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화 〉38살의 프롤로그 (8/301)



〈 8화 〉38살의 프롤로그

9시 정각.

수진이가 쓴 소설이 올라왔다.

나는 차분한 마음으로 수진이가 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주인공이 성녀와 함께하며 여러 대화를 하는데 아주 가끔 어색한 장면이 이어진다.

성녀가 주인공에게 본인의 취향을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주인공은 당연하다는 듯이 성녀가 좋아하는 것들을 선택해주거나 선물해주는 일이 나온다.

한 번도 그 앞에서 내색을 비치지 않았는데? 성녀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의 배려를 기쁘게 받는다.

주인공은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이 죽을 당시를 회상한다.

너무나 강력한 마왕.

용사라지만 촌구석에서 농부로 살다가 농부로 죽을 예정이던 소년.

불에  폐허가 되어버린 고향에서 복수를 다짐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능력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신은 용사에게 고한다. 힘에는 대가가 따른다고.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나의 모든 것을  테니 마왕을 죽이고 복수할 힘을 달라고.

신은 용사에게 고했다. 5년ㅡ 용사가 성인이 되고 23살이 되었을 때 용사의 목숨을 가져가겠노라고.

용사는 강해졌다. 마왕을 죽음 끝까지 몰고 갈 정도로 강해져서 사람들은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최종결전의 순간 동료를 감싸다가 치명적인 저주를 입은 용사는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용사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약속의 시간이다.

저주에 범해져서 몸에서 시체가 썩는듯한 냄새가 나더라도 단 한번 검을 휘두를 힘이 남아있다면 아직 그는 용사다.

지친 몸을 이끌며 마왕성에 도달하려는 그를 막아선 건 그 덕분에 살아난 성녀였다.

그녀는 용사야말로 인류의 구원. 당신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친다며 자신의 목숨과 바꿔 그를 살릴 수 있는 성법을 발휘했다.

그만두라고 소리치는 용사.

성녀는 눈물을 흘리며 썩어가는 몸을 질질 끌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용사에게 고백한다.

수녀였던 어머니가 목숨을 살려준 남자가 어머니를 범해서 낳은 자식.

더럽혀진 여자라고 버림받고 그래도 사랑해서 자신을 키워주신 어머니.

그녀를 위해 성녀는 죽을 만큼 노력했고 어머니는 죽기 전에 성녀를 낳은 어머니가 되었다.

하지만 성녀는 보기 좋은 허물.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리면 결국 누군가에겐 걸림돌이  뿐이다.

정략결혼.

용사가 마왕과 죽음을 맞이하면 결국 그녀에게 남은 것은 그것뿐이다.

그녀는 울면서 고했다.

당신이 아닌 남자에게 범해져서 당신이 아닌 남자에게 아양을 떨고 당신의 아이가아닌 남자의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

도저히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없고 구역질이 난다.

내가 만나게 될 사람이 생각보다 굉장히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용사님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항상 용감했지만, 고향을 떠올리면 눈물을 흘리던 겉만 멀쩡하고 속은 여린 당신이니까.

연애도 해본 적이 없어 손이 살짝 닿은것 만으로도 당황하던 당신이니까.

다른 사람은 성녀라고 추대하며 진정한 날 알아봐 주지 않지만 난 그냥 평범한 소녀라는 걸 알아봐 준 당신이니까.

그런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당신이 없는 삶은 살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한 줌의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의 몸속에 깃들던 모든 저주가 사라진다.

그래 그가 맺었던 신과의계약마저.

결국 계약의 힘을 잃은 그는 마왕을 이기지 못했고 죽어가면서 신을 찾는다.

뭐가 마왕을 쓰러뜨릴 힘인가? 계집애의 기도 한 번에 박살 나는 초라한 힘.

그딴  따윈 필요 없었다! 마왕을, 마왕을 쓰러뜨릴 힘은 어딨냐며 절규하는 용사.

신의 시선이 느껴져 그곳으로 힘겹게 고개를 돌린 용사.

빛이 그를 감싸고 그는 회귀했다.

