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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화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1) (31/301)



〈 31화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1)

혜정이가 없는 주말의 아침.

적막하다.

벽에 걸려있는 시계의 소리가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로 방안은 조용했다.

왠지 초조한 기분이 들어 TV를 켰다.

TV를 보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TV를  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TV 켜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집안이 이상할 정도로 마음을 술렁이게 해서 TV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이라도 있어야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으니까.

진정하자. 이젠 이 집에서 나 혼자 살게 되리라.

아내는 없다. 아내가 없어서 외로운가?맞다. 맞지만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은 아니다.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 넓은 집안에 혼자 있으려니 외로울 뿐이다.

잊자. 잊고 즐거운 생각을 떠올리자.

이번 주말이 지나면 6월이 시작된다.

학생들에겐 6월 모의고사가 있고 6월부터 여름이 시작된다  수 있지.

그래. 계절이 바뀌니까 옷을 정리해야겠다.

겨울과 봄에 입던 옷들을 정리하고 여름에 입을 옷가지들을 쌓아두던 상자를 꺼냈다.

빨래가 끝이 나고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성가시다.

2주일에 1번 정도 청소를 하던 공간을 이젠1주일에 1번씩은  청소를 해야 하니까.

암묵적으로 1주일에 한 번씩은 번갈아가며 청소를 했는데 이제 오로지 나의 일이 되었다.

거실 청소가 끝난 후엔 방을 청소하고 화장실을 청소했다.

쓰레기까지 내놓고 돌아왔음에도 시침은 아직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안 가다니...

이제 뭘 해야 하나.

초조했다.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래. 이럴 땐 수진이와 카톡을 해보자.

근데 처음엔 어떻게 보내야 하지?

나는 1분 정도 휴대폰을 들고 뭐라고 카톡을 보낼지 고민했다.

그러고 있으려니 고향 친구들끼리 만든 단톡방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어벤져스 어셈블!`

뭔가 어디서 들어본 구호를 외치는 녀석이 있다.

숫자가 하나 사라졌다.

나다. 내가 읽어버렸다.

젠장. 봤으면 답장은 해줘야겠지.

`?`

그렇게 보냈다.

시간이지남에 따라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기 시작하자 새로운 카톡이 올라왔다.

`우리 집 둘째 돌잔치다.  사람 오셈`

그렇게 간결하게 용건만 보내는 녀석.

민석이다.

둘째를 낳았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마침 집에 있기는 답답했다.

그러니 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런 이유라도 없으면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남자들이 만나는 일은 드무니까 말이지.

`ㅇㅋ ㅇㄷ ㅇㅈ?`

그렇게 카톡을 보내고 30초 정도가 지나자 다시 카톡이 왔다.

`둘째니까  집에서 낼 1시 콜?`

`ㅇㅇ`

내가 간다는 의사를 밝히고 나서 몇몇이 간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렇게 간다 안 간다에 대한 카톡이 올라왔는데 단 한 명만 반응이 없었다.

준범이다. 준범이만 반응이 없다.

`준범 게이야... 응답  해라`

`개씨발새끼들아 솔직히 존나 너무한 아니냐?`

 봐도 개빡쳤다는 느낌이 드는 카톡이 온다.

`개새끼들 얼굴 좀 보자 할 땐 바쁘다던 새끼들이 이럴 때만 찾고 지랄이네 아 ㅋㅋ`

그런 카톡이 달린다.

`개씨발... 내가 늬들 결혼축의금으로 10만씩 애새끼들  때마다 10만씩 내가 ATM이네 씨바거.`

하긴 결혼도 안 했는데 축의금이니 돌이니 돈 내니까 좀 빡치긴 하겠다.

`준범 게이야, 주식으로 돈도 많이버는 새끼가 째째한거 아니노? 준수 형님은 존나 어 꼬박꼬박 행사 때마다 오시는데?`

`아나 시바 뭔 자꾸 노, 노거림? 좆병신 일베충 새끼야 싸물어, 고마해라. 준수새끼는 개호구 병신새끼라서 그렇고.`

`우리 준범 게이는 노가 부끄럽노? 알겠다 이거야! 그리고  일베 안하는 데스? D씨 무시하노?`

`아나, 이 병신새끼 제수씨한테 일베충이라고 일러야지 안 되겠다 ㅋㅋㅋㅋ`

`죄송합니다. 그건  자제해주세요.`

한동안 친구놈들과 이런저런 카톡을 주고받았다.

오랜만에 만날 생각을 하니 다들 조금 들뜬 기색이다.

굉장히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놈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데 알아서 잘 먹고 잘살고 있었겠지.

