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2화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2) (32/301)



〈 32화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2)

"요즘은 흡연실에서 얼굴 보기가 어렵네요."

"금연했는데 계속 찾아가면 피고 싶어지니까요."

"확실히 그렇겠네요."

강의준비실에서 인한 강사와 잡담을 했다.

인한 강사의 자리는  바로 옆자리다.

그래서 서로 말문을 튼 사이였고 그 계기조차 학원에 몇 없는 흡연자라는 이유 때문이었지.

흡연실에서 만나 그냥 쌩까기도 뭐하니 자신의 아이가 귀엽다느니 뭐니 하며 대화를 시도했던 인한 강사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팔불출을 연기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잡담을 할 수 있는 관계가 됐다.

수진이를 만나고...나의 일상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마법사 고로시나 엿 같은 환생 같은 거 재밌죠."

"뭐, 확실히 재밌죠."

"저도  번 써볼까요?"

"웹소설 써보시게요?"

"뭔가 계속 읽다 보면 나도 이 정돈 쓰겠는데 싶은 글들 많지 않아요?"

인한 강사는 나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인한 강사가 보여준 화면엔 `강함` `입니다만?` 같은 이상한 제목의 웹소설이 가득했다.

이걸 다 읽어본 건가? 완전 잡식이네.

강인한 강사는 누렁이었다.

확실히 웹소설로 1달에 10만원이나 돈을 쓰려면 이 정도는 봐야 하겠지.

"그런 의미에서 뭔가 어드바이스 같은 거 없습니까?"

"제가요?"

"예."

"소설로  가르칠 정도 됐으면 여기 없겠죠?"

"아하하하!"

인한 강사와 잡담을 하고 있으려니 인한 강사와 친한 동료 강사들이얼굴을 내비쳤다.

그들에게 좋은 아침이라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예전과는 달라졌다.

나에게 학원이란 생계를 위한 수단이었고 애착 따윈 없었다.

동료 강사들과의 관계도 소원했다.

하지만 요즘은 그들과도 인사를 나누며 잡담을 나눌 정도의 관계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준수 강사님 주식 개떡상 아닙니까?"

주식?  그러고 보니 주식을 하긴 하지.

사놓고 지지부진 횡보 중이라서 그냥 준범이 놈한테 반응이 오면 알려달라고 했다.

억을 태워놓고 확인을 하지 않는 대범함이 장난이 아니라며 혀를 차던 준범이.

망하면 나도 죽고 그 녀석도 죽는 거니까 알아서 하겠지.

평생 종목 추천 한  않던 녀석이 한 거니 어지간히 자신이 있으리라.

아무튼, 인한 강사에게 주식한다는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으니 다른 이야기겠지.

"그런가요?"

"예. 요즘 학생들이 폼 올랐다고 그러던데요."

"그럼 다행이네요."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어요?"

"뭐, 담배도 끊고 운동도 하다보니 그냥 그렇게 됐네요."

"...혹시 이혼이라도 하셨어요?"

"왜요?"

"아뇨. 뭔가 그거에요,그거."

인한 강사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게 화면을 보여줬다.

`이혼하고 무림최강`

`이혼했더니 상태창이 보인다.`

`이혼 후에 강해짐`

`돌싱남이 존나 강함`

... 이봐 인한 강사.

아이가 귀엽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더니만 소설 선정이 왜 그 모양이야?

소설로 10만원 쓴다고 욕먹은 게 아니라 읽는 소설의 제목이 그따위라서 욕먹은 거 아니야?

"이혼은...  했어요."

"..."

내가 뭔가 의미심장한 느낌으로 중얼거리니 인한 강사는 내 말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화제를 돌려버렸다.

당신은 참 눈치도 빠르고 좋은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뭔가 몸도 많이 좋아지신  같은데요?"

"아, 그렇습니까?"

나는 뽀빠이처럼 팔뚝 근육을자랑해봤다.

"오오! 덤최몇?"

"헬스는 안 하고 맨몸 운동 위주라 잘 모르겠네요."

"허."

갑자기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인한 강사.

무슨 일이지?

"덤최몇이 무슨 말인지 알아요? 헬창 다 되셨네."

...

***

아내가 집을 나갔지 1주일이 지났다.

아내가 없던 주말이 끝났고 이제 또 아내가 없는 주말이 시작되리라.

이상하지.

아내와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행위가 그리 불쾌하고 짜증이 났는데 없으니 또 외롭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이러면 안 되지.

뭔가 다른 일에 집중해서  잡생각을 치워야겠다.

그래. 오랜만에 내가 썼던 그 소설의 뒷내용을 계속 써보자.

요즘은 예전처럼 가슴 속에 뭔가 몽실몽실 떠오르는  감각이 사라져서 글이 잘 안 써졌다.

