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로그(3)
오후 11시.
수진이가 쓴 소설도 읽었고 운동도 마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나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메모장에 한 글자씩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멋대로 노트북을 훔쳐본 것에 화를 내고는 휴대폰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던 수진이.
내 휴대폰에서 도대체 뭘 찾아본 걸까.
내가 휴대폰으로 야동을 보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아무튼, 휴대폰 패턴을 바꿔야겠지. 한번 있었던 일은 두 번 있을 수 있으니까.
귀찮아죽겠네.
나는 패턴을 잊지 않도록 패턴을 포스트잇에 작게 그려 넣었다.
혹시 까먹을지도 모르니까 만약을 위해서.
이 나이가되고 나선 나도 나 자신을 잘 못 믿겠다.
음... 한 3일 정도 패턴을 입력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이제 조금만 지나면 내가 평소에 잠들 시간이다.
평소에 12시에 잠을 자고 7시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패턴.
오늘 해야 할 것들은 다 끝났다.
아니, 가장 중요한 게 남았지.
오늘은 자기 전에 수진이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해야 한다.
어떤 문장이 좋을까.
심플하게 `나 이제 잔다. 잘 자렴.` 이렇게 보낼까.
으음. 이건 좀 아닌 거 같다.
이렇게 딱딱하고 재미없는 문장은 강제성이 느껴져서 수진이도 싫어하겠지.
모르긴 몰라도 이런 걸 바라지는 않을 것 같다.
뭔가 부드러운 표현이 없을까? 내가 그동안 어떻게 했더라.
...잠깐만.
그러고 보니 나 수진이랑 카톡을 한 적이 없네.
내가 쓰던 소설을 카톡으로 보냈던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카톡이었다.
이런 병신새끼를 봤나.
불알친구랑도 카톡을 하고 학원 강사들이랑도 종종 카톡을 주고받으면서 수진이한텐 카톡을 보내 보자는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한 건가.
아, 수진이가 카톡을 내휴대폰으로 카톡을 봤겠구나.
내가 그냥카톡을 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고향 친구들과 단톡방을 만들어놨고 직장 동료들과도 종종 카톡을 하는 걸 읽었을 테니 의아했겠지.
특히나 이혼하겠다던 남자가 아내가 보내온 카톡을 보고 피식 웃고 있었다면 수진이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질투인가.
아니,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내 좋을 대로 생각했다가 데이트에서 물을 먹은 게 엊그제다.
다 잊고 차분하게 생각하자. 카톡을 보내라고 했으니 그냥 보내는 거다.
일단 뭐라고 쓰지? 안녕 수진아 잘 자라고 보낼까.
아니, 이건 아닌 거 같은데. 너무 단순하다.
나는 고작 잘 자라는 인사를 하기 위해 10분이 넘는 시간 동안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선택한 것은 이모티콘이었다.
그래. 이거면 되겠지...
나는 무료로 제공되는이모티콘을 눌러서 카톡을 보냈다.
손을 흔드는 제스처를 취하는 귀여운 생명체.
자, 수진이가 어떤 답장을 보내올까.
...왜 안 오지?
3분 정도 시간이 지났는데 카톡이 오지 않는다.
나는 내가 보낸 이모티콘을 바라보며 초조한 마음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했다.
나는 이젠 인테리어가 되어버린 지포라이터의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초조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우습다. 그녀는 수험생이다.
공부 중에 방해가 될까 봐 무음으로 해놓고 공부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초조하게 카톡의 답장을 기다리는 모습이 꼭 연애를 처음 해보는 10대 소년 같아서 웃음이 나온다.
위잉. 답장이 왔다.
`...무슨 카톡이 이래요?`
뭐가 어때서... 센스있잖아?
바로 1이라는 숫자가 사라졌으니 수진이는 내가 한참 동안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게 됐겠지.
조금 부끄럽다.
하지만 반한 사람이 진 거라는 말도 있으니 그냥 웃으면서 넘겨줬으면 좋겠다.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네. 아무튼 첫 카톡이 저런 거고`
처음으로 보낸 카톡이 문서 파일 업로드였지.
