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데이트 해주세요(1)
나의 삶, 내 작품의 영감.
지금은 오직 그녀, 수진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언제든지 치울 수 있다고 생각해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진한 얼룩이 되어 바닥에 달라붙은 먼지.
내 삶에서 그년은 어느새 그런 존재였다.
애써 잊으려고 해도 그곳을 밟고 지나가면 끈적하며 질척한 소리를 내고 내 발에 달라붙어 오는 존재.
처음엔 자신의 외도를 들키지 않게 조심하더니 점점 대범해지며 이젠 집으로도 남자를 초대해서 우리들의 그나마 괜찮았던 4년간을 더러운 좆물로 범하는 그년.
내가 너를 안으며 너의 귀에 사랑을 속삭이고 미래를 속삭이고 뜨겁게 달아오른 너의 입에 입 맞추던 그 장소에서 외간남자와 섹스하는 그 감각은 어때? 짜릿한가?
네가 나에겐 얼룩처럼 느껴지듯 너에게도 나는 얼룩 같은 존재인가.
그년의 행동은 자신의 외도를 자랑하고자 하는 느낌이 든다.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 안기는 자신에게서 쾌락을 느끼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지금에서라도 너의 외도에 분노하여 너에게 그날 그때처럼 폭언을 퍼붓길 바라는 걸까?
이젠 너를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할 생각도 없다.
확실한 건 추측만 하던 것들이 현실이 되어 나의 삶을 침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년도 머저리 등신은 아니다.
자신의 외도로 이혼을 하게 되면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불이익 정도는 알 것이다.
나름 대학도 나온 여자고 중소기업 과장도 하고 있는 여자니까.
나는 아내가 나에게 외도를 자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 행동이 이끌어낼 결말은 이혼소송과 위자료뿐이다. 그년의 머릿속에선 위자료보다 나를 엿 먹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일까.
그런 행동에 무슨 가치가 있는 거지. 얻는 것보단 잃는 게 더 클 텐데?
설마 너를 무시하는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걸까. 어느 정도 선을 넘어야 반응하는지 알아보는 행동일까.
술을 먹고 욕을 퍼부은 그날.
나는 살아오면서 너에게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지.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 애비마냥 지방에서 태어나서 그렇게 정치병에 걸린 거냐.
우리 애비새끼는 매일 박정희 찾는데 당신은 그래서 매일 우리 대통령님 찾는 거냐?
그렇게 나는 민감하던 문제를 들쑤셨다.
폭등하는 집값, 젠더갈등, 출산율 등등.
술이 들어가서 혀가 꼬일만도 한데 나는 술을 마셔도 훌륭한 강사였다.
눈이 파르르 떨리며 아무 말도 못하다가 갑자기 눈물을 펑펑 흘리며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는 한동안 얼굴을 마주쳐도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던 너.
사실은 내 잘못이 크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내가 어떤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든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든 그것은 그녀의 자유다.
매일 병신같이 독박육아니 기울어진 운동장이니 하는 프로그램을 재밌다는 듯이 보고 있어도 나한테 티나는 지랄은 안 했으니까.
너도 어느 정도 선을 지키려고 노력은 했겠지.
나는 네가 그런 82년생인지 83년생 인지하는 이상한 책을 읽어도 터치하지 않았다.
나에게 그걸 가지고직접적인 지랄을 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거슬렸다. 틀린 건 틀린 거다.
나는 내가 그리도 싫어하는 애비처럼 헛짓거리를 하는 너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다.
내가 입을 열려 하면 ‘자기는 꼭 그렇게 남을 가르치려 들어~’ 라면서 직업병이라고 툴툴거리던 너.
나는 알게 모르게 너에게 악감정이 쌓이고 있었다.
나의 말은 귓등으로만 듣고 자신이 맞다고 날 가르치려던 애비의 모습과 너의 모습을 겹쳐보고 있었다.
후회하기도 하지만 나는 후련하다.
나는 후련하다.
***
낙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다가 지포라이터의 뚜껑을 열었다가 닫았다만 반복한다.
그년에 대한 내 감정은 지난 2년간 급속도로 찌그러지고 뒤틀렸다.
이것을 소설로 녹여내는 게 가능할까? 힘들 것 같은데.
나는 야설이 주류인 J플랫폼에 들어갔다.
아 이 아이디도 wnstn83인가 큰일인데...
