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로그(1)
설거지를 한다.
우리는 결혼을 한순간부터 누군가 밥을 하면 누군가 설거지를 하는 암묵적인 룰을 지키며 살아왔다.
나는 그때와무엇하나 달라진 게 없다는 듯이 설거지를 시작했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TV소리와 싱크대의 수전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멍하니 그릇을 씻고 있으려니 불현듯 그날, 비가 오던 날이 떠오른다.
3월의 마지막.
그날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난 수진이를 만나지 못했겠지.
수진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전히 기계, 칼퇴근 강사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너와의 관계도 개선되지 않고 내가 폭발하든 너의 인내심이 먼저 동나든 우리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겠지.
아내는 평소처럼 소파에 앉아있지만, 그 시선은 나의 등을 향한 느낌이 든다.
착각일 수 있으나 나는 그렇게 느꼈다.
이제 와서 나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걸까.
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자신이 나빴다고 자책을 하는 건가.
왜 인제야 후회를 하는 거지. 그럴 필요 없다.
나는 수진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너를 덮치는 일 따위 절대로 없었을 거니까.
내가 너와 몸을 섞는 것에서 사랑을 느낀 건가.
기뻐하지 마라. 모든 것은 너의 착각이다.
설거지가 끝났다. 나는 주방에 걸려있던 수건에 손을 쓱쓱 닦고 앞치마를 벗었다.
아, 그러고 보니 트렁크에 운동기구를 두고 그냥 올라왔다.
"쯧."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그러나 움찔 떨며 나를 바라보는 아내.
"무슨 일이야?"
"아, 짐을 두고 왔네. 잠깐 나갔다 올게."
"...급한 물건이야?"
성가시게 왜 자꾸 말을 거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다. 더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내가 보인 그 작은 돌발행동을 사랑이라 착각하지 마.
"몸이 뻐근해서 운동 좀 하려고 운동기구 좀 샀어."
"운동?"
잠깐 아차 싶은 표정을 짓는 아내.
얼마 전의 불륜현장을 떠올리는 것일까?
죄를 지은 듯 우물쭈물하는 아내.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집 밖으로 나섰다.
지하주차장에 도착에 트렁크의 짐을 꺼내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무게가 상당하다.
5kg 아령이 2개, 문틀 철봉.
예전이었으면 그리 무겁다고 느끼지 않았을 텐데 나도 많이 늙었구나.
그래도 군대에선 지랄 맞은 요즘 말로 헬창인 선임을 만나서 턱걸이 15개는 하던 남자였는데 이리 약해지다니.
그래도 아직 턱걸이 10개 정도는 하지 않을까.
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품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TV를 보고있는듯하지만 내가 지나가자 힐끔거리며 나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눈치채지 못한 척 내방으로 향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 안에서 물건들을 꺼냈다.
아령은 꺼내서 바닥에 내려놓고 철봉을 문틀에 설치한다.
음~ 이건 나사를 조일 필요가 없는 물건인가? 문틀에 상처가 좀 나겠는데 집주인이 지랄은 안 하겠지?
설명서를 보니 설치도 쉬워 보인다.
약 3분 만에 설치가 끝나고 운동할 준비가 끝났다.
나는 혹시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인터넷에 올라온 운동에 관한 자료를 찾아봤다.
음. 그러니까 철봉은 어깨가 다칠지 모르니 충분히 워밍업을 하고... 아, 그렇구나. 스트레칭도 몸을 늘리듯이 근육을 당기는 동작은 인대가 다칠 수도 있구나.
몰랐다.
나는 동적 스트레칭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몸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턱걸이라니 정말 오랜만이다. 지금의 나는 과연 얼마나 할 수 있으려나.
***
뭐, 결론만을 말하자면 턱걸이 1개를 간신히 성공하는 수준이었다.
갈 길이 멀다.
아직 턱걸이는 나에겐 너무 이른 운동이었어.
적당히 맨몸운동을시작해야겠다.
오늘은 상체, 내일은 하체와 복부.