생각해보니 왜 카톡이라는 좋은 수단이 있으면서도 한 번도 보내볼 생각을 못한 걸까?
전화도 있고 카톡도 있는데 나는 그 수단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아닌가.
은연중에 수진이가 부담스러울까 봐 네가 먼저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애초부터 나는 전화를 먼저 하는 타입도 아니고 카톡을 먼저 하는 타입도 아니다.
걸려온 전화는 반갑게 받고 온 카톡에는 바로바로 답장도 해준다.
소식이 없어서 뒤진 줄 알았는데 살아있네? 라며 안부 전화를 걸어오는 친구놈들.
예전에 사랑이냐 우정 이냐를 두고 사랑은 식으면 끝이지만 우정은 몇 년이 지나던 불변이라던 녀석들.
하지만 결국 사랑이 우선이 되어버린 놈들.
아, 이게 아니지. 수진이가 답장을 안 주니 자꾸 딴생각이 든다.
이상하네. 휴대폰을 방치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바로 기독 했다는 표시가 떴을 텐데 왜 이리 응답이 느리지.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다시 내가 보낸 카톡에 1이라는 숫자가 사라졌다.
`지금부터라도 잘하세요.`
나는 곧장 답장을 보냈다.
`고럼 잘할게.`
그냥 보내기엔 너무 단순한 내용 같아 이모티콘을 하나 넣어서 보냈다.
그리고 또다시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답장이보내져 왔다.
`지켜볼 거에요.`
`어, 그래그래.`
도대체 왜냐?
또 1이란 숫자가 사라지지 않는다.
11시 30분.
너는 설마 지금도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일까?
일일연재 9시에 글을 매일 5천 자씩 써서 올린다는 것은 수능을 준비하는 여고생에겐 너무 벅찬 일인지도 모른다.
타자속도도 빠르고 즉석에서 단편도 잘 쓰니 집에 돌아가면 후다닥 글을써서 올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 틀을 맞춰두고 마무리를 짓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의 소설은 요즘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기다려지는 것이다.
첫 번째는 너를 만나러 그 카페로 가는 것.
초조해진다.
팅 탁 팅 탁.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노트북.
노트북에서 나는 소음과 지포라이터가 자아내는 소음만이 가득한 방안.
멍하니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불현듯 뭔가가 떠올랐다.
설마?
나는 아직 1분이 지나도록 답장 없는 수진이의 카톡에 다시 한 번 답장을 보냈다.
`거 있잖아. 난 30줄이고 어쩌구 저쩌구...`
아니, 이건 너무 구차해.
소설이든 카톡이든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하게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38살 김준수 밀당 귀찮음`
이거다. 이 정도면 알아듣겠지..
그런 확신을 하고 카톡을 보내자 이번엔 곧바로 1이라는 숫자가 사라졌다.
`전화해도 돼요?`
나는 잠시 문을 열고 나가 주변을 둘러봤다.
거실의 불은 꺼져있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괜찮겠지. 나는 휴대폰을 들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수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
`선생님, 정말 뒤지는 수가 있어요.`
"엉?"
`경고에요.`
"..."
뭔가... 뭔가 귀엽네. 욕하는 것마저 귀엽게 느껴진다.
어쨌든 귀여워.
`왜 말이 없어요, 여보세요?`
"선생님. 밀당 곤란. 나이 30대."
`푸흣!`
휴대폰 너머로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진짜, 뭐에요 그게?`
"사진,곤란모르나?"
`알아야 해요?`
"아니, 인터넷 밈도 자주 쓰고 그러길래알 줄 알았지."
`뭐, 사실 알아요.`
뭐냐 그런데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거야
`선생님. 뭔가 목소리가 이상해요.`
"뭐가?"
`전화라서 그런가? 좀 낯간지럽네요.`
"..."
`아, 전화로만 하니까 뭔가 좋은 점도 있는데 이런 건 별로네요.`
"뭐가?"
`뭐가 뭐가 뭐가 뭐가 뭐가 별사람이에요? 나참...`
어휴 하면서 한숨을 쉬는 수진이.
나는 또 뭐가라고 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나는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거 같은데."