오랜만에 만날 생각을 하니 조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

"아, 어서 오세요."

민석이네 집에 도착하니 약속 시각 15분 전이었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는지 다른 친구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웃으면서 나를 맞이해준 민석이의 아내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고추 새끼들이 언제나 이렇지. 약속 15분 전은 사회의 상식인데 이놈들은 항상 모양이다.

"오! 역시 준수네. 언제나 시간 준수."

"오늘도 병신이네."

"넘하네..."

"제수씨, 이딴 병신이랑은  결혼했어요?"

"글쎄요?  했지?"

그렇게 방긋 웃으며 반겨주는 민석이의 아내.

참 좋은 사람이다. 이런 등신이랑 결혼을 했으니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걸지도 모르고.

안으로 들어가서 소파에 앉으니 제수씨의 다리를 붙들고 있는꼬맹이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해야지?"

빼꼼.

제수씨의 다리를 붙잡고 여기를 몰래 훔쳐보는 여자애.

민석이의 첫째 애다.

"안녕하세요."

"그래,안녕."

배꼽 인사를 하고 다시 고개를 숨기는 그 모습이 뭔가 흐뭇하다.

"몇 개월이지?"

"엉? 이제 30개월."

"애들은 엄청 빨리 크네."

"그렇지. 요즘은  맛에 사는  같기도 하고."

민석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놈 또 한 놈 친구놈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초중고  같은 학교를 다녔던 리얼 불알친구라고 할만한 고추들이 19명이다.

그중에 이곳에 찾아온 건 나를 포함해 4명뿐이니 좀 시원섭섭한 감이 없지 않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다들 한 가정의 가장이니까.

"다들 모여줘서 고맙고 둘째니까 그냥 간단하게 지인들만 초대해서 하려고 불렀어."

그렇게 말하며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돌리는 민석이.

"아내분 지인쪽은...?"

없으면 알아서 눈치를 채야지 참 이 새끼는.

"야, 현우야... 너는 쯧, 아니다."

"다들 애를 한 명씩만 낳아서부르기 좀 껄끄럽더라고요."

제수씨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하자 현우는 볼을긁적이고 딴청을 피웠다.

"흠, 흠... 거."

"아니 이 새끼는 현운데 도대체 언제 현명한 친구가 되는 거지?"

해외여행에서 돌아와 동창들에게 2달러를 돌렸던 여기 있는  중에 가장 잘나가는 놈인 준석이가 현우에게 쿠사리를 먹였다.

"아, 참아."

준석이의 다리를 두드리며 참으라는 병진이.

오늘도 해병대를 나온 병진이는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고 있다.

다들 왁자지껄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며 지랄발광들을 하고 있다.

그래. 이런 분위기지.

오랜만에 동창회에 온 듯한 뭔가 시끌벅적한 분위기.

텅빈 집에서 느껴지던 외로움이 어느새 희석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뭐, 아무튼 그런 느낌이었어."

"선생님도 친구분들 만나고 그러시는구나..."

"그게 무슨 뜻?"

"아뇨, 그냥 신기해서."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6월.

수강생들은 춘추복을 벗고 하복을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반소매의 교복.

뭔가 시원해 보이고 산뜻해 보여서 좋다.

"그래서 모인 친구분들은 다 서울 사시는 분들이에요?"

"뭐, 대부분 일자리 찾아서 서울로 건너왔지. 어디보자..."

우리를 초대한 민석이를 빼면 준범이, 준석이, 현우랑 병진이가 모였다.

아, 그렇구만.

"그러네. 준범이만 빼면 다들 애를 둘 이상 낳았던 놈들이네."

"아~"

이해했다. 그래. 축의금도 한두 푼이 아니긴 하지.

받았으면 돌려주는 것이다. 기브 앤 테이크. 철저한 새끼들이었네.

"뭔가 좀 그러네요. 그런 거."

"합리적이긴 하지."

"선생님은 안 빠지고  가시나 봐요?"

곰곰이 생각해본다.

평소에 카톡도 잘 안 하고 전화도 잘 하지 않지만, 경조사에 부르면 대부분갔던 것 같다.

"그러네. 급한 일이 없으면 대부분 갔던 것 같네."

"뭔가 손해 본다는 생각 안 들어요?"

"왜?"

"아뇨,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어찌 보면 손해 같기도 하다.

나는 애가 없으니까. 돈만 내고 있을 뿐이지.

애라... 그러고보니 민석이네 아이들은 둘 다 귀여웠다.

돌잡이는 연필 청진기 연필 청진기 하며 노래를 불렀는데 뭔가 기다란 게 마음에 들었는지 마이크를 집었던 민석이네 둘째 아이.

