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헤밍웨이와 월억킥의 창작활동(1)
우리는 후다닥 그 자리를 뜨기로 했다.
그래봤자 바로 앞에 있는 카페였지만 말이다.
우리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커피를 주문하곤 카운터와 창가에서 먼 안쪽에 자리를잡았다.
사장은 슬쩍 우리를 곁눈질만 할 뿐 이렇다 할 말을 건네오진 않았다.
"그 소설 있잖아요. 제목 미정이라고 해놓으신 거."
"그래. 그게 왜?"
"제목, 뭘로 하실 거에요?"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물어본다.
그녀에겐 그게 러브레터이고 그 제목이 이수진에게 라는 느낌일 것이다.
제목. 제목이라.
글은 술술 써졌는데 이상하게 제목만큼은 이거다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글쎄... 마땅히 떠오르는게 없네."
정말로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다. 그렇게 찡그리지말어.
"제 소설 읽으실 거죠?"
끄덕.
나는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오늘은 그녀에게 완전히 선수를 잡혔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도 아니다 아니다 부정을 했지만, 사실은 이렇게 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정말로 정체가 들키고 싶지 않았다면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연재하는 플랫폼을 바꾸던지 아이디를 새로 파던지 그녀가 소설가가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면 들킬 일이 없었겠지.
은연중에 나는 너를 보고 있어. 너는 어때? 라며 강의실의 교탁과 책상 사이에 다리를 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야?"
"예?"
"눈치챈 거."
"아 그거요. 그 첫날에 장문에 댓글 달았을 때요. 심심해서 갤러리에 놀러 갔는데 누가 하꼬작가라는 댓글을 썼더라고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눌러봤는데 몇몇 소설이 올라와 있긴 하더라고요."
"어...어땠어?"
"..."
그녀는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한입 입에 가져간다.
"아메리카노."
그렇게 말하고는 뭔가 이 정도면 뭔 뜻인지 알겠죠? 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온다.
OK. 알겠다. 더는 묻지 않겠다.
내 소설은 카푸치노처럼 마일드한 소설은 아니었구나... 그렇구나.미안해.
오늘따라 주머니에 들어있는 낙타에 손이 뻗친다.
하지만 아주 잠시간의 시간이라도 그녀와함께 있는 이 공간을 벗어나서 흡연실로 간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래도 이후에 쓴 글은 좋았어요. 제목 미상."
그러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장문의 댓글을 남기고 그런 소설을 남기고 처음엔 우연인가 싶었는데 아이디가 wnstn83 후훗. 바로 눈치채죠."
"그런가?"
"그런 거에요."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녀는 참 웃음이 헤픈 거 같다.
너무 그렇게 자주 웃진 말았으면 좋겠다.
네가 웃을 때마다 가슴이 술렁거려서 미칠 거 같거든.
"미안해."
"뭐가요?"
"그냥. 그냥 미안해. 여러 가지로."
"..."
나는 무엇에 사과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사죄의 말을 입에 담았다.
사랑에 빠지게 해서 미안하다? 미친놈이다.
그나마 이런 아재가 너를 사랑하게 돼서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게 편한 해석이지.
얼마 전까지 부모 앞에서 자랑하는 꼬마처럼 신이나 재잘거리던 게 꿈만 같다.
이제 그녀의 앞에 서면 무슨 말로 시작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연중 하지 말아요. 이번엔."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양손으로 머그컵을 잡고 엄지로 컵의 표면을 쓰다듬는 자신의 손을 향하고 있었다.
"읽고 싶어요. 선생님의 소설."
"그건ㅡ"
내가 뭔가 말을 꺼내려고 하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이 마주친다.
나는 말하려던말이 솜사탕 마냥 입속에서 사르륵 녹아 사라진다.
"제 앞에서 써주세요."
"뭐?"
"저도 쓸게요. 소설. 선생님이랑 같이 쓰면 뭔가 더 좋은 게 나올 거 같은 느낌적인 그런?생각이 들어요."
그녀는 머리를 거치지 않고 감각적으로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는 듯이 뭔가 어색한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거 같다.
"어디서?"
"여기서 쓰면 되잖아요?"
"여기?"
나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이 건물을 둘러본다.
드문드문 손님이 몇명 있다.
학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프랜차이즈가 아닌 카페.
코앞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를 가지 않고 여기까지 오는 사람은 이 가게가 마음에 드는 단골이거나 프랜차이즈가 있는지 모르는 손님이겠지
우리쪽 학생들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불안하다.