하지만 아이디가 직접 노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닉네임도 시선을 끌지 않게 얌전한 것으로 바꿔야지.
아니, 시발. 이 사이트는 닉네임을 변경하는 것도 돈이 들어? 제 정신이 아니로구나.
쯧.
아무튼 지금 중요한건 이런 사소한 게 아니지.
지금은 내 머릿속을 범하는 듯한 질척한 감정을 토해내고 싶다.
내 혈액을 타고흐르는 듯한 질척한 감정이 나의 삶을 한순간에 누렇게 뜨게 만든다.
어떻게 써야 할까.
나는 인기있는 몇몇 소설들을 살펴봤다.
귀축강사... 싸이코패스 강사가 학생들을 감금한다는 작가 수필이라는 소설.
그 소설이 눈에 들어온다.
싸이코패스, 감금... 이런 보기만 해도 질척한 단어들이 나의 시선을 이끈다.
나는 수진이의 소설을 봐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내가 소설을 쓰려고 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말았다.
그 정도로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내용이었으니까.
시작부터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한 흡입력, 정말 수필이 아닌가 싶은 묘사력.
글 속에서 느껴지는 광기에 나도 모르게 이입을 하고 말았다.
나는 잡식이다. 웬만한 소설은 다 읽는 편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너무 극단적인 인물이면 감정이입이 힘들어 잘 보지 않는 편이다.
아니, 편이었다.
히로인의 주변을 망가뜨려 자신에게 의존하게 하는 주인공.
이 완벽한 악인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공감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놀랐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런 인물에게도 감정이입이 될 정도로 망가져있던 걸까.
나도 이 주인공과 그리 다르지 않은 인간이다.
아내에게 폭언을 퍼부은 행동을 잘못했다고 반성하고 있으면서도 아내의 불륜에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고 복수를 떠올리고 있으니까.
리얼하고도 질척한 복수.
나는 얼마 전에 손에 넣은 아내의 불륜 증거물을 모아둔 서랍에 열쇠를 꽂아 넣고 사진을 꺼내본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얼굴에 웃음꽃이 핀 상태로 팔짱을 끼고 모텔로 향하는 두 사람.
다행히도 저번에 봤던 그 남자인 듯하다.
최소한 3명 정도의 피해자는 생기겠지만, 그 정도뿐이다.
나는 흥신소에 다시 한 번 연락하여 사진 속의 남자가 누군지, 집 주소와 가족관계, 회사에서의 위치는 어느 정도인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이걸로 2번째의 용건이었는데 무려 2달치에 가까운 월급을 요구하는 업체.
조금 망설였지만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골프나 낚시, 콜렉팅 등 용돈으로 한 달에 수십만원씩 평생을 쓰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니 이 정도 돈에 흔들리지 말자.
그 돈을 내서 이 가슴의 불쾌함을 해소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이득이니까.
어차피 위자료로서 돌아올 돈을 생각하면 푼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너를 보고 싶다. 수진아.
너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너의 또래가 된 듯하다.
너의 별거 아닌 동작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호들갑을 떠는 어리숙한 소년.
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
"어젠 왜 댓글 안 달았어요? 안 봤어요?"
타다다다닥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녀.
그녀의 볼멘소리가 귀를 울린다.
"선생님 나이도 생각 좀 해줘. 피곤하면 일찍 잠들고 그러는 거지."
그렇게 말하곤 어깨를으쓱이며 그녀를 타이른다.
얼마 전까지는 무섭게 보였던 그녀의 감정이 지금은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뭐 그렇다고 치죠."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한입 마시고 멍하니 앉아있는 그녀.
오늘은 평소보다 장고다. 뭔가 소설이 써지지 않는 날일까?
"저 다음 달 생일이에요."
"응?"
"저 데이트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한 번 해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살짝 떨었다.
일생일대의 고백을 한 것처럼 어깨를 파르르 떠는 그녀가 귀엽고 안쓰러워 보였다.
"차가 있으니까."
"네?"
"조금 멀리 가자. 여기서 1시간 반 이상 떨어진 곳으로 가는 거야."
"아, 네!"
그녀와 등을 맞대고 있으니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힘찬 목소리와 아까와 달리 어깨에 힘이 빠진 것을 보면 나쁜 표정은 아니겠지.
아무튼 데이트, 데이트라.
평소보다 더 외형에 신경을 쓰고 간다면 날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녀도 처음하는 데이트에 들떠서 열심히 꾸미고 나오겠지.