그래서 그날그날있었던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언젠가 써야지 하며 미루고 있었다.

글을 쓸 만큼의 분량은 충분히 쌓였다고 생각한다.

이제 써야지.

내가 쓰던 이야기는 주인공 강범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여대생 소설가의 관점을 잠깐 비춰주는 것에서 진행이 멈춘 상태다.

왜 여기까진 술술 썼으면서 이제서야 막혔던 걸까.

아, 그러네. 그거다.

수진이와 처음 만났을  느꼈던 그 감정.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 날의 충동.

운명의 사람을 만났다는 망상에 빠져 그 벅차오른 감정을 가슴에 담아두기 힘들어 밖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내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표현하고 싶었다 이 말이지.

그런데 누구한테 이 심정을 표현한단 말인가. 38살 아저씨가 19살 여고생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누가 들어줘.

하지만 누군가에겐 이 심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였다. 누구에게도 들려줄 수 없는  벅차오른 심정을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니 소설이 술술 써졌던 것이지.

하지만 수진이와 가까워지면서 그 설렜던 감정에 점점 익숙해진 거겠지.

나쁜 현상은 아니다.

38살이나 처먹은 아저씨가  만남을 운명처럼 생각하는 건 사춘기 소년 같잖은가.

내가 연애경험이 부족해 특별시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잠깐 이성을 잃는 그 사랑앓이를 겪고 있을 뿐이었던 거지.

하지만 그 사랑앓이의 결과물의 결말을 수진이는 꼭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 계속해서 쓸 수밖에 없는데... 누군가  알려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글이 써지지 않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하루에 2연참을 하는 작가들도 많은데 그들도 나처럼 이렇게 글이 안 써지는 경우가 있을까?

그럼어떻게 슬럼프를 극복하고 일일연재를 계속하는 거지.

아, 그래서 그런 건가.

요즘 소설 중엔 이름만 조금씩 다르지 내용이 엇비슷한 이야기가 쏟아진다.

클리셰를 사용해서 그렇게 찍어내듯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다 그런 이유였나.

그래. 그렇게 찍어내듯 써내려가면 이렇게 고민하고 슬럼프에 빠질 일도 없겠지.

미치겠다. 그저 수필을 소설로 옮긴 듯한 소설을 쓰는 것뿐인데 이렇게 어렵다니.

초조한 마음에 다리를 떨며 팔짱을 채 소설의 뒷내용을 떠올려본다.

생각해보니 뭔가 자극적인 일이 있어야지만 이야기가 흘러갈 것 같다.

여대생에게도 뭔가 사연이 있어야 더 인물이 입체적이 되지 않을까.

아, 생각해보니  이야기는 너무 단조로운 로맨스다.

이렇게 단조로운  안돼. 그래, 그게 필요하겠다.

삼각관계.

지금 내가 처한 상황도 그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내가 유부남이고 곧 이혼할 예정이긴 하지만 비슷하다면 비슷하다.

그럼 이 이야기도 현실을 약간 비틀면 어찌 되지 않을까.

40대 딴따라 강범수는 사실 연애를 하다가 크게 데어서 지금까지 독신인 거다.

그래. 그렇게 하자.

구체적으로는 결혼까지 생각했던 적당히 미인이던 여자친구랑 크게 싸우고 잠깐 소원해졌는데 그 사이에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랑 자던 장면을 포착한 거지.

여자한테 환멸을 느낀 그는 연애를 포기했다.

그렇게 캐릭터를 잡자.

여대생은 어떻게 할까. 수진이의 이야기를 각색해서 쓸까?

아니, 그건 아니다.

수진이가 했던 말을 떠올려보자.

친구들이 가정사를 함부로 떠들고 다녀서 친구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이건 섬세한 문제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소설이라고 해도 수진이의 이야기를  안에 넣을 수는 없다.

수진이를 떠올려 본다.

수진이는 뭔가 당당하고 똑 부러진 아이 같지만 알고 보면 좀 허당이다.

연애를 글로 배운 나랑 비슷한 부류다.

검색엔진에 연상연하 커플에 대해서 찾아보는 녀석이다.

나중에 몇 번  들키게 조심해서 훔쳐  적도 있는데 북마크가 되어있는 것도 있었다.

남자를 설레게만드는 대사를 가끔 툭툭 내뱉던 수진이.

사실은  설레는 대사가 웹사이트에서 굴러다닌 내용을암기해서 그대로 내뱉은 거란 말이다.

연애 고단수처럼 선생님을 헤으응거리게 만들던 밀당의 고수.

요망한 녀석이 상당히 어벙해 보이고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모습을 담자. 굳이 사연을 담을 필요는 없지.

캐릭터에 깊이를 더하는 건 굳이 어두운 사연일 필요는 없으니까.

***

사실 로맨스 소설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그녀는 여중, 여고, 여대를 다니는 학생이다.

