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가정방문(3)
"편하게 앉아있어."
수진이를 소파에 앉히고 시원한 보리차를 꺼내준다.
음료수를 마시면 배가 부를 수도 있고 단 게 입에 들어가면 요리의 풍미를 해칠 수 있다.
조금만 기다려라. 오늘은 내가 선보일 수 있는 최고의 요리를 준비해 줄 테니.
"도와드릴 건 없어요?"
"아니, 됐어. 손님은 편하게 앉아계시죠. 아니면 뭔가 불안한 겁니까?"
그리 물어보자 수진이가 입가를 가리며 작게 웃었다.
데자뷔가 느껴지는 이 상황이 재밌게 느껴졌나 보다.
"솔직히 불안해요."
"끙."
뭐 이런 아재가 요리한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난 상당히 요리를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하니까.
남자들의 자취란 배달음식이랑 동의어지만 내 삶은 그리 풍요롭지 않았다.
마트나 시장에 가서 콩나물 한 봉지를 사서 무쳐먹고 끓여 먹는 삶을 살아왔다.
어떻게든 적은 돈으로 최대한 맛있고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건 곧 요리 실력으로 이어졌다.
그때만 해도 그렇게 사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 숨기고 살았는데 지금은 그 과거가 그리 부끄럽지 않다.
결국, 그런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요리가 능숙해졌고 수진이를 집으로 초대해서 요리를 대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니까.
"기대해봐. 오늘도 양파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걸?"
"자꾸 기대하라고 하면 진짜 기대해요?"
"어, 기대해."
"오늘은 뭔가 자신만만하시네..."
수진이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내가 고개를 저으니 약간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TV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자세는 뭔가많이 딱딱했다.
남의 집에 왔으니 그런 걸까.
수진이는 꼭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놀다가 친구네 부모님이 오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바짝 긴장해서 예의가 바른 행동을 취하던 어렸을 때의 나와 닮은 자세로 앉아있다.
곧게 세운 등.
소파에 등을 기대지 않고 TV를 보는 수진이를 보고 있으니 혜정이가 떠오른다.
혜정이는 누워서 TV를 보는 데 말이다.
언젠가 네가 그 소파에 편하게 몸을 맡기고 TV를 보는 모습을 상상한다.
뭔가 그런 생각을 하니 지금 상황이 굉장히 오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저 저녁 식사를 대접할 뿐이다.
받은 게 있으면 돌려주는 삶을 살아왔던 남자가 늘 하던 대로 하는 것뿐이다.
별로 재밌지도 않은 예능을 보며 재밌다는 듯이 웃음소리를 내는 수진이.
언젠가 너와 나란히 앉아 재미없는 예능을 보며 재밌다고 생각하는 날이올까?
미치겠네. 자꾸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저녁 식사 준비를 서둘렀다.
수진이는 어머니가 간호사시라고 했다.
나이트 시프트에 들어가셔서 오늘은 집에 없다고 하셨나.
집에 돌아가도 아무도 없는 상황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늦게까지 수진이를 이 집에 머물게 해선 안된다.
혹시 모른다.
혹시 내가 뭔가 엇박자에 러브코메디같은 사건이 일어나서 어색한 상황이 연출된다면?
그런 나에게 부담감을 느낀다면?
두렵다. 나는 이제 네가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너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가 두근거리면서도 조금이나마 두려움을 느끼는 나 자신이 약간 멍청하게 느껴진다.
내 고민 따윈 하나도 모른다는 듯이 예능을 보며 즐거운웃음소리를 내는 수진이.
담이 큰지, 그만큼 나를 신뢰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남자로 보지 않는 것인지.
후우. 진정하자.
***
요리가 끝나 수진이를 식탁으로 불렀다.
뭐 별로 대단한 건 없다.
저번과 다르게 수프를 추가했고 수프에 찍어 먹을 빵을 미리 사 왔다.
뭔가 허전해 보여서 매쉬드 포테이토와 샐러드까지 만들었다.
샐러드는 대충 마트에서 파는 것을 끼얹은 물건이라 수고는 그만큼 들지 않았다.
"와! 진짜 레스토랑 요리 같네요? 신기하다!"
수진이는 휴대폰으로 내가 만든 요리의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찰칵찰칵.
여러 각도로 한참 동안 사진을 찍은 수진이가 나름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잘 먹겠습니다, 선생님!"
"그래."
그렇게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수진이가 요리를 입에 넣을 때까지 음식을 입에 넣지 않았다.
배고픔보다 수진이의 감상이 더 중요했다.
"와 진짜 맛있네요!"