***

'성녀님 히로인력 실화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포텐터졌다. 감정과잉이니 지랄이니 해도 사랑 고백은 못참지.'

'헤으응 성녀눈나.'

등등 몇몇 부정적인 댓글이 있지만, 대부분은 호평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글에 차마 오늘도 재밌었습니다고 쓸 수 없었다.

성녀의 괴로운 과거.

아버지를 증오하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그녀의 이야기 속엔 나의 인생이 녹아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그녀가 앞으로 용사 대신 만나야  남자.

그는 용사보다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엉망진창은 그를 연민하고 사랑한다는 성녀.

나는이 대사가 그래 그렇게 보였다.

러브레터라고...

***

내가 바란 건 이런  아니었다.

나는 어른이다 어른이다라며 뇌까리곤 있지만, 아직도 과거의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

어린아이처럼 울고 떼를 쓰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어른이니까 사회에 순응한 거라며 자신을 위로하던 겁쟁이.

나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면서도 내일도 살아가기 위해 어제와 같은 오늘을 반복하던 나에게 너와의 만남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누군가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

나의 소설은 나의 감정을 뱉어내는 매개체고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는 행동이었다.

나는 여기에 있다. 나를 봐라. 그렇게 토해내고 있던 것이지.

그래서 구리다고 욕을 처먹을지언정 글을 올리는 행위를 멈추진 않았다.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은 소설조차 아니니까.

거기에  욕심이 섞여 오랜 방황을 하고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독자로서 살기로 마음이 굳어가던 중 너를 만난 거다.

나란 존재에게서 작든 크든 영감을 얻는 너.

나와의 별것 없는 대화를 소설 속에서 녹여내는 너.

나는 그 순간 100만 부의 베스트셀러 작가도 월억킥의 웹소설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만족스러웠다.

고요한 연못에 돌을 하나 던져 작은 파문이 일어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나의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깨달아버렸다.

나는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어버렸다는 것을.

***

비겁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로 나는 1주일간 그녀의 소설을 볼  없었다.

그녀 앞에서 강의하는  순간에도 나는 그저 칠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어른이란 것에 불쾌함을 느끼면서도 어른들이 곧잘 하는 행동을 따라 한다.

나는 그녀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나는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기계, 칼퇴근 나를 정의하는 그 시절의 그때로 돌아가면 된다.

1개월도 되지 않지만 멀게만 느껴지는 그날의 나로 돌아갈 뿐이다.

솔직히 자신은 없다.

그 지루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게 너무나 무섭다.

하지만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하라고?

그건 안된다.

19살이다. 내 고향 친구 중엔 고등학교 때 사고를 쳐서 20살에 애를 낳은 녀석도 있다.

그래 그녀와 나는 최악 부모뻘의 차이가 난단 말이다.

10살차 커플이 도둑놈이라면 19살 차이의 커플은 무엇일까?

그건 범죄자다.

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아니다.

이수진, 내 삶의 빛이요,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이수진

나는 어른이다. 그러니까 도망친다.

사춘기의 청소년들이 으레 그러듯 금방 그녀의 관심은 나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보아라 이 몰골을.

주름지기 시작한 얼굴, 몸에서 은근히 맡아지는 담배에 찌든 냄새.

너희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물이다.

너희들이 꽃이라면  크리쳐가 아닐까.

그러니 그저 원래대로 돌아가기를 그렇게 바랄 뿐이다.

모든 것이 사실은 나의 과대망상이었으면 좋겠다.

그녀는 그냥 소설을 썼을 뿐이고 내가 확대해석을 해버린거지.

그렇다면 나는 정말 쪽팔린 짓을 하고 있는 멍청이다.

차라리 멍청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도망치는 매일이 반복되었다.

***

'오늘 언제 돌아와?'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과 나의 귀가시간을 묻는 개년.

불안했다.

늦게 돌아간다고 답장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면 내가 상상하던 일이 펼쳐질 거 같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이미 수많은 증거가 나왔다.

이미 아내는 내 마음속에서 떠났다.

