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가정방문(1)
딱딱.
칠판에 판서해나간다.
어젯밤 수진이에게 카톡이 왔다.
나는 카톡의 내용을 읽어보고 답장을 하려다가 수진이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져 전화를 걸었다.
밤의 감수성이었는지 수진이에게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연락했다는 이야기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 소리를 듣자 짧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고 조금 들뜬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던 수진이.
분위기가 괜찮아졌다고 생각해서 나는 장난을 쳤다.
내일 카페에 가는 건 무리일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러자 갑자기 휴대폰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뚝 끊겼다.
나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내일은 너랑 저녁이 먹고 싶어서 그래`라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전화가 끊어졌고 수진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뭐가 38살 김준수 밀당 귀찮음인지`
그 카톡을 읽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굳이 전화를 끊지 않아도 되는데 끊고서 그런 카톡을 보내온 건 당황한 목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수진이가 하는 행동, 그 전부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카톡으로 어디서 저녁을 먹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폭탄을 던져왔다.
`오늘 저희 엄마 야간 시프트라서 안 계세요.`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이건 설마 그런 뜻일까.
잠자코 있으려니 본인의 집에서 식사하자는 이야기를 꺼낸 수진이.
나는 곧장 알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입꼬리가 멋대로 씰룩 씰룩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은 오늘 있을 저녁 식사에 대한 것으로 가득했다.
그래서였다.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평소에 하지 않던 쓸데없는 말을 내뱉게 되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이번 해는 전염병이니 뭐니 시끄러워서 학교도 못 가고 여러 가지로혼선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갑자기 헛소리를 시작하는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
"요즘은 학생들의 사교육비 절감을 위해서 EBX같은 문제나 모의고사에서 나왔던 문제들을 내는 경우가 좀 늘었습니다."
몇 명은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고나머지는 칠판의 내용을 옮겨적고 있다.
"고전시가나 사자성어 같은 부분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그다음 문학, 비문학으로 갈리는데 이때는 누가 더 글을 빨리 읽고 누가 더 요점을 정확하게 잡아내고 답을 맞혀나가는 지가 중요합니다."
몇 명의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다.
"결국, 지문을 빠르게 읽고 중요한 부분을 캐치해 내는 것. 흔히들 국어는 센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죠.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학생들이 공부할 분량도 산더미에 내용도 어려운데 국어에 많은 시간을 쓸 여력이 있겠습니까?"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 범위에 나올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은 확실히 공부하고 국어를 수학이나 영어처럼 귀찮은 학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포인틉니다."
그러자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는 학생들.
말로 하면 쉬운 법이다.
"웹소설도 좋은 책입니다. 가독성을 위해서 단조로운 문장, 필요 이상으로 대화체가 자주 나오는 것들이 추세입니다만 읽다 보면 이게 중요한 말인지 지문 낭비인지정도는 파악되겠죠."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몇몇 학생들이 웹소설이라는 말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런가. 너희는 웹소설을 보는구나.
"공부하다 머리가 아플 땐 좀 쉬어줘야죠. 그렇게 쉴 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웹소설을 읽으면 재미도 있고 또 글을 읽는 것이다 보니 독해력 향상에 도움이 조금 되기도 합니다. 저도 즐겨보고요."
"지문을 볼 때 어려워 마세요. 순문학이든 비문학이든 웹소설이든 작가가하고 싶은 말은 분명히 단출합니다. 길게 늘여서 썼을 뿐입니다. 국어라는 과목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띵ㅡ
울리는 벨소리.
"오늘은 사담이 좀 많았네요. 아직 필기를 못 한 친구들이 좀 많은 것 같으니 죄송하고요 반장은 5분 후에 칠판 좀 지워줘"
나는 그렇게 말하며 반장한테 다가가서 "항상 고맙다." 그렇게 말하며 사탕을2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웅성웅성.
강의실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수진이와의 저녁 식사를 떠올리느라 다른 내가 뭔가 헛소리를 많이 한 것 같은데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뭐가 중한디? 수진이가 중하지.
***
나는 수진이의 집에 초대되었다.
"놀랐어요."
"응?"