`예?`
"네가 어떤 표정일지 알 거 같아."
휴대폰 너머로 수진이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지금 내가어떤 표정인데요? 맞춰봐요.`
"맞추면?"
`맞추면 이요? 글쎄요?`
"네가 어떤 표정이냐면ㅡ"
`...`
"ㅡ안알랴쥼."
`...`
"..."
`...`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건 작은 숨소리뿐.
나는 이 침묵이 견디기 힘들어뭐라고 말을 꺼내려고 했다.
뚝 띠리링.
결국,전화가 끊기고 말았다.
나는 한참 동안 휴대폰의 액정을 바라보다가 이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이런 씨발.
안 하던 짓은 하는 게 아닌데갑자기 여자랑 통화한다고 설레서 미친 짓을 해버렸다.
나는 덮고 있던 이불을 발로 걷어차며 침대에서 벌떡일어섰다.
난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건가.
이제 곧 40줄인 녀석이 19살짜리 여고생한테 안알랴쥼이라니 이게 무슨 꼬라진지.
나는 한숨을 쉬며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침대에 앉았다.
수진이가 얼마나 당황했을까.
내가 19살 남고생이고 수진이가 곧 40이 되는 아줌마라고 생각해보자.
40대 아줌마가 안알랴쥼이라는 이야기를 꺼낸다고?
미치고 팔짝 뛰겠네. 생각만 해도 기분이 더러워진다.
위잉.
휴대폰이 울린다.
수진이에게서 카톡이 보내져 왔다.
이모티콘이다.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캐릭터의 이모티콘.
그렇게나 소름이 돋았나? 미안하다. 나도 내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 톡에 답장을 해줄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다 포기하고 이제 그만 자야겠다는 카톡을 보낸 다음 휴대폰에 충전기를 연결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래. 이제 자자.
자고 일어나면 내가 했던 부끄러운 행동도 잊히겠지.
눈을 감고 어떻게든 잠을 자려고 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서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수진이다. 나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진아?"
`...`
"여보세요?"
`...다음부턴 그런 개소리 좀 하지 마세요. 소름 돋으니까.`
무언가 꾹 눌러 참듯이 그리 말해오는 소리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미안.`
아저씨가 미안해. 나름 위트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던 것 같아.
`김부장님,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아셨죠?`
"예. 이대리님. 알겠습니다.`
`후훗`
휴대폰 너머로 수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다행이다. 이 정도로 넘어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나참 어이가 없어서`
"뭐가?"
`잊었어요? 자기 전에 카톡하라 했잖아요?`
"했잖아."
`전화를 걸었었으면 전화로 잘 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음..."
그런 건가?
`아무튼,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너도."
`내 꿈 꾸세요?`
뚝.
나는 멍하니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쳐다봤다.
액정에 표시된 시간은 12시를 가리키고 있다.
평소라면 자야 하는 시간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다.
왠지 가슴이 간질간질한 느낌이다.
눈을 감아도 수진이가 자꾸 떠오른다.
나는 한숨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하아... 이게 요즘 여고생인가.
밀당이니 뭐니 그러길래 그런 좆같은 걸 왜 하나 했는데.
밀당. 존나 좆 같잖아.
이쪽은 좋아 죽겠다고 몇 번이고 표현을 하는데 한쪽은 게임을 하는 것처럼 사람 간을 보니까.
밀당을 해야 연애가 단조롭지 않고 재밌다니 뭐니 하는 개소리를 하는여자들도 있는데 나이를 처먹고 나니그건 진짜 개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남자들 대부분이 자빠뜨려서 따먹고 싶다는 생각을 할 텐데 아직도 20대 시절의 남자들을 생각하며 밀당으로 간을 보는 염병할 여자들.
30대에 들어선 남자들은 밀당에서 발생하는 설렘보다 감정소모에 진이 빠져서 연애를 그만둔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부턴 생각을 달리해야겠다.
밀당도 누가 하는가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좋아하는 여자가 하는 밀당은 가슴에 불을 지피는 느낌이다.
가슴이 너무 빨리 뛰어 아플 지경이다.
이런건... 나에겐 너무 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