그렇게 루틴을 짜고 일요일 하루는 쉬도록 했다.
맨몸운동이니 헬스만큼 부담되지는 않겠지.
한참 그렇게 부산스럽게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고 나오자 아내는 아직 TV를 보고 있었다.
나는 거실을 지나쳐 내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저기, 있잖아..."
나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아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우물쭈물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 그만뒀다.
"잘 자라고."
그렇게 말한 아내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웃음이 나온다.
설마 같이 자자고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하지만 아직은 시간을 들이자. 조금만 더 천천히... 뭐 이런 생각을했을까?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우니까 그 얼굴이 완전히 무너져서 절망했을 때의 표정을 보고 싶다.
그래야지 내가 느꼈던 비참함을 조금은 느낄 수 있겠지.
방으로 들어갔다.
늘 하던 것처럼 컴퓨터를 켜고 오늘 있었던 일, 지금의 감정, 그러한 것들을 소설로 쓰기 위해 메모장에 정리하기로 했다.
메모장에서 깜빡이는 커서.
며칠 전 귀축강사라는 웹소설에 영향을 받아 써내려갔던 시나리오.
나는그 시나리오를 천천히 읽어봤다.
하지만 읽는 내내 역겨움을 느낄 뿐이었다.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고작 며칠 전의 이야기다. 그때만 해도 아주 훌륭한 글을 쓴 듯한 기분이었는데.
아내의 불륜남과 그 직장에 불륜 사진을 뿌려버린다고? 그 불륜남의 아이들은 무슨 죄인가? 당사자들이 지랄 맞은 건데.
나는 내가 쓴 시나리오를 그냥 지워버리려다 그건 좀 아까운 생각이 들어 그냥 남겨두기로 하였다.
멍하니 반짝이는 커서를 보고 있으니 더는 어떻게 진행해야 될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지포라이터를 손에 들었다.
팅 탁 팅 탁.
활활 타오르던 증오가 조금씩 녹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머릿속으로 이년이나 개년으로 부르던 `그 여자`를 어느새 아내라고 부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정말 등신 머저리 새끼다.
호의를 표하는 상대에게 쓴소리도 못 하는 남자.
그날. 술을 먹고 지랄했던 그 날처럼 이제 와서 한 번 잤다고 사귄다는 착각에 빠진 어리숙한 여자처럼 굴지 말라고. 내 좆 말고 다른 새끼 좆을 빨았던 그 입으로 사랑을 속삭이지 말라고!
그렇게 쓴소리를 하면 좋을 텐데. 나는 그 감정을 지난밤 토해내 버린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깜빡이는 커서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글이 써지지 않을 것 같다.
이럴 때는 수진이가 쓴 소설을 보며 머리를 환기해야지.
하... 생각해보니 수진이와 헤어졌을 때 좀 그런 분위기여서 그 감정이 소설에 녹아있을 생각을 하니 읽기가 두려워지는 기분이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훔쳐보고 싶다는 엄한 마음과 역으로 보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에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
주인공에게 너도 빙의자냐며 개새끼를 찾으며 덤벼드는 작가.
작가는 가호를 얻었음에도 주인공에게 쉽사리 제압당한다.
얼굴을 땅에 처박고 비참한 표정이 되어서는 나는 용사인데 도대체 왜 이런 거냐고 절규하는 작가.
그리 절규하던 작가는 멀리 떨어져서 자신과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던 성녀를 발견한다.
성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애원하는 작가.
네가 나와 함께 가지 않으면 세상이 멸망한다.
그렇게 되어있단 말이다.
이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져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이세상은 소설이다! 허구다! 그리 말하며 소리 지르는 작가.
왜 다른 남자의 곁에 있으냐, 넌 용사의 히로인인데! 내게 돌아와 이 걸레년아! 그리 말하며 소리 지르는 작가.
추악하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을까?
주인공은 작가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려고 했으나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성녀의 표정을 보곤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놀란 표정으로그리고 매우 애틋한 무언가 알 수 없고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본 순간 가슴이 아파졌다.
ㅡ용...사님?