"선생님이 수업 중에 진도 외의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거 처음 봤어요."
"나도 처음이야."
"흐응? 무슨 마음의 변화라도 있으셨나~"
수진이는 냉장고를 뒤져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에게 직접 요리를 대접해 주려는 듯한 느낌이다.
"요리도 할 줄 알아?"
"어머니가 간호사셔서요. 야간 시프트도 있으신데 집안일도 하고 그러면 바쁘니까 도와드리다가 배웠어요. 요즘은 레시피도 많고."
그렇게 말하며 재료들을 꺼내는 수진이
"뭐라도 도와줄까?"
"손님은 얌전히 계세요."
"아니, 그래도 뭔가 불편한데..."
그리 말하자 식칼을 들고 나를 돌아보는 수진이.
"뭐에요? 내 요리가 맛없을 거 같아서 그러는 거예요?"
식칼을 들고 노려보니 뭔가 분위기가 있다. 무서웠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그냥...그럼 TV 보고 있으면 되나?"
"예, 다 되면 부를게요."
나는 그렇게 잠시간 기다렸다.
밥솥에 밥을 안치고 요리를 하는 그녀.
음 당근, 양파, 고기, 감자...
"카레네?"
"예? 어떻게 알았어요?"
"당근 쓰는 요리는 조림이 아니면 즉석에서 할만한 게 카레 정도지. 뭐. 고기도 닭고기가 아니니 카레용 고기겠고."
"와!"
나를 돌아보며 짐짓 놀란 표정을짓는 수진이
"요리 잘하시나 봐요?"
그녀는 요리 밑준비를 하며 그렇게 물었다.
"잘하는지는 모르겠고 대강 다 하지. 제법 자취를 오래 했으니까."
"의외네요."
"그런가?"
"그래요."
수진이는 작게 웃으면서 요리를 계속했다.
제법 손재주가 좋은지 밑준비가 척척 진행되고 있다.
모든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평소에도 요리를 자주 한다는 증거다.
"그러면요. 언젠가 선생님 요리도먹어보고 싶어요."
"그래?"
"네. 뭐 잘하시는 거 있어요?"
"음~ 잘하는 거라."
잘하는 거라. 잘하는 건 뭐... 조림?
다른 요리도 레시피가 있고 시간이 있으면 어느 정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잘하는 게 뭔지에 대해서 생각하니 얼마 전에 했던 요리가 떠오른다.
아내와 결혼기념일을 기념해서 해먹었던 양식.
"음... 스테이크랑 파스타도 나름 잘해."
"아, 진짜요? 그거 어려운 거 아니에요?"
"파스타는 어떤 소스가 메인인가에 따라 달라서 쉬운 것도 많고 스테이크는 조금 번거로울 뿐이지 할만해."
"와, 진짜 선생님은 양파 같은 사람이네요."
"그래?"
그 말에 기분이 좋아져 수진이를 바라봤더니 양파를 썰고 있다.
무섭다. 양파 같다고 말하면서 도마에서 양파를 다지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꼭 너를 다져버리고 싶다고 호소하는 거 같지 않나.
"처음엔 그냥 호기심이었어요. 카페에 선생님이 있는 게 보여서 말을 걸어볼까 말까 고민했어요. 정말 호기심이었는데..."
수진이는 말을 하면서도 감자와 당근을 썰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썬 채소들을 볶기 시작했다.
수진이는 재료를 살짝 볶고 끓이는 타입인가 보네.
"그런데 뭔가 생각했던 거랑다른 사람이고. 음~ 그래요,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재밌는 사람이 어떤 뜻일까?
긍정적인 뜻으로 생각하자.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후후."
수진이는 작게 웃으면서 내 물음에 답을 해주진 않았다.
궁금한데.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결국, 수진이는 아무 말도 없이 요리를 계속했고 그대로 대화가 끊어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기로 했다.
하지만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연예인들을 바라보는 건 지독하리만큼 재미가 없었다.
***
"잘 먹겠습니다."
"네, 그럼 저도 잘 먹겠습니다."
수진이가 꺼내놓은 밑반찬과 카레를 먹는다.
