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4화 〉족쇄(2) (34/301)



〈 34화 〉족쇄(2)

"혜정아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미 끝난 상황이다.

우린 서로의 부정을 알고 있다.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불륜을 모른 척 넘기고 있었다는 거.

그냥 넘어가 주고 평범하게 행동하니 내가 만만해 보이고 예전처럼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냐?

"왜 혜정이라고 불러? 예전처럼 여보라고 불러."

"자꾸 귀찮게 굴지 마. 너도  만큼 알잖아?"

"몰라"

"모르긴 뭘 몰라."

혜정이가 고개를 저었다.

힘이 없고 느릿느릿한 동작을 보고 있으니 짜증이 났다.

나 때문에 그렇게 상처받았다고 시위라도 하는 거냐?

"그 애지? 수진이라는 애."

"..."

"오빤 참 능력도 좋다. 영계야, 영계. 근데 오빠. 예전에 친구분 중에 속도위반 결혼한사람 있지 않았어? 대학교도 안 갔다며?"

어느 순간 여보에서 오빠로 바뀐 혜정이의 호칭.

예전에는 혜정 씨와 준수  그리고 혜정이와 오빠가 되어 지금은 여보가 된 호칭.

우리는 잠시 신혼이던 때의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며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내가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에 열이 오름을 느꼈다.

혜정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친구의 이야기.

그래. 예전에 혜정이에게 들려준 적이 있긴 했다.

예전엔  연놈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피임도 안 하고 사고를 쳐선 대학도  가고 바로 취직해서 아등바등 살던 멍청이들.

하지만 멍청하긴 해도 조금 멋있었다.

화가 잔뜩 나서 욕설을 내뱉던 어른들 앞에서 몸을 떨면서도 서로를 지켜주기 위함인지 손을 꽈악 잡은 상태로 어른들의 시선을 감당하던 녀석들.

어떻게든 책임을 지고 아이를 낳고 잘 키우고 살겠다고 하던 그 녀석들은 멋있어 보였다.

그런 녀석들에 관한 이야기가 혜정이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하자 내 친구들이 모욕당한 기분이 들었다.

"오빤 지금 자식뻘인 사람이랑 만난다는 거야. 제정신이라고 생각해?"

"..."

"봐, 오빠도 알잖아? 본인이 이상하다는 거. 오빠는 정곡을 찔리면 아무 말도 못 하잖아. 오빠도 내심 알고 있는 거 아니야.본인이 미쳤다고?"

"너한테 듣고 싶진 않은데?"

나는 아내를 노려봤다.

미친년.

지금 그게 네가 할 소리냐?

"너도 딴 새끼들 만나고 다니면서 할 거 다했잖아? 갑자기 왜 지랄이야, 씨발련아. 이혼하자는 뜻 아니었어?"

"그건!"

"뭐가 말이  남았는데? 왜 집에 가서 장인어른, 장모님 앞에서 말하지 그랬어? 오빠 몰래 집에 딴 남자 불러서 좆 빨았는데 들켰다고 말하지 그랬어?"

"..."

"내가 씨발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데? 뭐 씨발 니가 상전이야? 왜 자꾸 좆지랄이냐 미친 씨발련아!!!"

"오빠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뭐가, 씨발아."

"나 좋아한다며.결혼하자며. 나한테 어떻게이래?"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나는 정말 널 사랑하긴 했을까?

첫 만남이 맞선이었다.

처음 봤을 땐 상당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외모가 취향이었으니까.

애프터 신청을 하고 승낙을 받은 다음 몇 번 더 만난 다음결혼하기로 했다.

너의 그 여우 같은 행동에 마음이 끌려서 이런 여자라면 결혼해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서두른 것도 있다. 나도 30을 넘은 나이였으니 얼른 자리를 잡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그걸 바라셨으니 더 서두른 감도 있다.

당신께서 품고 계신 죄책감을 좀 덜어드리고 싶었다.

안일했다.

내가... 내가 조금만 더 성숙한 인간이었다면 신중하게 생각했을 텐데.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여자에게 반해 그걸 운명의 짝이라고 착각하고 네가 던져온 미끼를 호의라고 생각해서 물어버렸다.

"뭐가!"

"내가 모를 거 같아?"

"뭐?"

"오빠랑 싸우고 어머님 만났었어."

혜정이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오빠랑 싸우고 오빠가 집에 내려가니까 어머님이 집에 무슨 일 있느냐고 찾아오셔서 만났었어."

"왜 그걸 지금 말해?"

"안 물어봤잖아? 어머님이 그러시더라고 오빠 잘 좀 부탁한다고."

"..."

나는 숨이 턱 막혀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나를  혜정이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은  계속해서 입을열었다.