`아나, 준범이처럼 딴따라 되게 생겼네! 허허허.`

`뭐 이 새끼야?`

`왜 흥분하고 그라노. 솔직히 불로소득 아니누?`

`애미, 한 번이라도 주식으로 돈을 벌어봐야 그딴 개소리가  나오지.`

주식충과 일베충(본인 주장으론 D씨충)이 서로 투닥이기 시작하자 옆에선제수씨가 머리를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다.

민석이네 집안 분위기가 평소에 어떤 느낌인지 알  같은 분위기였다.

딴 건 모르겠는데 민석이는 결혼을 참 잘했다.

저지랄을 하는데도 받아주고 잘 사는 걸 보면 전생에 나라를 몇 번 구하고 전생한 건지도 모르지.

아니, 집에선 철저하게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회차 인생은 착하고 예쁜 신부와~ 뭐 이딴 개병신같은 타이틀의 인생을 사는 놈이다.

"준범이는 결혼도 안 했으니까 그놈이 가장 손해겠네."

"아하하! 그렇네요. 그래도 좋네요. 그런 점."

"뭐가?"

"뭔가 지인들한테 예의? 를 차리는 모습이 보기 좋은 거 같아요."

예의라.

나는 어차피 대리 부르면 된다고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술을 퍼먹던 놈들을 떠올렸다.

뭐가 돌잔친지 모르겠다. 거의 술자리였는데.

"그나저나 돌잔치라... 뭔가 다른 차원이야기 같네요."

"그렇겠지. 근데 난, 네 나이쯤에 돌잔치도 갔었는데?"

"네?"

"고3 때 사고를 쳐서 결혼하고 20에 아들 낳은 연놈들이 있거든."

"아, 진짜요?"

생각해보니 그놈들 애가 딱 수진이랑 동갑이겠다.

그렇게 생각하자 지금 내가 굉장히 미친놈처럼 생각됐다.

불현듯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 아내라네. 돌잔치도 갔다 왔었지.

처음에 그걸 봤을 땐 낄낄거렸는데  상황이 그리되니 웃질 못하겠다.

내가 굉장히 미친놈처럼 생각되기 시작했으니까.

친구 아들놈이랑 동갑내기인 여자와 썸을 탄다니 완전 미친놈 아닌가?

아니 미친놈 맞나.

"선생님... 선생님은 지금 친구분 아들 또래인 여자애랑 만나고 있는 거네요?"

수진이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다.

이게 평소에는 생각도 안 하고 있다가 불현듯 뇌리에 떠올라오면 숨이 턱턱 막힌다.

그만해줬으면 한다.

"크흠."

나는 헛기침을 하고 커피를 마셔서 어떻게든 진정하려 했다.

"개변태."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 일찍 결혼했다는 친구분이랑 선생님이랑 만나면 엄청 재밌겠다."

흐흐흫.

수진이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흐응 흥흥하며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상상해본다.

 연놈들이 자식이랑 함께 찾아왔는데 내 옆에 수진이가 서 있다.

항상 준수는 법을 준수하지~ 라면서 개드립을 치던 친구놈들이 떠오른다.

뭐 내년이면 불법은 아니니 법적으론 문제가 없다.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그 녀석들은 진짜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도 못 하겠다.

아무래도 친구놈들 중에 그 연놈들이 나를 가장 나무라고 미친놈 취급하겠지.

남들보다 더욱 예의나 법이나 뭐, 아무튼 그런 것들에 민감하던 내가 저지를 역사상 가장 큰 일탈.

녀석들은 어안이 벙벙하겠지.

준수야 정말이냐? 만우절 아닌데?  이런 반응을 보이려나.

"...아마 미친놈 취급하겠지. 걔들 애가 너랑 동갑이니까."

"미친놈..."

괜히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뭔가 분위기가 무거워진 기분이다.

쯧. 항상  모양이지.

38살이나 처먹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입방정을 떨어서 분위기를 조져버리다니.

수진이에게 현실을 들이밀어 버렸다.

그래. 난 38살이다. 너는 19살이고.

이건 뭐 어떻게 수습해야하지...

"선생님이 미친놈이면 저는 뭐에요?"

다행히 수진이가 먼저 말을 걸어와서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글쎄?"

명확히 사귀는 사이도 아니니까.

지금 사귀자고 하면 아마. 아니, 거의 확실하게 나는 일선을 넘을  같다.

고등학생이랑 사귀는 것도 문제인데 여기서 고딩이랑 일선이라고?

그러다가 임신이라도 덜컥하면 어쩌나.

머릿속으로 결혼이니 뭐니 떠올려도 나는 아직 겁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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