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가정방문(2)
`금요일 어때요?`
집에돌아가서 한참 수진이와 카톡을 주고받던 중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금요일?`
`네. 선생님 요리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래그래`
금요일이라. 오늘은 수요일이다.
확실히 금요일에 식사하고 주말에 쉬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냉장고를 뒤져봤다.
냉장고에는 아직 충분한 식재료가 들어있다.
아내와 주말에 장을 봤었지...
장인어른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인어른은 아내 아니, 혜정이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장인어른을 떠올려본다.
어딘가 나와 비슷한 느낌이 나는 분.
굳이 거스르지 않고 그냥저냥 받아들이면서 살아온 그런 사람.
하지만 선을 넘어버리면 폭발해버리는 그런 사람.
장인어른의 살벌한 시선이 떠오른다.
소중하게 키워오던 딸내미가 저지른 배신에 가슴이 찢어지고 미칠 지경이셨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장인어른은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셨다.
나에게 미안하다면서도 나에게 버림받아 슬퍼할 자식이 떠올라 나를 미워한다던 장인어른.
어른이란 정말 복잡한 존재다.
나는 장인어른에게 혜정이가 집까지 내연남을 끌어들여 물고 빠는 관계였다는 극단적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는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저렇게 온화하고 무해해보이는 분이 어제 그런반응을 보이셨는데 혜정이가 집까지 남자를 끌어들여서 물고 빨았다고 말한다?
아, 뭐... 상상하기도 싫어지는구만.
잊자. 그런 소름이 끼치는 생각보다는 내일 수업을 어찌할지를 생각하거나 수진이를 해줄 요리에 대해 떠올리는 게 더 중요하다.
아니, 요리에 앞서 미리 집 안 청소부터 해둬야겠어.
혹시 수진이가이 집에 찾아왔을 때 뭔가 불쾌한기분이 들지않도록 꼼꼼하게 청소를 했다.
청소를 끝낸 다음엔 내일 수업을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생각해보니 학생들의 수업에 대한 집중도는 30분이 한계에 가깝다.
아무리 훈련을 통해 학습되어 있다 하더라도 지루한 수업을 계속해서 듣는 건 고문에가깝지.
지금까진 그것에 대해 고민한 적 따위 없었다.
나는 돈을 벌러 학원에서 강의하는 인간이었으니 수강생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애초에 난 선생이 아닌 강사다.
학교 선생님도 아닌데 수강생에게 가르침이나 교훈을 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 수업은 수진이도 듣는 수업이다.
수진이는 바쁘다.
수능 공부도 해야 하고 어머니를 대신해서 집안일도 하고 일일 연재도 해야 하지.
그렇게바쁘게 사는 수진이에게 내 재미없는 강의를 들려주며 고문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달라져야지.
수강생들을 고려한 새로운 진행방식을 고려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으로는 학생들의 집중도가 떨어지는 30분 전후로 약간의 잡담을 하여 학생들의 사고를 환기하고 다시 수업하는 플랜으로 수업을 생각해봤다.
이렇게 하려면 어느 정도의 속도로 말해서 어디까지 이야기를 진행해야 평소와같은 진도를 나갈 수 있을까.
1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달라지지 않았던 수업 스타일을 바꾸는 일이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지.
지금도 조금 짜증이 나고 귀찮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수진이가 내 수업을 즐겁게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왠지 힘이 나고 이 시간이 알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두 시간이 넘도록 수업 진행 방식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렇게 새로운 수업 진행 방식에 대해 어느 정도 가닥이잡혔을 때 깨달아 버렸다.
너무나 역겹고 불쾌하던 학원 강의가 어느새 조금은 기다려지는 일이 되어버렸음을.
***
탁탁.
평소와 같은 아니, 평소와는 조금 다른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를 진행하고 30분의 시간이 흘러 수강생들의 집중력이 떨어졌다 싶을 때 분필과 책을 내려놓고 잡담을 시작했다.
내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내 이야기를 들을 것이고 아닌 사람은 칠판에 적힌 내용을 판서하거나 쉬겠지.
아무튼, 오늘의 잡담은 학생들에게 내가 순문학도의 꿈을 품고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는데 결과가 좋지 않으니 배고픈 베짱이가 되고 싶지 않으면 가지 말라는 진심 어린 충고였다.