그녀의 사복은 본 적이 없다. 항상 교복만 입고 다니니까.
기대된다. 어떤 옷을 입고 나오려나.
치마? 바지? 수진이는 뭘 입든 어울리겠지.
어쩌면 어른인 나에게 맞춰 어른스럽게 꾸민다고 어색한 화장을 하고 올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로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한참 동안 너의 얼굴을 보고 웃어버리겠지.
수진이는 내가 웃는 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며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데이트를 상상하며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기대된다.
데이트. 나도 그렇게 경험이 많지는 않다.
그년과 했던 맞선이 최초의 데이트였고 난 그년 이외의 여자와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다.
나는 그날보단 좀 더 성숙해졌다.
나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으레 수진이의 또래가 보이는 어리숙함을 내비치지 않겠다.
첫 맞선에 당황하여 어버버하며 얼빵한 모습을 보여주던 예전의 내가 아니다.
너는 나를 알고 있다.
내가 겉으로는 열심히 꾸미고 있지만 허점투성이의 어른이란 것을 알고 있다.
네가 쓴 소설 속에서 성녀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너의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겠지.
그래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원래 남자는 몇 살을 먹든 여자 앞에서 가오를 부리고 싶은 존재라는 걸.
***
그녀의 생일은 5월 5일이라고 한다.
때마침 어린이날이라니 나는 그녀에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네? 왜요?’ 라는 그녀.
‘크리스마스와 어린이날에 생일이면 선물을 퉁치잖아’ 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왜인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아하하’ 하며 뭔가 감정이 담기지 않은 웃음을 흘리는 너.
왜 그런 표정을 짓는걸까? 궁금했다.
하지만 아직은 네가 짓던 그 표정의 의미를 알려주진 않겠지.
내가 너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넌 그만큼 나에게서 멀어질 것 같다.
그러니 네가 나에게서 도망치지 않도록 아주 조금씩... 천천히 다가가야지.
너를 좀더 알고 싶다.
케이크나 도넛처럼 단걸 먹을 땐 꼭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소설을 쓰며 반에서 성적도 괜찮게 유지한다는 점.
노래는 즐겨듣는데 소설 쓰는데 방해돼서 클래식처럼 가사가 없는 노래만 듣는다는 것.
내가 너에 대해서 아는 점은 이 정도 뿐이다.
좀 더, 좀 더 너에 대해서 알고 싶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살아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언제인가? 그것은 디테일에 있다.
그저 삶의 목적을 위해 살고 날먹 감성의 기연을 ‘운이 좋군,,,’ 으로 마무리하는 인물들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너무나 평면적이고 따분한 어디선가 본 듯한 인물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군’ 이 사실은 그의 돌아가신 은인이나 부모님의 입버릇이었다면? 은연중에그들을 그리워해서 말버릇이 되어버렸다면 어떤가?
그 녀석은 적어도 과거의 인연에 강한 애착이 있는 녀석이 된다.
많이 먹는 녀석이라고 묘사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지만, 덩치가 산만한 떡대가 좀 많이 먹어도 금방 배가 고파진다고 묘사하면 한 상 가득 차려놓았는데도 테이블 밖으로 삐져나온 그의 커다란 덩치에 음식이 초라해지는 모습이 머리에 그려질 것이다.
이번에 맞이하는 너와의 데이트.
그 데이트를 통해 나는 좀 더 너에 대해 알아가겠지.
너라는 존재가 더욱 뚜렷해지는 시간.
마치 소설 속의 등장인물에게 개성을 부여해주는 것처럼 너는 내 안에서 더 커다랗고 입체적인 인물로 자리를 잡아 갈 것이다.
나는 좀 더 너에게 빠져들어 가겠지. 하지만 그것이 두렵지는 않다.
나는 그 데이트에서 새로운 너의 모습을 찾아내고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
그날의 우리는 한 길을 둘이서 걷는다.
그 모습을 상상해본다.
나는 너보다 보폭이 넓고 빨리 걷는다.
내가 4보를 걸을 때면 너는 종종걸음으로 나보다 바삐 발을 놀려 5보를 걸어야 하겠지.
하지만 그날 하루만큼은 나도 너와 같은 걸음걸이로 걸어보고 싶다.
너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나의 시선이 향하고 너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으로 나의 발걸음이 향하는 모습.
...기대된다.
나는 처음으로 데이트를 나가는 소년처럼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뜀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