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화 〉데이트 해주세요(2) (13/301)



〈 13화 〉데이트 해주세요(2)

5월 5일.

오늘은 데이트가 있는 날이다.

데이트는 정말 오랜만이다.

결혼한 아내, 그년과의 맞선이 첫 데이트였지.

그땐 어땠지... 그땐 맞선이라 양복을 입었던 것 같다.

첫 만남이 나쁘진 않아서 에프터 신청이 들어왔고 이후에  번 데이트를했었지.

3번짼가 4번째 데이트쯤에 내가 옷 입는 센스가 별로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웃으면서 남중, 남고, 공대 나왔느냐고 묻던 그년.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몸은 공학을 다녔는데 마음은 공대를 다녔던  같다고 웃어넘겼다.

그년은 내 농담에 배를 잡고 아하하하 거리며 웃었다.

나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지.

그 나이가 되도록 먹고 사는데 급급해서 단벌신사였던 나에게 패션이란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 이후 나의 옷은 지금까지 쭈욱 모나미다. 무난한 색상 무난한 맞춤.

튀는 색상의 옷 따위는 없다.

 다려진 셔츠, 적당히 비싼 양복이 수벌.

그게 내 옷장의 전부다.

그러니 오랜만의 데이트라고 발돋움을 하려 해도 양복 밖에 입을 옷이 없는 남자다.

그래도 외출용으로 사둔 캐주얼한 양복은 있으니 다행이지.

이거면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내 나이를 생각하면 데이트에 양복을 입고 가는 것도 그리 우스운 광경은 아니겠지.

거울을 들여다본다.

수염도 코털도 눈썹도 머리카락도 가지런하고 단정하다.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본다.

솔직히 내 몸에서 나는 냄새가 어떤지는 모르겠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한데...  담배를 피니까 모르긴 몰라도 담배 냄새가 배어 있겠지.

담배냄새를 지우기 위해 평소에 애용하는 향수로 손을 뻗다가 주춤한다.

조금 아재 냄새가 나는 향수.

줄곧 써오던 그 향수를 몸에 뿌리는순간 나는 평소와 같은 김준수가 되겠지.

그건, 조금 싫었다.

데이트다.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날이다.

이런 날에 평소와 같은 나를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평소에는  뿌리지 않는 향수로 손을 뻗었다.

내가 쓰는 향수가 목욕탕 스킨로션 같은 냄새가 난다고 좀 캐주얼한 향수를 쓰라며 그년이 사다  유니섹스 향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라온다.

나는 지금 일종의 불륜을 저지르러 갈 예정이다.

불륜이다 불륜. 불륜을 저지르러 가면서 아내가 사다  향수를 뿌리고 갈 생각을 하다니 나도 정말 미친 새끼지.

쯧. 이런 부분에도 조금 신경을 쓸걸 그랬다.

어차피 수진이는 모를 테니까 괜찮겠지.

향수를 뿌리고 몸에서 나는 향기를 맡아본다. 나쁘지 않다.

아내가 나쁜거지 향수가 나쁘진 않으니까.

조금 향긋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향기.

향수의 향기를 맡고 있으려니 오늘 있을 데이트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문을 나섰다.

"어? 약속?"

"어. 좀 늦게 들어올 수도 있어."

"그래."

그렇게잠깐 방문 밖에서 마주친 이년.

킁킁. 내가 지나치는 순간 무심결에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맡는 아내.

지 멋대로 냄새를 맡더니 지 멋대로 얼굴을 찡그린다.

그래. 너도네가 하고 싶은 데로 살고 있는데 나라고 못할 것 같냐?

30대 후반에 접어들어 추하게 늙어가기 시작한 몸뚱이로 40이넘어 마른 고목 같은 남자에게 몸을 허락할 때 나는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을 만나러 간다.

내가 없는 동안 그놈이라도 불러서 썩은 고름같은 좆물이라도 빨아라.

나는 간다.

철컥 쿵 삐리릭 위잉.

가만히 서 있는 그녀를 등지고 나는 문밖으로 나섰다.

***

학원 근처의 커피숍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도로가.

현재 시각은 9시 45분.

수진이는 약속 시간 15분 전임에도 벌써 도착해 있었다.

나는 여성들이 꾸미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알고 있다.

그러니 내심 평소처럼 약속 시각 15분 전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도착해서 30분은 기다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던 걸까. 나는 수진이의 근처에 차를 세우고 빵하고 작게 크락션을 울린다.