수프를 한입 떠먹고 빵을 스프에 찍어 먹으며 맛있다는 말을 하는 수진이.
그건 메인 메뉴가 아니다. 빵은 사온 거고 스프는 오X기 크림 스프를 적당히 어레인지 해서 만든 스프니까.
내 요리라고 하기도 모호한 물건이고. 얼른 스테이크랑 파스타를 먹어봐.
내 마음이 닿았는지 수진이가 스테이크를 썰어 입으로 집어넣었다.
"음~!"
수진이는 한동안 입을 우물거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어."
"허풍인 줄 알았어요."
"..."
"그게... 그, 스테이크라고 해봤자 집에서 하면 뭔가 겉은 타고 육즙은 마르고 굽기 정도도 마음대로 못하고 그렇잖아요?"
"음."
"그래서 그냥 소고기를 굽고 스테이크라고 주장하는 요리가 나올 줄 알았어요."
나는 수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식기를 들었다.
다행이다. 수진이의 입맛에 맞았나 봐.
좋아. 먹자. 이제 먹어도 되겠어.
오늘은 평소보다 천천히 식사하자.
수진이와 앉아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니까.
수진이와 단둘이 앉아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지금. 나는 이곳이 꼭 레스토랑으로 보였다. 레스토랑에서 하는 데이트다. 최대한 이 시간을 즐기고 싶다.
"솔직히 남자의 요리라고 방심했네요."
수진이는 그리 말하면서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듯한 기색을 보였다.
"왜?"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진이를 고개를 젓고 식사를 재개했다.
한참 그렇게 식사가 이어지다가 잠시 식기를 내려놓은 수진이가 입을 열었다.
"요즘 선생님 수업, 뭔가 달라졌네요."
"별론가?"
수진이가고개를 저었다.
그래. 나도 나름 괜찮다고 생각 중이다.
"뭔가 이렇게 아, 피곤하다~ 싶을때쯤에 진도가 딱 멈추는 느낌이라서 한숨 돌리고 있어요."
"그냥, 매일 똑같이 하는 것도 뭔가 아니다, 싶어서."
"그래요?"
"어."
"흐응~"
다시 식기를 든 수진이가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혹시... 저 때문이라던가?"
"..."
"아, 이거 적중이에요?"
"..."
"아, 아~ 이거 진짜 맛있네요. 진짜 맛있다."
뭔가 쑥스러운 기분이다.
우리는 어색해져서 암묵적인 합의를 했다.
그냥 밥이나 계속 먹자고 말이다.
우리는 어색한 분위기에 휩싸여 식사를 했다.
하지만 그 어색함이 뭔가 쑥스럽고 설렜다.
금요일이 되기 전에는 시간아 빨리 달려라 금요일에 시간 어때요 하며 한때 유행하던 노래를 머릿속에서 흥얼거렸는데.
지금은 시간아 멈춰라를 떠올린다.
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이어졌으면 좋겠다.
***
식사가 끝나고 시간을 확인해보니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눈치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소파 앞 테이블에 꺼내두었던 차 키를 손에 들었고 수진이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데렐라를 집으로 돌려보내 줄 시간이다.
시간이 제법 늦어서 오늘은 운동을 못 하겠는데.
이런, 뭔가 점점 헬창에 가까운 정신상태가 되어가고 있다.
"조금 아쉽네요."
"응?"
수진이가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나한테로 고개를 돌린 듯한 느낌이다.
"처음엔 선생님 집에 찾아가면 선생님 집은 어떤 느낌일까 확인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래?"
"네, 뭔가 만화에서보면 이렇게 남자애 방에 찾아가서 졸업앨범도 찾아보고 그러잖아요."
"그렇긴 하지."
"보고싶은데... 선생님 앨범."
수진이는 그리 말한 다음 몸에 힘을 뺐다.
많이 피곤하고 긴장도 됐겠지.
기혼자의 집이라고 해도 난 남자다.
혹시 사고가 터질 수도 있으니 긴장을 안 할 리가 없지.
생각해보니 내가 참 대담한 짓을 했다.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다른 여자를 초대해서 식사하다니.
이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어휴. 시발.
이 상황에서 아내가 찾아왔으면 어땠겠냐는 생각을 했더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줌마들이 막장드라마를 왜 그렇게 좋아하나 생각했는데 이런 느낌 때문이었나.
수진이의 말을 마지막으로 차 안은 정적에 둘러싸였다.
나는 수진이가 했던 말을 머릿속으로 되 내였다.
앨범, 앨범이라.
나는 결혼한 이후 친가에서 앨범 같은 물건들은 하나도 챙겨오지 않았다.
