 도움은 안 됐다. 그래도 마음이 조금 편해진 기분이다.
***
늦잠을 잤다. 밤새 술을 마셨더니 컨디션이 엉망이었고 씻지도 못한 채 학원에 도착했다.
강의도 5분이나 늦게 시작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러분. 바쁜 시기에 여러분의 수업을 5분이나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그런 관계로 오늘은 논스톱으로 갑니다."
줬다가 뺏으면 반발하는 법이다.
학생들 사이에서 우~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진도는 밀리면 안 된다.
나는 학생들의 야유를 무시하고 강의를 진행했다.
열심히 강의를 하고 보니 내 생각보다 조금 여유가 있게 끝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왜일까? 달라진건 하나도 없다.
집에 돌아가면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어제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편했다.
"준수 강사님... 진짜 뭔 일 있어요?"
인한 강사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늦잠을 잤다. 그래서 씻지 못하고 튀어나왔지.
옷도 준범이한테 빌려왔다.
전업투자자라 다림질할 일도 없어서 대충 빨아 입는 녀석이다.
셔츠는 주름졌고 넥타이도 바빠서 대충하고 나왔다.
얼굴은 세수도 하지 않아서 개기름이 좔좔 흐르고 있고 면도도 하지 않아 턱수염이 까끌까끌하다.
머리는 그냥 폭탄을 맞은 수준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완전 거지새끼였다.
하지만 왠지 마음에 들었다.
"아니, 그 알람이 안 울더라고요."
"아닌 거 같은데?"
인한 강사는 코를 킁킁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내 몸에선 알콜 냄새가 나고 있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수건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학원에서 씻는 건 난생 처음 하는 일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
붉게 충혈된 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일회용 면도기로 수염을 깎았으나 어딘가 덜 깎인 부분이 남아 지저분하다.
완전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아재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모습이 뭔가 마음에 들었다.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을 저질렀다.
10년간 학원 강사를 해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뭔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어딘가 언짢은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남에게 피해를 끼친다느니 뭐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래. 준범이 말이 맞다. 힘들면 때려치우자. 그러면 되는 거다.
왜 이렇게 어렵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네.
***
"오늘은 왜 그렇게 멀찍이 앉아?"
"사실대로 말해도 돼요?"
"아니."
"선생님 몸에서 냄새나요."
"..."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본다.
이제 좀 익숙해져서 잘 모르겠지만, 알코올 냄새가 좀 느껴지긴 한다.
"머리, 물로만 감아서 물 냄새나고 술 마시고 샤워도 안 하셨죠? 술 냄새나요."
마음에 든다는 건 취소다. 뭔가 부끄럽다.
"신기하네요. 처음 봐요 그런 모습."
"그러네. 나도 처음이야."
"뭔가 이제 진짜 사람 같네요."
"그래? 그럼..."
"가까이 오시진 말고요. 냄새나니까."
수진이가 코를 막으며 멀찍이 떨어진다.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좋아졌다.
"다행이네요. 고민하시던 건 잘 해결됐어요?"
"응? 어, 뭐 그러네."
거짓말이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이제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싶으니까.
그냥 어렵게 생각하길 포기했을 뿐이다.
"별건없어. 술은 준범이랑 마신 거고."
"..."
"고마워. 덕분에 편해졌어."
"그럼 됐고요."
그래. 그럼 된 거다.
굳이 너한테 불필요한 걱정을 끼치고싶지는 않다.
이건 나와 아내의 문제니까.
"우리 데이트 했던 거 있잖아요."
"어. 그게 왜?"
"그거 카페 가기 전엔 어디로 가려고 했어요?"
어디 가려고 했더라.
아, 그래. 하이주다 하이주.
"하이주라고 동물원에 가려고 했어."
"그럼, 우리 이번에 하다만 데이트라도 할까요. 기분전환으로."
데이트? 좋지. 기분전환으론 최고일 것같다.
"그래,"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아. 너는 참 눈치가 빠르구나.
날 배려해줘서 그런 제안을 해준 거겠지.
그나저나 데이트라. 이번엔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로 가지."
"이번엔 제가 가고 싶은 데로 가봐요."
"어디 가고 싶은데?"
"음~ 아직 별생각은 없는데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그래. 그럼 그러자."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리 답답하고 미치는 줄 알았는데 이젠 괜찮다니 참 신기하다.
수진이에게 민폐를 끼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굳고 시야가 좁아졌었나 보다.
솔직히 아내를 잘 모르겠다.
갑자기 이성을 잃고 미친 짓을 벌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진짜로 그렇게 막 나가는짓을 할까?
내가 진짜로 돌아버려서 막 나가면 넌 날 붙잡을 방법이 없는데?
그 협박은 날 붙잡아두기 위함인가?
그래. 이제서야 그쪽으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했지.
어쩌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장인어른은 혜정이가 너무 귀여워서 오냐오냐했더니 버릇이 좀 없다고 하셨다.
좀이 아닌 거 같지만, 혜정이는 제멋대로에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내뱉던 장모님과 닮았다.
장인어른에게 오냐오냐하면서 자라고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니면서 멋대로 행동하고 항상 갑의 입장에서 선택을 해왔던 너.
하지만 결혼이라는 매우 중요한 갈림길에서 나라는 꽝을 뽑아버렸다.
이미 골든 타임이 지나버렸고지금 이혼을 한다고해도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자신도 없어진 너.
나를 원망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왜 이런 남자랑 결혼했을까 고민도 참 많았으리라.
20대의 6년과 30대의 6년은 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로 아주 커다란 문제니까 함부로 이혼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날 네가 집을 나가고 조용했던 그 집이 떠오른다.
널 굉장히 미워했으면서도 네가 집을 나가니 갑자기 싱숭생숭했었다.
너도 나랑 비슷한 느낌이었을까.
혼자 지내는 게외롭고 또 한편으론 무시당하는 게 짜증 나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갈구했던 걸까.
이제 40을 바라보는 나이다.
일을 끝내고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쓸쓸함을너도 알아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서야 나의 관심을 끌어보고자 했나.
대담하게 집으로까지 남자를 들이던 너.
그렇게 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나에게서 다른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에게서 낯선 이성의 그림자를 보았겠지.
하지만 술에 취해 자신에게 덤벼든 나에게서 뭔가 뜻대로 되지 않았음을 깨달았고 내변한 모습에서 의외의 뭔가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전부 추측이다.
아내가 날 정말로 좋아하는지 아니면 준범이의 말대로 동귀어진을 바라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됐다. 네가 나에게 남편의 모습을 바란다면 잠시 어울려주지.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아직은 내가 불리한 상황일 뿐이다.
그러니 내가 유리한 상황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
참는 삶에는 이골이 났다. 어렵지 않아.
네가 원하는 남편을 연기해 주겠다.
그래도 그게 내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 이참에 이 상황도 이용하자.
삼각관계에 대해서 쓰고자 했는데 때마침 어찌 써야 할지 몰라서 막혔던 상황이 아닌가.
이젠 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나에게 보여줬던 너의 광기.
인생의 황금기를 지나쳐버려 미쳐버린 저주에 가까운 감정.
그 감정을 소설에 담자.
지금은 내가 졌다. 하지만... 기다리리라.
이전의 나라면 포기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니까.
언젠가 네 약점을 잡을 때까지 네 옆에서 남편을 연기하며 너를 이용하며 기다리겠다.
그렇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