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모래성(1)
목이 칼칼하고 머리가 울린다.
머리를 흔들어 의식을 깨우고 내 몸을 살펴봤다.
몸이 식은땀으로 끈적하다.
전신의 땀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술 냄새.
목은 칼칼하고 머리가 울리며 몸이 나른한데도 의식만은 또렷했다.
나는 깔깔한 목을 쓰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래... 어젯밤 술기운에 아내를 범했다.
요즘은 부부 사이에서도 강간이 성립한다고 하는 데 큰일이다.
내가 불륜증거를 잡은 이상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인데도 이건 문제가 될만한 소지가 충분하다.
머리가 아프다.
나는 어제 냉장고에서 꺼내온 보리차가 침대 옆 테이블에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벌컥벌컥 물을마셨다.
칼칼하던 목은 모래가 비를 흡수하듯 미친 듯이 물을 빨아들였다.
물을 마셔 갈증을 해소하니 끈적이고 지독한 냄새가 나는 몸이 신경 쓰였다.
방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아하니 평소보다 30분 일찍 일어난 듯했다.
이 정도면 샤워할 여유는충분하겠지.
그런데 이 여잔 어딜간 거지.
나 보기가 역겨워 먼저 가셨나. 진달래꽃... 아,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수진이에게 선물할 생각으로 샀던 장미를 집으로 들고 올라온 기억이 있는데 그 장미를 어떻게 했더라.
장미를 들고 집까지 올라와서 아내를 덮친 것 까진 기억이 나는데...
"허."
내 왼손을 내려다보자 약지에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난 그 정신상태에서도 왼손에 반지를 끼고 집에 들어온 건가.
습관이란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김유신의 말이 목이 잘린 이유를 알 거 같다.
아니, 김유신인지 지랄인지 보단 일단 샤워다.
거실에선 한창 TV에서 아침 날씨에 관해 설명해주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샤워하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간다.
체온보다 약간 높은 온도의 물이 불쾌한 기분들을 씻어낸다.
그러면서 생각에 잠긴다.
나는 강사다.
교사, 교수, 강사.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직업들.
이 직업들은 법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다른 업종보다 조금 높은 도덕성을 강요받는다.
성직자의 기분으로 교육에 임해야 한단 말이다.
그런 존재들이다.
나는 그런 존재인가?
술에 젖어있었다고 하지만 술에 취했다고 범죄를 용서해주면 그건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어제의 나는 정말 내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넓은 초원에서 미친 듯이 소리치고 지랄발광을 하며 모든 것을 토해낸 듯한 쾌감.
집에 있으면 항상 불쾌하고 짜증이 올라왔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
샤워한 다음 물기를 닦고 방으로 들어가 옷을 챙겨입는다.
조금은 붉게 충혈된 눈. 그것 외엔 딱히 달라진 건 없다.
하지만 오늘부터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담배부터 끊고 운동도 해야지.
매일매일 한층 더 아름다워질 너를 만나기 위해 나도 한층 멋진 남자가 되고 싶다.
출근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오전에는 검정고시 준비용 수업이 있다.
나는 항상 강의실에 아침 일찍 출근한다.
강의준비실에서 어떻게 강의를 진행할지 머릿속으로 미리 준비해둬야 머릿속에서 맴도는 이야기들을 문장으로 녹여내 수강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침 일찍 출근한다고 해서 아침을 거르지도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의 습관으로 아침을 꼭 챙겨 먹어야 하루가 편안했으니까.
하지만 아내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이 귀찮은 습관은 점차 간편한 것으로 바뀌었다.
요 2년 동안 아침엔 바나나와 채소를 갈아서 요거트와 섞은 음료를 마시거나 시리얼과 우유를 말아서 먹고 나간다.
그러니 오늘도 그러려고 했다.
"일어났어?"
나는 이 광경을 보고 뭐라고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잠시 당황했다.
앞치마를 한 아내가 부엌에 서 있었다.