강의실에서 1~2명 정도가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신기하다. 이 교탁이란 장소는 정말 신기하지.
학생들이 보이는 작은 반응이 곧장 눈에 띈다.
나는 짐짓 아닌 척을 하면서도 그 흠칫하던 학생들을 바라봤다.
나도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는데 어느새 여기서 강의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몇 명의 수강생들이 살짝 웃음소리를 내었다. 불쾌한 비웃음은 아닌듯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음을 깨닫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나온 이야기는 또다시 웹소설에 관한 이야기.
예전과 달리 소설의 접근성이 편해졌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전처럼 소설의구성단계나 복선, 상징성이나 1인칭, 3인칭 같은 형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학문으로 글을 배우면 확실히 형식에 맞고 아름다운 문장이 나올 수도있으나 그런 것에 얽매이면 점점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글이라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
책을 읽다가 나도 이 정돈 쓰겠네? 싶은 마음이 떠오르면 써보라고 말했다.
웹소설로 월억에 가까운 수익을 내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얽매이지 말고 본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다면 일단 이야기가 되든 안 되든 써보라고 했다.
갈매기의 꿈이라는 책은 전 세계에 수천만 부가 팔렸지만 출간되기 전에는 20여 곳에 가까운 출판사에서 출간거부를 당한 책이었음을 말하자 몇몇 학생들이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학생들을 눈에 담으며요즘은 나조차 웹소설을 쓰며 월억킥의 꿈을 꾸고 있다고 말했다.
혹시 내가 어느 날 말도 없이 사라진다면 월억킥 작가가 되어서 강사를 때려치운 거니 그렇게 알라고 말했다.
그러자 강의실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기했다. 내 강의에서 비웃음이 아닌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날이 올 줄이야.
나는 뭔가 알 수 없는 뿌듯함에 기분이 좋아져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마침 5분의 시간이 흐른 것을 확인하고강의를 속행했다.
그렇게 강의를 계속하니 딱 준비했던 부분까지 강의를 마칠 수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주변을 둘러본다.
신기하다. 보통 강의가 끝나면 다들 불쾌한 표정으로 책상에 머리를 처박는 게 일상인데지금은 다들 피곤해 보이면서도 뭔가 기분 좋은 피곤함에 절은 느낌이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음소리를 내는 수강생들.
좋은 표정이다.
너희는 그런 식으로 웃고 있었구나.
10여 년간 강사를 하며 지금에서야 학생들이 이렇게 싱그럽게 웃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변했나? 변했다.
봐라. 내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웃고 있잖은가.
내 변화에주변 사람들도 아주 조금씩 영향을 받고 있다.
나는 불현듯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에게 당신의 가치관을 밀어붙이며 어른에게 말대답하지 말라며 건방지다는 이야기를 하시던 아버지.
난 책을 읽거나 어디서 이야기를 들으면 그걸 표현하고 싶어 가슴이 근질근질한 부류의 인간이다.
그것이 말이 되었든 글이 되었든 어쨌든 난 뭔가로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마음이 뒤틀려 학생들에게 내 지식을 뽐내고 설파하며 나보다 가방끈이 짧은 학생들을 상대로 희열을 느끼는 저열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눈치챘다.
난, 아버지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음에 섭섭함을 느꼈으면서도 그 행위를 학생들에게 그대로 하는 인간이었다.
나는 어느새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어있었을 뿐이다.
물론 그 모습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겠지. 나는 체면을 생각하는 인간이니까.
하지만 눈치가 빠른 애들은 은연중에 드러나는 나의 본질을 눈치채고... 그랬기에 나를 비웃었겠지.
학원에 강의를 들으러 오는 학생들을 떠올려봤다.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에 찌든 학생들의 표정.
지금은 그들의 그 표정을 조금은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
내게 그런 능력이 없다면 적어도 내 강의를 듣는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얹어주는 강의는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성직자도 선생님도 아니지만 적어도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에 서 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부족한 누군가를 속으로 조롱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당연한 것을 이제서야 천천히 배워나가는 중이다.
누가 학생이고 누가 선생인지 모르겠다.
나는... 어른이였다.
***
오늘은 수진이가 바쁘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바쁘긴 하겠지.
수진이는 공부도 하고 집안일도 하고 일일연재도 하는 학생이니까.