용사라니...지금의 그녀는 작가가 용사인지 모를 텐데?
작가가본인을 용사라고 불렀으니 용사라고 부른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성녀가 짓고 있는 표정의 의미를 모르겠다.
성녀는 흔들리고 있었다.
주인공이 모든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회귀를 했듯이 그녀도 갑자기 머릿속으로 스며들어오는 기억과 감정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용사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다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성녀.
그 순간 승리감에 도취한 눈으로 성녀를 바라보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작가.
ㅡ결국! 히로인은 주인공의 편이지.
ㅡ봤냐! 이 쓰레기 새끼야!
으하하하! 큰소리로 웃기 시작하는 작가.
주인공은 결국 작가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정도로 구르고 굴러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몹쓸 인간.
이런 쓰레기가 마왕과 싸워 세상을 구한다? 살아있는 우리를 그저 이야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로 생각하는 병신이?
나는 그런 녀석에게 내 여자를 빼앗겨? 질척한 마음이 흘러넘친다.
무언가 말을 내뱉으려는 그 순간 용사의 뺨을 세게 한대 올려치는 성녀.
짝!
놀라서 뺨을 잡고 성녀를 바라보는 작가.
성녀는 반대쪽 뺨도 짝, 또 짝, 짝 짝 짝 짝!
계속해서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세게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짝하고 뺨을 후려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뺨을 맞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자신을 바라보는 작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ㅡ내가 사랑한 사람은 당신처럼 나에게 추악한 감정을 가지게 한 사람이아니에요.
ㅡ남을 위해 항상 노력하고 아파하고 오늘보다 내일 더 착실해지려고 했던 사람.
ㅡ항상 자신의 분명한 이상과 고집이 있던 사람.
ㅡ당신은 누구신가요?
그렇게 말하며 휙하고 떠나버리는 성녀.
주인공은 잠시 작가를 바라보다가 떠나버린 성녀를 따라나섰다.
뺨을 맞아 정신이 나간 건 작가였지만 꼭 그 뺨을 자신이 맞은 듯한 감각
왜 나는 이렇게도 가슴이 쓰라릴까.
그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
그가 만든 이 세상이 소설이든 이 세상을 중심으로 소설이 만들어진 것이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왜 그에게 집착했을까?
그는 평생 싸움이나 전쟁이라는 것과는 무관한 세상에서 살아온 인간이다.
그런 그를 어떻게 해서세상을 구한다는 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변화해야 하는 건 그가 아닌 나다.
신의 힘은 대가가 필요했다.내 인생 전부를 파멸로 몰아넣는 대가.
하지만 그 힘이 있어도 세상을 구하진 못했다.
그렇다면 이젠 다른 방법을 찾아볼 때다.
용사의 힘에... 기적에 기대는 것은 잘못됐다.
주인공은 다시 한 번 엎어져 있는 용사를 바라본 다음 성녀가 떠나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힐끔.
자신을 빤히 쳐다보면서 왜 안 오느냐고 독촉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오는 성녀.
주인공은 후련해진 감각으로 성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음 뭐랄까 좀... 그렇다.
그 문자 한 통이 그렇게 기분이 나빴었구나.
과거의 악연... 그래 그런 거군.
이제 그들은 평범한 용사물처럼 역경을 겪게 될 것이다.
주인공은 이미 용사로서 싸워온 경험이 있다.
그 경험을 통해 빠르게 성장할 테고 기연도 쉽게 얻게 되겠지만 대신 그에겐 1회차에 함께하던 신의 가호가 없다.
어쩌면 그들에게 다가올 미래는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런데도 나아가는 그들로 마무리되는 이야기.
약간 불안감을 남기고 이야기가 끊어졌지만 나는 알고 있다.
네가 썼던 모든 이야기의 완결은 해피엔딩이라는 것을.
그럼 너도 나와의 이야기에 해피엔딩을 바라고 있는 걸까.
해피엔딩을 바라고 있는거겠지...?
나는 수진이가 쓴 소설을 읽으며 그리 물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