식탁에는 대충 햇반을 그릇으로 옮긴듯한 밥과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바로 식사가 가능하게 나오는 XX고 육개장
어머니가 왜 볼 때마다 핼쑥해지느냐며 싸주신 김치와 몇 가지 마른반찬이 식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뭐해? 앉아."
"어? 어어."
아내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밥을 먹기시작했다.
수저로 국을 한 숟가락 떠먹고 밥을 먹고 반찬을 집어 먹는다.
좋구나. 레토르트 식품이라도 역시 국과 밥은 좋다.
역시 나는 한국 남자구나 싶다. 국이 없으면 밥이 잘 넘어가지 않으니까.
"후훗, 변함이 없네. 당신은..."
뭐가 우스운지 작게 웃기 시작하는 아내.
그래 나는 항상 이렇다.
밥을 먹기 전엔 항상 국을 한입, 이후엔 밥을 한입, 그리고 반찬을 한 젓가락.
꼭 로테이션을 돌리듯 식사를 한다.
나는 무엇하나 변하지 않았다.
내가 먹는 모습을 곁눈질하며 젓가락을 드는 아내.
"뭔가 굉장히 오랜만인 거 같아."
그렇게 말하며 눈은 눈앞의 반찬으로 향한다.
그래 뭔가 굉장히 오랜만이지.
나는이래 봬도 너를 만나기 전 32살까지 서울에서 자취하던 남자다.
어느 정도 요리도 할 줄 알고 집안일도 할 줄 알지.
너와 결혼하고도 한동안 같이 집안일을 했다.
서로가 번갈아가며 밥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고 그랬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게."
나는 무뚝뚝하게 밥을 계속 먹었다. 평소처럼 빠르게, 얼른 이 시간이 끝나길 빌면서.
"천천히 먹어."
천천히 먹을 수 있겠냐? 도대체 왜 그러는데?
내 마음속의 의문은 머리를 맴돌 뿐이고 아내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내도 내가 밥을 굉장히 빨리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내는 나의 가정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바쁘게 살아오느라 허겁지겁 먹는 게 일상이던 젊은 시절.
군대에서 먹던 습관이 그대로 사회에 나와서도 남아있던 나.
내가 가장 많이 해먹던 요리는 대충 섞어서 입에 털어 넣을 수 있는 비빔밥이었다.
국이 없으면 어머니가 주신 동치미국을 국 대신 먹었다.
그렇게 살아왔던 남자였다.
결혼을 해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던 남자.
데이트 때는 의식해서 천천히 먹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결혼해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대로돌아가 버린 남자. 그게 나다.
나는 그때로부터 무엇하나 변하지 않았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어른인 척하지만 자아실현이라는 인간의 본연적인 욕구, 소년의 치기를 가지고 있는 남자.
예의를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탈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일탈에서 쾌락을 느끼고 마는 소시민.
내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냐. 그래서 우리 관계를 원래대로 돌리고 싶은 거냐?
이제 와서? 무슨 낯으로?
나는 너의 낯짝이 궁금해졌다.
우물우물 밥을 먹던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부끄러운 듯이 시선을 바로 피하는 아내.
오늘의 아내는 꼭 나와 처음 관계를 가졌던 그 날의 아내를 연상시켰다.
총각 딱지를 졸업시켜주던 아내.
처음 맺는 관계에 어어어어 하며 얼을 타던 나를 타이르지도 재촉하지도 않고 진정하라고 해주던 1살 연하지만 연상으로 보이던 아내.
본질적인 무언가가 바뀐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아주 조금의 어긋남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든다.
약 1도 정도의 어긋남.
그것은 언제든지 수정을 하고자 하면 수정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차일피일 미루던 우리는 어느새 2년이란 시간을 소비해버렸다.
그 2년간 우리가 걸어온 길은 치명적이었다.
너는 인제야 왔던 길을 되돌아가 나를 뒤쫓으려고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어젯밤, 너의 미안이라는 중얼거림은 아마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하는 그녀.