움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놀랐는지 몸을 움츠렸던 수진이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나를 발견하곤 얼굴에 꽃을 피웠다.

그녀가 걸어온다.

나는 멍청이처럼 입을 벌리곤 그 장면을 바라본다.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타이트한 검정치마와 다리를 감산 커피색 스타킹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이보리색에 가까운 외투와 안에 입은 니트 같은 재질의 두꺼운 회색 면티.

조금 비싸 보이는 핸드백.

그녀도 나와 같은 무채색에 가까운 복장이었다.

조금 차분한 느낌이 나는 그녀로선 발돋움을 한 것 같은 어른스러운 복장.

"선생님,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아 고개를 내리며 그렇게 인사하는 그녀

그녀의 얼굴엔 아주 약간 화장기가 있었다.

평소보다 정돈된 얼굴, 입술에도 뭔가를 발랐는지 평소보다 촉촉하고 반짝이며 탄력적으로 보인다.

그녀의 입술에 시선이 머문다. 달콤하고 촉촉할  같은 느낌.

앵두 같고 사과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론 자두 같은 그 입술을 살짝 물어보고 싶다.

"선생님?"

"어? 어어. 오늘 사복 입은 모습은 처음   같은데 정말 잘 어울려."

"흐흥, 그래요?“

나는 수진이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곤 천천히 차를 몰았다.

수진이는 즐겁다는 듯이 콧노래를 부르다가 휴대폰을 꺼내 노래를 틀었다.

몇 년 전에 썸이란 게 유행했을  나온 노래.

 거 인 듯  거 아닌  거 같은 너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정말 무친 쵸이스다.

지금의 내 마음이 딱 그런 느낌인데 말이야.

운전 중에 딴 짓은 위험하니 전방으로만 시선을 향하고 있어 수진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히죽.

머릿속에 떠올라 오는 것은 장난에 성공한 꼬맹이가 지어보이는 짓궂은 표정.

우리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간접적으로 물어보는 너.

도망치던 나를 붙잡은 너.

사실 의문이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일일까?

사랑에 빠지는데 이유 따윈 없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다.

그 순간의 감정이 중요한 법이라고들 하지.

하지만 정말일까? 이 사람에게서 좋은 향이 난다. 매너가 좋다. 인상이 좋다. 또는 외견이 취향이다.

그런 종합적인 것들이 자신의 커트라인을 넘어 그냥 불편하지 않고 나를 좋다고 해주니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현실의 사랑에서도 개연성을 찾고 있다.

어쩌면 직업병인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유부남이고 38살이다.

재벌 2세나 3세도 아니고억대 연봉을 받는 남자도 아니다.

내세울 것도 없는 나 같은 남자에게 돈도 잘 벌고 외모도 예쁜 여고생이 사랑에 빠지다니 뭔가 비현실적이잖아.

어쩌면 수진이가 틀어놓은 노래처럼 우리는아직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을 뿐 특별한 관계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자신의 특별한 날에 나를 초대해준 이 행위 자체가 적잖은 호감과 관심의 표시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소심해진다.

아직 그녀의 입에서 날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진 않았다.

나는 그저 그녀가 나를 붙잡은 행위를 사랑이라는 멋진 착각으로 포장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니  데이트로 확인해보려 한다.

네가 나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나랑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과 호기심을 느끼고 있을 뿐인지.

두렵다. 더는 뭘 공부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은 시험 전날 밤의 감각.

초조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진이 앞에서만은 당당하게 행동하고자 했는데 왜 이렇게 초조한지 모르겠다.

나는 이게 첫 번째 데이트는 아니다.

하지만 첫 번째 데이트를 하러 나가는 어리숙한 남자와 무엇 하나 다르지 않았다.

***

부천에 도착했다.

"뭐 먹을래?"

데이트의 상식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젠틀함이다.

일식이든 중식이든 양식이든 한식이든 그럴싸하고 인기 있으며 주말에도 정상 영업을 하는 가게를 알아뒀다.

어떤음식을 먹겠다고 말해도 대응할  있다.

어디든지 말만 해라.

수진이의 입에서는 으음~ 하는 소리만이 흘러나올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다 이런 말을 한다. 아무거나?

"아무거나?"

훗. 그럴 줄 알았지.

쓴웃음이 나온다.

몇 살을 먹든 여자들은 다 비슷하다.

너 또한 여자라는 것이 실감이 나는 순간.

나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느낀 수진이는 약간 뚱한 반응을 보이며 주변을 둘러본다.