부모님이 굉장히 엄격해서 통금시간이 있는 집이었다.

휴대폰은 친구들은 다 스마트폰인데 피쳐폰을 써야하는 엄한 집안.

그녀는 친구들의 연애이야기가 다른 차원이야기였다.

그러다가 친구들이 몰래 빌려준 순정만화를 보게 되었다.

너무 재밌어서 밤을 새워버린 그녀.

뒷내용이 궁금해서 친구들을 독촉하고 그렇게 보다 보니 나도 이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망상 속의 주인공들로 그림을 그려본다.

평생 공부만 하고 살았는데 갑자기 그림을  그릴 리가 없지.

자신의  손에 풀이 죽었는데 어느 날 웹소설에서 로판을 접하게 되고 이 정도면 본인도 쓸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고 그게 지금에 이르렀다.

그녀는 패션도 매우 화려하다.

좋은 옷들로 꾸미고 다니지만, 사실은 이것도 굉장히 허당인 것들이다.

일단 옷걸이가 좋아서 잘 어울리는 게 첫 번째 이유.

몸에 걸치는 옷들이 전부 패션잡지나 백화점 마네킹이 걸치고 있던 옷들인 게 두 번째 이유다.

굉장히 센스있고 기가 세 보이는 외견이지만 사실은 로판을 읽고 동화 속에 왕자님을 찾는 허당같은 여자인 거지.

그러니 연애도 교과서적이게 로판이나 인터넷으로 찾아서 배운 것들이다.

현실에서 우리 귀여운 고양이니 강아지니 하면서 느끼한 말을 하는 남자들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피폐물이라면서 여주인공을 학대하는 남자는 9시 뉴스에 나올 것이며 존잘능력남들이 평범녀한테 끌리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상하게 시선을 끄는 강범수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도 모른다.

그냥 특이해서 관심이 가는 남자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접근도 로판처럼 이상하고 어리숙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강범수는 40살인 나한테 여대생이? 그럴 리가 없다며 웃어넘긴다.

그렇게 평행선을 긋던 두 사람에게 어느 날 범수의  여친이 나타나는데...

***

여기까진 괜찮다.

하지만 이다음이 문제지.

솔직히 삼각관계부터는 완전히 창작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부분이니까 말이다.

나와 아내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을 적당히 각색해서 넣으면 될까.

하지만 이야기의 방해꾼이 되는 그, 전 여친을 언제 퇴장시킬지 그리고 어떻게 굴려야 허당 여대생이 40대 남자에게 사랑하게 돼서 그 엄한 부모님을 설득할 것인가.

힘들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제 씻고 잘 시간이지.

샤워기를 틀어 찬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쓴다.

 상태로 생각에 잠겼다.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고 했나.

그래. 확실히 혜정이가 집을 나가고 뭔가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선 안 된다.

수진이를 만나고 바뀐지금의 삶을 봐라.

삶에 충실하고 하루하루가 즐겁다.

그런 반면 혜정이와 보내던 삶은 어떤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관계에 불과하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수진이를 알아버렸다.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없어.

수진이에 대해 떠올리며 샤워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오자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떠 있었다.

누구지? 설마 수진인가.

나는 머리도 말리지 않은 상태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읍!"

휴대폰에 떠올라 있던 것은 부재중 전화의 표시.

걸어온 사람은...장모님이었다.

나는 갑자기 전신이 무거워진 기분이 들어 침대에 주저앉았다.

6월.

찌는 듯한 더위가 시작됐다.

뉴스에선 올해가 가장 더운 여름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며 이상 기온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나는 방금까지 찬물로 샤워했는데도 불구하고 등에 땀이 차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나와 혜정이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던 걸까.

아니, 끝났다고 믿고 싶었던 거겠지.

도장을 찍지 않으면 우리는 아직 부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장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3초도 걸리지 않아 전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어,  서방. 바쁜데실례한 거 아니지?`

"아닙니다. 무슨 일이세요?"

`뭐, 무슨 일은 무슨 일이야. 알면서? 주말에 어디 안 가지?`

"네."

`그럼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 그때 가서 이야기하자고. 언제까지 이렇게 불편하게 지낼 거야? 바깥양반은 잘 설득해서 혜정이 데려가게 하겠다더니 나갔다 와서 말도 없고. 아이고, 정말 숫기 없는 남자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아무튼, 그렇게 알고있어, 알겠지?`

뚝.

용건 만을 말하고 끊어지는 전화.

좆같다. 지 할 말만 하고 쳐 끊다니.

장인어른. 이런 사람과 결혼해서 지금까지 같이 살았습니까?

당신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6월.

본격적으로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고 햇볕이 따사롭다 못해 뜨거운 여름이 찾아왔다.

그리고 우리 집엔 여름과 함께 태풍이 찾아올 예정인 것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