그러니 나는 아내를 떠올릴 때 그년이나 개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데도 이 미아가 되어버린 듯 방황하는 정신에는 아내의 외도가 결정타가 되어버릴 듯한 느낌이었다.

아내의 외도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

나는 저 전셋집에서 벗어나 멈출  없는 길을 달려가고 말 것 같았다.

터벅터벅.

인간은 정말 습관의 동물이다.

아니 내가 어쩌면 김유신의 말인지도 모른다.

집이 아니면 학원, 학원이 아니면 카페.

서울은 이렇게 넓고 차도 있는데 내가 다니는 길은 언제나 한정되어있다.

그러니 이 만남도 어쩌면 필연이다.

"선생님..."

어느덧 벚꽃이 지고 있다. 이미 봄은 시작되었다.

뭐라 말을 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문다.

무슨 말을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머리가 말을 자아내지 못한다.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할까.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서 도망치려 했다.

"가지마."

나의 옷깃을 강하게 잡고 나를 멈춰 세우는 그녀.

"제가 모를 줄 알았어요?"

나는 지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는순간 무언가가 끝이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진짜 아재에요. N이버로 계정연동으로 아이디를 만들다니..."

그만 그만해!

"아이디가 wnstn83이라니 너무 뻔해서 바로알았다고요?"

"그게 무,무슨 말이야?"

나는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는 범죄자처럼 잔뜩 움츠러들어 너무나 뻔한 등신 같은 말을 내뱉는다.

"매일 똑같은 답변만 달다가 그렇게 긴 댓글을 달면 궁금해지잖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깐 말을 멈췄다.

"소설을 쓰시는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강범수라니 후훗"

그녀는 뭐가그렇게 우스운지 짧게 웃었다.

"선생님의 친구분이시라던 준범이라는 분과 선생님의 이름 준수를 합쳐서  선생님의 이상을 표현한 것 같은 캐릭터."

그녀의 입에서는  범죄자를 앞에 두고 자신의 추리가 맞제? 하면서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 탐정들의 그 자신에 찬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제가 20살 여대생이라는 선생님의 마지막 양심이었나 보네요? 그러니 그렇게 했겠죠?"

나의 옷깃을 붙잡던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나의 오른손을  쥐고 나를 향해 얼굴을 돌리게 하는그녀.

나는 그제야 그녀의 표정을 볼 수가 있었다.

매우 흥분했고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내가 도대체 뭐라고 그런 표정을 보여주는 걸까.

나는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아재다.

죽을때까지 일해서 서울에 집  채도 살 수 있나 의심스러운 경제력.

네가 버는 월수입이 어쩌면 나의 연봉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나는 네 앞에선 어른이고 싶다.

당당하고 싶고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다.

그렇게 나의 좋은 모습만을 너의 그 찬란한 재능으로 한 문장이 아니어도 좋다.

한 단어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너의 작품에 나란 존재가 녹아있고 세상 그 누구도 모르더라도 나 혼자만이 그것을 읽고 눈치챌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이쪽을 보시네요."

소녀라고 생각했던 눈.

너의 눈에서 시선을  수가 없다.

소녀라고 믿고 싶었을 뿐이다.

너의 눈은 1주일 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그래. 나는 너의 눈에서 소녀가 아닌 여자를 보았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데 그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수진이는 정말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으니까.

"안녕하세요. 헤밍웨이 선생님. 나는월억킥 작가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음을 짓는 수진이.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뒤를 돌아본 순간 이미 무언가가 끝나버렸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너를 보는 순간 오랜 겨울이 지나 비로소 봄이 왔다는 것을.

20년 일수로 하면 7300일.

너무나 따분하고 지루하던 나의 일상. 그래. 겨울보다 춥고 보잘것없던 인생.

그 인생에 작별을 고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네가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는 시간 10개월. 시간으로 따지면 7,200시간.

우린 참 공통점이 많구나. 이건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남들이 기대하는 어른이 되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

수진이가 성인이 되어도 우리의 나이가 사회에서 손쉽게 받아들여질 나이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미친놈? 매도하고 싶으면 하라지.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냥 두려워서 눈치채지 못한 척, 아닌 척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너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이미 너에게 미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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