"저긴 어때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뻗는 수진이. 그 앞엔 분식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가 있었다.

김천.

"수진아?"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녀를 돌아본다.

첫 데이트에 분식이나 먹자는 여자는 처음 본다.

나는 여자랑 분식집을 가본 적이 없다. 애초에 데이트에 분식집이 말인가?

그녀는 나를 한번 올려다보더니싱긋 웃었다.

"가요. 김천."

나를 내버려두고 김천으로 걷기 시작하는 수진이.

나는 허둥지둥 수진이에게 따라붙었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두명이요."

"편한 곳에 앉아주세요."

"네."

처음부터 끝까지 너를 즐겁게  플랜을 짜왔다.

부모에게 장난감을 받아 신이  아이보다 더 신이 나서 데이트 코스를 여기저기 알아보고  번이고 확인 작업도 했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시작부터 너에게 휘둘리는 내가 너무나 우습다.

"왜 많고 많은 것 중에 하필이면 분식집이야?"

"선생님, 솔직히 말해봐요."

수진이는 그리 말한 다음식탁 위에 올려놓은 손을 바라보다가 다시 날 쳐다본다.

입가에는 웃음이 떠올라 있지만 아무리 봐도 짓궂은 표정이다.

"분식집에데이트하러  거 처음이죠?"

움찔.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간다.

"맞나보네... 혹시 아내분이 첫 데이트 상대?"

여기서 갑자기 아내가나오니 뭐라고 말을해야할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입을 열어서 뭔가 말을 하려고 하면 목소리가 엇나갈  같아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나를 보며 가볍게 웃은 수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두  가져왔다.

이런. 이것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완전 엉망진창으로 말려들어가고 있다.

괜찮아. 데이트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니까.

나는 그리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물을 마신 다음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서로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며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말을 꺼내야할지 떠오르지 않아 묵묵히 물을 마시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오른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자신의 우측 입 부분을 가린다.

비밀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옆에서 보면 입 모양이 보이지 않게 가린채 작게 눈웃음을 짓는 수진이.

"선생님의 처음. 받아버렸네요? 히히."

나는 그 순간 얼굴에열이 올라 고개를 수그리고 말았다.

수진이가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여  컵을 내려놓았었는데 만약 물을 마시는 중이었다면 큰일이 날 뻔했다.

흐흥~ 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는 수진이.

끝났다.

그녀를 리드하는 건 나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수진이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누나로 보였다.

분명 처음하는 데이트라고 했는데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수진이.

누가 연하고 누가 연상인지 모르겠다.

남성향 소설을 쓰기 때문일까. 그냥 눈치가 빠른 걸까.

밥을 먹는 동안에도  먹을 때까지도 시종 기분이 좋아 보이는 수진이.

남자를 두근거리게 하는 요망한 여자.

오늘의 수진이는 단순한 학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

참치 김밥 2줄, 모둠 떡볶이 1개, 우동 1개.

거의 2만원 돈이 나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지갑을 꺼내 카드를 건네준다.

계산을 끝내고 가게 밖으로 나오자 수진이가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나에게 만원짜리 지폐를 건네왔다.

"여기요."

나는 그걸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바라봤다.

1만원. 적진 않지만 요즘 물가엔 한  식사 비용 밖에 되지 않는 돈.

"됐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수진이에게 다시 넣으라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자 나의 손위에 직접 돈을 올려놓는 수진이.

"요즘 애들은 데이트 할 때 더치페이가 기본이에요."

그렇게 말하곤 나의 손을 오므려 돈을 움켜지게 했다.

고마운 배려다.

수진이를 학생이 아닌 한명의 여성으로 생각하며 데이트를 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사회인과 학생으로 우리 사이에 선을 그은 나에게 손을 뻗어준 거니까.

 자그마한 행동에 더욱 빠져들고 만다.

"그래?"

나는 지갑을 꺼내 돈을 집어넣었다.

평소 돈을 넣던 공간이 아닌 2달러 지폐가 덩그러니 들어있는 공간.

고향 친구 준석이가 해외여행을 다녀오곤 2달러가 행운의 상징이라고 동창회에 나왔던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돈이 있던 공간.

2달러가 자기주장을 하던 그 휑한 공간에 네가 준 1만원짜리 지폐를 꽂아 넣었다.

 돈은 단순한 만원이 아니다.

지갑을 바꿔도 돈이 궁해도 절대 쓰지 않을 보물이다.

한동안  지갑에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이 2달러 지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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