내일 수진이를 집으로 초대하면 연재할 시간이 부족하리라.
그러면 오늘 2화 분량의 글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피곤한 하루가 되겠지.
글은 쓰고 싶다고 써지는 것이 아니다.
머릿속에 어떤 문장이 떠오르면 그걸 글로 쳐넣는 일이니 쓰고 싶다고 막 써지지도 않겠지.
굉장히 힘들 테지.
나 때문에 수진이가 피곤하고 바빠진다는 것에 미안했다.
그러니 사죄의 의미도 담아 수진이에게 최선의 대접을 해줘야지.
나는 주머니가 가벼워지기 시작했음에도 수진이에게 뭘 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역시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스테이크나 파스타겠지.
솔직히 그것 외엔 잘 모르겠다.
수진이를 집에 초대해서 닭도리탕이나 된장찌개를 해먹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음, 뭔가 나쁘진 않다.
그런데 그런 일상을 떠올리니... 그건, 뭐, 음, 그냥, 그거다. 그거.
결혼한거 같은 느낌이다.
결혼. 결혼이라.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수진이를 볼 때마다 계속 결혼 생각이 난다.
주책이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나의 1년과 수진이의1년은 다르다.
그러니 초조함이 앞서는 것이다.
조심하도록하자.
수진이가 이 집에 오는 건 나를 믿고 있기 때문일테니.
이곳에서 사고를 친다면우리의 관계는 완전히 박살이 난다.
나는 아내가 나가서 조용해진 집을 둘러봤다.
적막하다.
혜정이가 떠나버리고 이젠 나 혼자 살게 될 집.
나는 TV조차 잘 보지 않으니 이 집이 떠들썩해지는 날은 오지 않겠지.
만약 이 상황에서 수진이가 나에게 환멸을 느끼고 멀어진다면.
나는 혼자서 살기엔 너무 넓은 이 집에서 혼자서 살아야 한다.
나는 자취만 10년을 넘게 했다.
혼자라는 것에 익숙하다 못해 프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서 이곳에서 생활한다는 그 사실에 씁쓸함과 외로움, 소외감을 느꼈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서 산다는 것은... 불륜을 저지른 아내와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보다 더 괴롭게 느껴졌다.
***
오늘도 강의를 했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집중도가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오늘도 강의가 시작된 지 30분가량 시간이 지났음을 확인했다.
나는 또 학생들에게 주저리주저리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면 몇몇은 칠판의 판서를 보고 노트에 필기했고 몇몇은 내 헛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몇몇은 멍하니 앉아 휴식을 취했다.
이 강의 진행을 하고 나서 눈치챈 것이 있다.
학생들이 강의에 집중하는 집중도가 비약적으로 올랐다는 것.
역시 느슨하게 풀어주고 다시 팽팽하게당겨야 탄성이 생기는 법인 모양이다.
학생들에게 5분간의 쉬는 시간을 주고 다시 수업을 진행했다.
몇몇은 아직 아까의 멍함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전체적으로 집중도가 올라간느낌이다.
좋다. 원래라면 절반은 떨어져 나갔을 시간인데 지금은 아주 좋다.
나는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강의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일과가 끝이 나고 수진이와 약속한 장소에 차를 세웠다.
이제 수진이가 오길 기다릴 뿐이다.
멍하니 앉아서 수진이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수진이가 손을 흔들고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타라는 손짓을 했다.
수진이가 문을 열고조수석에 앉고 인사를 건네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수진이는 오늘도 귀엽구나.
잠깐 시간을 달라고 해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교복을 사복으로 갈아입고 온 모양이다.
무릎을 넘는 조금 긴 치마 형태에 허리에 악센트가 들어간 하늘하늘한 원피스.
너는 옷을 입는 센스가 좋은 걸까? 아니면 그냥 네가 예쁜 걸까?
아니면 둘 다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차를 몰았다.
이제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집에 도착한다.
나의 그 집으로 수진이를 데려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
나는 변화가 싫다. 아니,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이 변화가 너무나 기껍다.
오늘은 수진이에게 나의 또 다른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기대해도 좋다.
깐깐하던 혜정이도 내 요리엔 뭐라 한 적이 없었으니까.
양파 김준수의 새로운 모습을보여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