"맛있네.카레 맛이야."
"피ㅡ 그게 뭐예요."
구시렁거리며 수저를 입에 무는 수진이.
"맛있어, 맛있어."
나는 허겁지겁 평소처럼 밥을 먹었다.
"많이 배고프셨어요? 죄송해요."
"아니, 난 원래 빨리 먹어."
"네? 그래요?"
"저번엔 우동이 뜨거워서 천천히 먹은 거고."
"아하."
수진이는 뭐가 또 그리 재밌는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카레를 먹었다.
우물우물.
음. 진짜 평범하게 맛있다. 수진이의 카레는.
"또 하나 알게 됐네요. 진짜 양파 같네요.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며 양파가 얹어져 있는 카레를 입으로 옮기는 그녀.
"그러면 지금은 날 어떻게 생각하는데?"
수진이는 내가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지 생각지도 못했는지 눈을 껌뻑였다.
입에 넣은 카레를 천천히 씹어 삼킨 수진이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곤 집을 한 바퀴 쓰윽 훑어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고 나도 수진이를 따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는 거 같아요?"
수진이를 바라봤다.
입가에는 짓궂은 미소가 걸려있었고... 그게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등에 악마 날개랑 꼬리가 돋아있을 것 같다.
앙큼한 녀석.
그래. 알 것도 같다.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시는데 남자를 끌어들인다고? 그게 얼마나위험한 행동인가.
그런데도 나를 초대해준 건 그만큼 나를 믿고 있다는 뜻이겠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이해했다.
이해한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가 씰룩였다.
미소를 참지 못하겠다.
"글쎄, 뭐. 나빠지진 않았겠지."
어떻게든 평정심을 가장해 그런 말을 내뱉고 입으로 카레를 밀어 넣었다.
입안에 카레가 있으면 씰룩이는 입가를 들키지 않을 테니까.
내가 허겁지겁 카레를 먹자 수진이는 내가 밥을 씹지도 않고 삼키는 거 같다고 말하며 키득거렸다.
어느새 숟가락을 내려놓고 내가 밥을먹는 모습을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는 수진이.
나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끼며 카레를 먹었다.
***
식사가 끝나고 너무 늦기 전에 집으로 가기로 했다.
"맛있었어. 카레."
"네. 그래 보였어요."
수진이는 웃으면서 나를 배웅해줬다.
"그, 답례로 나도 요리해줄게."
"네?"
내 요리를 먹고 싶다고 한 건 빈말이었나?
"아내가 집을 나갔어."
"..."
"내일, 아니면 주중이든 말만 해. 나도 요리해줄게."
"..."
"그럼 잘 자고."
"네... 안녕히 가세요."
끼익 덜컹 삐리릭.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수진이는 결국 언제 요리를 해달라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전했다.
며칠 만나지 못한 그 잠깐 사이에 무슨일이 생긴 것인지 머릿속이 복잡하겠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겠지. 물어보고 싶을 거다.
하지만 굳이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그냥 이혼하고 홀가분해져서 너에게 가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을 뿐이니까.
그러니 나와 있을 땐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수진이에 대해 떠올렸다.
너는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처음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냥 궁금하다고 했나.
그럼 우리가 카페에서 만났던 그 순간은 네가 의도해서 마주친 걸까.
혹시 그 카페가 단골이라던 말도 거짓이었나.
카페의 사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게 사실은 너 때문이었나.
아재와 여고생의 조합에 의문을 품었던 게 아닌 단골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던 건가.
그렇구나. 너의 그 사소한 호기심이었구나.
우연이 아닌 필연적인 만남이었구나.
네가언제부터 나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러브레터라고 느꼈던 그건 사실 러브레터가 아닌 미끼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네가 던진 떡밥을 멋대로 물어버렸고 도망치려 했다.
그래서 도망치려고 하니까 잡아버렸는데 점점 나에 대해 알아가며 견해가 바뀐 것 같다.
역시 난 틀리지 않았다.
내 변화하기 시작한 모습에 그녀가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해.
그래. 양파 같은 남자.
나는 양파 같은 남자가 되도록 하자.
그리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