혹시 내가 잃어버렸던 청춘이 불끈해서 불의의 사태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태가 되었을 때 그녀의 삶을 책임지겠노라 조금 전에 각오도 다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서서 가시밭길을 걸을 필요는 없다.
이곳에서 나란히 다정하게 웃으면서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학원의 누군가에게 포착되고 소문이 난다?
곤란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구체적으로는 사회적인 의미로.
나는 이 싫증 나는 직업이 없으면 당장 내일 입에 풀칠할 방법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는 위험하다. 그렇다고 다른 곳에서 만난다? 어디에서? 그것조차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내일부터 서로 노트북을 들고오자."
"그래요!"
짐짓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불안감이 있었나 보다.
세상 편해 보이는 웃음을 짓는 그녀에게 나는 오늘도 패배한다.
"대신 같은 테이블에는 앉지 않는 거야."
"예?"
"서로 이렇게 등지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소설을 쓰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나는 그녀의 뒷자리의 테이블의 의자에 앉는다.
그녀와 등을 맞대고 있는 감촉이 느껴진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나의 어깨에서 사르륵 소리를 내며 흘러내린다.
정중히 손질된 비단 같은 머리결
다행이다. 그녀와 등지고 있어서.
지금 잠시 엄한 표정이 되었을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저 이거 드라마에서 봤어요."
후훗하면서 작게 웃는 그녀.
"뭔가 불륜 같네요."
내가 하면 로맨스야.
"내가 하면 로맨스죠?"
흠칫.
오늘의 그녀는 탐정도 되었다가 소설가도 되었다가 학생도 되었다가 초능력자도 되었다.
정말 바쁜 아이다.
"어 그게..."
"알아요. 유부남인 거."
"..."
나는 그년이 있는 앞에서는 결혼반지를 끼지만 학원으로 출발하기 전에 손에서 뺀다.
관계가 소원해진 이후에도 최소한의 관계에 예의를 표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학원에서는반지를 빼놓고 다니니 내가 유부남이란 건 내가 직접 유부남이라고 소개했던 몇몇 강사와 원장, 부원장밖에 모르는 일이다.
난 수업 중에 반지를끼지 않으니까.
"여기요 여기."
그녀는 나에게 고개를 살짝 젖히고 어깨너머로 왼손을 보여주며 약지를 가리킨다.
"여기만 색이 다르거든요. 선생님 손가락."
나는 그제야 나의 왼손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아내와 32살에 만나 결혼하고 2년 전까지 약 4년간 차고 다닌 반지.
나의 손엔 거의 희미해진 원형 자국이 남아있다.
"그렇게 희미해진 거 보니 안 낀 지는 좀 되셨죠?"
확실히 아내 앞에서는 끼고 다니지만, 밖에서는 끼지 않았다.
그걸 눈치채다니...
나는 그제야 그녀가 그저 요망한 여자에서 한 명의 위대한 작가로 보였다.
그래 이런 거다. 시선의 차이.
나와 그녀는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학생으로 학교와 학원에 다니는 그녀의 시간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겠지.
나도 학생으로서 학교와 학원에 다녔던 기억이 있다.
내가 그녀와 그렇게 막 다른 삶을 살았을까?
아니. 소설도 아니고서야 아카데미물 마냥 그녀의 삶이 특별함의 연속일 리는 없다.
그저 하나의 사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것이 나와 그녀를 나누는 것이다.
나에겐 그저 시간의 낭비였던 청춘이란 이름의 얼룩이 그녀에겐 하나의 소재가 되었다는 것.
모든 것에서 영감을 얻는 그녀는 참 특별해 보였다.
엄청난 관찰력과 그것을 잘 버무리는 그녀의 섬세한 필력.
나는 그게 참 좋다.
"어, 이혼하려고"
"예, 정말요?"
"어, 그년 그거 바람을 피우는 중이거든."
"..."
절찬 바람을 피우는 중인 내가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러고보니 그런 말이 떠오른다. 끼리끼리 만난다고.
이제 그년은 본인 같은 남자를 만나 떠나가겠지.
그 남자는 또 그년 같은 남자다. 끼리끼리 잘 어울리다가 또 헤어지겠지.
나는 머릿속으로 바람을 피우는 아내를 욕했다.
그년이 나쁜 거라고 왜 바람을 피웠을까? 왜 집을 사자던 나를 그렇게나 핍박했을까?
왜 나와 맞선을 했을 때 나를 까지않았을까? 그녀를 욕할수록 나는 편해진다.
남앞에서 부모의 거울인 걸 항상 명심하라던 그 뻔하면 뻔한 한마디.