"아버지가 엄하셔서 상처도 많이 받았고착해서 군소리도 안 하고 살았다고 그러시더라. 본인이 죄가 많아서 오빠한테 너무 미안하시다고 그러셨어."

나는 손이 축축하게 땀으로 젖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만했으면 좋겠다.

"어머님이잖아? 결혼한 이유. 정말 괜찮겠어?"

"...나도 이제 어른이야. 이해해 주시겠지."

"정말? 진짜 그렇게 생각해?"

나는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다스리려 했다.

어지러웠다. 약점을 잡힌 느낌.

손에 땀이 주르륵 흘러 불쾌했다. 손을 바지에 문질러 땀을 닦았다.

이 미친년에게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 애잖아? 마트에서 봤던 애. 내가 오빠 학원에 찾아가서 깽판이라도 치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씨발 그걸 말이라고 해!"

"나한테 잘해야지. 여학생들 소문 한순간이야. 학교에서 소문 쫙 퍼지면 대학교까지 꼬리표 달고 다닐 걸? 유부남이랑 원조 교제하는 년이라고 소문나 봐. 어떨 거 같아?"

"나랑 수진이는 그런ㅡ"

"뭐야 안 잤어?"

맴 매앰 매앰.

벌레의 울음소리가 귓가를어지럽힌다.

"나도 오빠 별로 안 좋아했어. 재미없었거든. 패션도 별로였고 연애경험도 없어서 순진했고."

"근데 왜 결혼했는데?"

"나도 예전 같지 않았으니까.  오빠랑 만나기 전까지 데이트에서  써본 적도 없어. 다들 잘해줬고. 그런데 언제부턴가 질리고 피곤하더라 왠지 허전하기도 했고."

그래. 맞선 결혼이란  결국은 그런 거지.

나는 부모님이 하라고 해서 너는 이제 그만 안정된 삶을 원했겠지.

"그거 알아? 나 오빠랑 싸우고 딴 남자들 만나고 다녔어. 근데 예전이랑 다르더라고"

"그래...  존나 예뻐. 예쁘니까 그만하고  새끼 만나러 가라고 씨발련아!"

머릿속이 복잡하다. 속이 울렁거린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겠고 식은땀만 흐른다.

"나도 예전이랑 달라. 이제 예전처럼 좋다고 남자들이 달라붙지도 않고 예전처럼 잘해주지도 않아. 몸매 망가질까 봐 이런저런 핑계로 아이 안 낳으려고 했는데 나이는 못 속이나 봐."

그녀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한 번, 그리고 손등을 한 번 바라보고 손으로 팔뚝을 쓰윽하고 쓸었다.

 자신의 피부 상태를 확인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모두가 날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하더니 이젠 안 그래. 그래서 싫었어. 나 좋다는 남자들은 이제 다 오빠보다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야."

"..."

"오빠보다 똑똑하고 오빠보다 잘생기고 오빠보다   버는 남자들은 이제 나 같은 여자 안 만난다고. 오빠처럼 영계 만나지."

"그래서?"

"오빠가 나 병풍 취급하고 무시하고 그래서 나도 오빠 성질만 긁어볼 생각이었어. 근데 하다 보니까 뭔가 즐겁더라고? 오빠가 나 미워하고 증오하고 질투하는 거 느낄 때마다 뭔가 짜릿했어. 뭔 느낌인지 알아?"

"질투? 지랄하지 마 미친년아"

"아니, 질투 맞아. 그날 술 처먹고 오빠가 나 강간한 날. 그날  정말 오랜만에 만족한 느낌이었거든. 나한테 열중해서 내꺼라고 표시하듯이 물고 깨물고 욕하고 그럴 때 진짜 좋았어."

"그건!"

그건 수진이를 너와 겹쳐봤기 때문이다. 술에 취해 이성을 잃었을 뿐이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래.  수진이란 애 대용이잖아? 나 그래도 오빠가 나한테 열중해서 점잖게 굴던 사람이 욕하고 때리고 질투하고 그러니까 가슴이 뛰어서 너무 흥분했어."

"..."

"그러니까 이혼 안  거야. 어차피 그 애랑 결혼할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하잖아?  애도 대학교 가서 오빠보다 젊고 능력 있는 남자들 만나면 오빠가 눈에 들어올 것 같아? 정신 차려 준수 씨."

나는 당장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까지 일 줄은 몰랐다.

정상인이 아니라서 그녀가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뻔히 딴 여자를 사랑하는  알면서도 상관없다고?

내가 때리고 욕하고 지랄하는 게 흥분된다고? 무슨 소린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떠나려 하니 혜정이가 내 손을 붙잡았다.