심플한 남자. 그것이 나다.
굳이 필요 없는 물건을 쌓아두지 않는다.
추억이란 이름으로 여러가지 물건을 쌓아두시는 어머니랑 다르게 나는 물건이 적은 게 깔끔해 보여서 좋다.
애초에 남자가 평생을 살면서 앨범을 열어볼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 생각해서 굳이 지금사는 집에 앨범을가져오진 않았다.
가져올 걸 그랬나.
나는 앨범에 대해서 떠올리다가 입을 열었다.
"앨범은 친가에 있는데 말이야."
"아, 그래요? 좀 아쉽네요. 멀어요?"
"뭐 좀 되지. 부천이니까."
"부천?"
수진이는 부천이라는 말을 꺼낸 다음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기색을 보였다.
때마침 빨간불로 신호가 바뀌어 차를 세웠다.
그리고 옆에 앉아있는 수진이를 바라봤다.
입술이 씰룩인다.
내 표정을 거울로 보면 장난에 성공한 꼬맹이 같은 미소가 떠올라 있겠지.
"왠지 첫 데이트는 부천으로 하고 싶었어."
뭔가 추가적으로 설명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내 별것 없던 학창시절을 너와의 데이트로 조금 특별하게 장식하고 싶었다고 설명하고 싶기도 했다.
너에게 내가 이런 곳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점도 있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생각에 부천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굳이 너에게 그런 것들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마법은 비밀을 고하는 순간 풀리는 법이니까.
수진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복잡하겠지.
내가 어떤 의미로 부천으로 데려갔는지 고민하고 있으리라.
뭔가 그럴싸한 이유가 여럿, 머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고 있겠지.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그 해답을 들려주지 않겠다.
그리하면 넌 집에 들어가서 잠이 드는 그 순간까지도 날 떠올리게 되겠지.
내가 널 부천으로 데려간 이유를 떠올리며 자기 전까지 내 생각을 하게 되리라.
나를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나에게 빠져들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
"오늘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고 나간 수진이.
나는 이미 수진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집 앞까지 배웅을 하고 싶었으나 수진이는 혹시 우리의 관계를 들킬 걸 걱정해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 내려주길 희망했다.
나는 밤길이 걱정도 되었으나 대한민국의 치안을 좀 더 신뢰해보기로 했다.
"그래,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고, 푹 쉬어."
"예, 선생님도 좋은 주말 되세요."
수진이가 문을 닫고 떠나려고 하다가 다시 문을 열었다.
"왜? 뭐 두고 내린 거라도 있어?"
나는 수진이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수진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수진이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라왔다.
"선생님이 쓴 소설들을 읽어보면 선생님은 본인이 매우 초라하고 재미없는 아재라고 생각하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도 모르게 몸이 흠칫 떨렸다.
나의 글에 그런 감정을 읽었다고.
나도 모르게 내 소설에 그런 감정을 녹여냈단 말인가.
내 글을 읽던 독자들이 내 소설을 보며 개병신같은 소설이란 욕을 했는데 그 개병신이라는 욕이 꼭 나의 삶을 지적하는 느낌이 되어 조금 우울해졌다.
"선생님은..."
수진이는 말을하다말고 뭔가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차분히 수진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선생님은 본인 생각보다 더 멋진 사람이에요. 그럼 이만!"
탁.
수진이가 문을 닫고 후다닥 뛰어갔다.
백미러로 수진이의 모습을 살피니 코너에서 힐끔거리며 내가 떠났는지 살펴보고 있다.
저렇게 힐끔거리며 나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얼마 전에 수진이가 썼던 소설에 나오는 성녀의 모습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성녀인가.
그러니 내 마음을 이렇게도 녹여버리는 것이로군.
나는 정화마법에 당한 악마처럼 힘없이 추욱 늘어지고 말았다.
몸에기운이 쭈욱 빠져 이대로 잠이 들 것 같았다.
하지만 가야지. 내가 이곳에 있으면 수진이가 집으로 들어가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액셀을 밟았다.
집으로 향하는 길.
내 머릿속은 수진이가 해준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생각보다 더 멋진 사람!
생각보다 더 멋진 사람!!
생각보다 더 멋진 사람!!!
나도 모르게 입가가 씰룩거린다.
오른손으로 얼굴을 만져보니 얼굴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큰일이다.
자기 전까지 나를 떠올렸으면 좋겠다며 이것저것 하지 않던짓을했는데.
아무래도 오늘도 잠을 자기엔 글러 먹은 것 같다.
잠이 들 때까지 네 생각이 날 것 같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