점점 늙어가고 의지할 곳을 잃어버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한 너.
지금 생각해보니 너의 외도는 나의 관심을 끌기 위함이었던 거 같다.
나를 봐라.
나를 봐라.
나를 봐!
나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계속해서 선을 넘어오던 아내.
그렇게 호소하던 아내와 내가 어제 작은 사고로 부딪혔다.
나는 아내에게 가장 손쉽고 원초적인 행동으로 답했고 아내는 그것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아직은 되돌릴 수 있다.
그러니 미안이다.
지금까지 잘못했어. 이제 이런 잘못은 그만둘게라는 의미의 행동.
하지만 사과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나는 수진이를 볼 때마다 정욕을 품을 것이고 그러면 38년간 살아온 인간성과 도덕성, 사회성이 나에게 정지 정지!하며 멈춰 세울 것이다.
그러면 나는 매우 쉬운 도피처로 어제와 같이 너를 범하겠지.
섹스파트너.
나는 너에게 거짓된 사랑을 고백하겠지.
결혼한 이후부터 변함없던 남자가 잠깐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역시 똑같은 남자였다는 것을 알게 된 너는 안심할지도 모른다.
나를 열심히 따라잡으려고 뛰어오는 아내.
하지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네가 따라잡아서 끌어안을 그 남자는 허물만 남은 빈껍데기라는 것을.
김준수란 이름의 알맹이는 정상적인길에서 이탈해버렸다.
나는 수진이를 사랑하고 있다.
나는 요령 있는 남자가 아니다. 두 사람을 사랑할 정도로 품이 넓지도 않다.
***
오늘은 오랜만에 흡연장에 왔다.
아침의 선선한 기운과 햇살.
나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뽑아서 자리에 앉았다.
"오! 준수 강사님 오랜만이네요."
"...그제 봤지 않나요?"
"여기서 말입니다, 여기서."
강인한 강사.
그는 아침부터 힘세고 강인한 강사다.
발로 툭툭 흡연실의 바닥을 두드리는 강인한 강사.
그는 손을 싹싹 비비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똥 마려운 개새끼마냥 뭡니까?"
"예? 아니, 선생님이 욕을 하다니!"
"조큽니다, 조크."
"안 웃기면 조크가 아닌데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는 인한 강사.
나는 조금씩 내면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내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친구가 아닌 사람에게 욕설을 내뱉는 건 아내에게 내뱉은 폭언 이후론 처음의 일이다.
"뭐, 아무튼 별건 아니고... 담배 하나만 주시면 안 될까요?"
"예?"
"낙타요 낙타... 한 대만..."
"전자담배는 어디 갔습니까?"
"그게... 그 운동할 때 치팅 데이란 게 있는데 아십니까?"
그렇게 운을 떼는 강인한 강사.
오늘의 그는 나약한 강사로 보였다.
간신배같이 뭔가 말하려다가 마는 느낌.
"먹고 싶은 거 많이 먹는 날이죠."
"예! 저도 올해 담배 끊어야 하는데 치팅 데이 정도는 있어도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담배를 달라고 손을 내미는 강인한 강사.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애 아빠가 그래도 돼요?"
"집에서는 안 펴요!"
그래요? 거짓말인 거 같은데...
나는 주머니에서 낙타를 꺼냈다.
담뱃갑에서 하나를 꺼내그에게 건네주려다가 잠시 멈추고는 낙타를 잠시간 바라본다.
10년도 넘게 함께하던 녀석.
나는... 녀석을 인한 강사의 손에 올려놓았다.
"예? 이게 뭐예요."
"강인한 강사님은 천천히 하세요."
"그게 무슨ㅡ."
"저는 오늘부터 하렵니다. 금연."
그렇게 말하고 후릅 하며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달달한 아침, 300원의 행복.
말도 안되는 것을 본 것처럼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강인한 강사.
그렇게 놀라시면 곤란하다.
나는 이제 막 시작한 남자다. 아직보여줄게 더 많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