"나 이제 잘할 게. 나도 이제  처지를 잘 알아. 오빠 생각보다 굉장히 좋은 사람이야.  이제 혼자 살기도 싫고 딴 남자랑 만나도 오빠만 한 사람 못 만날 거 같아."

"놔."

"나 오빠 많이 사랑하는 거 같아. 그러니까 이제 오빠도 나한테 잘해. 어차피 나도딴 남자 만났으니까 오빠도 그년 만나는 거 그냥 눈감아줄게. 어차피 그년도 오빠 진심으로 사랑해서 만나는 거 아닐 테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아내의 손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져서 뿌리치지 못했다.

수진이와 나의 관계.

불륜을 저지른 이혼남과 학원 수강생인 고등학생.

하필이면 그녀의 부모님은 아버지의 불륜으로 이혼했다.

과연 우리들의 관계가 이어져서 그녀가 성인이 되어도 우리의 앞길이 평탄할까?

"나 이제 헛짓 안 할게. 나도 딴 남자들 만나서 잠깐 놀다 왔으니 오빠도 잠깐 그러든지. 어차피 오빠가 돌아올 건 여기밖에 없어."

그렇게 말하며 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기는혜정이.

"내가 오빠 학원에서 조금만 지랄하면 오빠도 한순간이야. 오빠가 그리 챙기던 체면도 10년 넘게 쌓아온 경력도 박살  껄? 자신 있어?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

벌레가 전신을기어 다니는 것 같다.

그래. 혜정이의 말이 맞다.

내가 여고생을 건드린 강사라는 사실이 들키면 내 커리어는 박살이 난다.

수진이가 원조교제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 그녀의 삶은 박살이 난다.

그날... 혜정이를 덮친 그 순간 모든 것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몸에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우리 오늘부터는 다시 부부가 되는 거야. 오빠는 평소처럼 지내면 되는 거고 나도 하던 것처럼 아내로서 최선을 다할게."

내 몸을 더듬기 시작하는 혜정이의 손.

커다란 뱀이 전신을 옭아매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섹스하자고 하면 세우고 밥 먹자고 하면 밥하고 데이트하자고 하면 데이트 하면 되는 거야. 앞으로도 잘할 수 있잖아? 오빠는 언제나 그랬잖아."

"씨발 개미친년. 너 완전 씨발련에 개 미친거 아냐?"

"오빠가 그렇게 만든 거잖아?"

혜정이는 내가욕을 하면 할수록 더욱 달아오른 표정을 보였다.

혜정이가 내 손을 붙잡아 그녀의 치마 속의팬티를 만지게 하였다.

손에 뜨겁고 습기  기운이 느껴졌다.

"봐. 오빠 때문이야."

나는 변하고 싶었다.

문득 돌아보니 내가 살아온 삶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서울에 상경해서 자취를 시작하고 대학교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항상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혼자서 살려고 하니 미아가 기분이었다.

 외로움도 잊고 필사적으로 살다 보니 어느새 늙어있었다.

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니까.

일하고 돈을 벌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늙어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겐 그런 평범한 인생조차 사치스러웠다.

결국, 아내와의 관계는 파탄이 났고 난 모든 것을잃어버렸다.

죽고 싶었다.

힘들게 살아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끝에 기다린  상대적 빈곤과 박살 난 가정뿐이었다.

지쳤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런 상태임에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살아왔다.

숨이 막혔다.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발버둥 쳤다.

누군가 나를 발견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생이란이름의 길에서 미아가 되어버린 날 누군가가 이해해주고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순간 너를 만났다.

이수진.

너를 만난 나는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나를 알아주고 이해해 주려는 사람.

네가 곁에서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변할 수 있었다.

네가 옆에 있어 준다면 강의실에서 20년이고 30년이고강의를 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나 보다.

나는 겁쟁이다. 멍청이다. 병신이다.

너의 삶을 파멸시키고 나의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너를 가질 용기는 없었나 보다.

나는 오늘부터 고혜정의 남편 김준수가 된다.

아내는 본인이 한 짓도 있으니 잠깐 바깥으로 겉도는 걸 용서해주겠다고 했다.

결국, 수진이도 금방 질려서 딴 남자를 만나러 갈 테니 그때 동안 즐겨도 뭐라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랑 수진이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나의 입은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혀 움직여주지 않았다.

 거미줄에 구속되어 꼼짝도  하는 벌레가  기분이었다.

나와 아내의 몸이 포개어졌다.

서로의 몸을 섞으며 신음을 토해내고 우린 다시 외형만은 번듯한 부부가 되었다.

이젠 그녀가 불륜을 저지르는  아닌 내가 불륜을 저지르는 그런 형태의 부부가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