나는 아직도 이 말에 얽매여 있다.
각오를 다진다고 했는데도 그녀가 먼저 잘못을 했으니 나는 나쁘지 않다며 자신을 은근슬쩍 변호한다.
정말로 이렇게 초라한 나 자신이 싫어진다.
***
집에 와서는 뒤에 어떤 내용을 추가로 쓸까를 고민했다.
결국 나와 그녀의 이야기를 녹여낼 뿐이던 소설은 독자인 그녀와 작가인 나의 피드백의 결과물이 될 것이다.
나의 미디엄 레어같은 날것의 감정을 오탈자나 최소한의 퇴고도 없는 글을 그녀는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빨리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그 카페에서 나와 등지고서 혼잣말을 하듯 중얼중얼 걸릴 것이다.
그럼 나도 중얼중얼 그녀의 혼잣말 같은 말에 혼잣말 같은 답변을 하겠지.
카운터에 들리지 않게, 창가에 닿지 않게.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면서도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듯한 자세를 취할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발견할 수 없도록 그렇게 우리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오늘은 정리만 하고 그녀의 소설을 읽도록 하자.
그녀는 나의 소설을 누구보다 빨리 읽고 싶어하는눈치였다.
여기서 쓰는 것보다 직접 앞에서 쓰고 보여주는 것이 그녀에겐 더 특별한 경험이겠지.
그녀의 소설을 읽어본다.
주인공의 과거 회상이 끝난 이후엔 작가에게 밀어닥친 도적 떼들과 우왕좌왕하는 작가의 파티.
원작의 주인공이던 용사는 망설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도적 떼들이 착용한 장비며 무기들이 하나같이 일반 도적 떼들은 가지기 힘든 것들이었으니까.
그들에게선 진한피 냄새가 났다.
이들을 여기서 놓쳐주면 수많은 피해자가 생길 것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도적들을 죽인다.
하지만 작가는 그렇지 못했다.
너무나 리얼한 소설 속 세계는 판타지처럼 싸울 힘을 즉각적으로 제공해주지 않았다.
신과의 계약으로 튼실한 용사의 몸.
괴물을 죽이는 것엔 익숙해질 수 있어도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것엔 두려움을 느끼는 용사가 된 작가.
그는 만족스럽게 싸울 수 없었고 그 싸움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꿈 속에서 목이 잘린 채 자신을 위협하는 도적떼들.
그들은 그가 머릿속으로 생각했던전형적인 허접쓰레기 지면 낭비용 엑스트라다.
한 번에 5천 자에 가까운 글을 쓰려다 보니 머리가 묵직해져 편하게 쓸려고 대충 욱여넣었던 놈들
그냥 몸에서 진한 피 냄새를 풍기는 좋은 장비를 착용한 무뢰배로 1줄로 서술하고 넘어가서 다음 장면에 용사에게 장기자랑을 하는 엑스트라
그는 그저 그 엑스트라조차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죽을 위기에 처할 뻔했다.
잠이 드는 순간 강한 불안감이 엄습하고 식은땀이 흐르고 식욕은 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계속해서 번민하고 또 번민한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왜 내가 이런 곳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어야 할까?
빙의물의 주인공이 된 것에 경악과 불안도 느꼈지만, 어느 의미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야생의 판타지는 그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지옥과도 같았다.
그녀의 밀린 소설을 다 보았다.
결국 그렇게 이리저리 방랑하던 주인공이 삼류 엑스트라와 함께 있는 성녀를 보며 분노를 터뜨리며 달려드는 장면까지
너 이 씹새끼!라고 소리치며 덤벼드는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매우 적절한 절단신공
댓글도 절단수준 실화냐? 빨리 다음! 다음!하며 작가를 찾는 댓글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후후 좋은 기분이다.
그녀가 쓰는 소설이 너희에게 닿기 전에 나는 그 누구보다 그 소설에 먼저 닿을 수 있다.
아 이래서인가? 소설가가 되지 못한 지망생들이 편집자를 하는 이유.
나는 독자고 작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편집자가 된 듯한 느낌도 느껴졌다.
침대에 누웠지만 쉽게 감기지 않는 눈동자.
소풍이 기대돼서 잠이 오지 않는 듯한 그런 감각
내일이 너무나 기대돼서 잠이 오지 않는다.
뒤척뒤척.
하지만 오늘만큼은 잠이 오지 않더라도꼭 자야만 한다.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던 나는 잠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소풍을 떠나던 초등학생의 꿈을 꾸었다.
도시락은 맛있었고 소풍은 너무나 즐거웠다.
잠에서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