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징조(1)
이 나이가 되니 고작 하룻밤을 셌을 뿐인데도 몸에서 죽겠다는 신호를 보내온다.
강의를 하는 것 같긴 한데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머리가 아프고 눈을 살짝만 감아도 그대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기분.
그래도 내 몸은 평소와 같이 강의를 하는 모양인지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은 변함이 없다.
대단하다. 이 정도면 기계 김준수라는 별명도 틀린 말은 아닌 거 같다.
간헐적으로 느껴지는 두통에 얼굴이 찌푸려지고 짜증이 솟구친다.
얼른 이 강의가끝났으면 좋겠는데...
띵ㅡ
내 간절함이 닿았는지 강의가 끝이 났다.
나는 서둘러서 강의실을 벗어나 강의준비실로 향했다.
졸려서 돌아버릴 지경이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쓰러지고 싶지만 이런 상태로 운전대를 잡으면 그대로 오늘 밤 9시 뉴스에 나오게 되겠지.
강의준비실에서 눈을 붙이고 가야 할 것 같다.
강의준비실에 사람이 없길 바랄 뿐이다.
남이 보는 앞에서 낮잠이라니 그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
`아들아,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다. 밖에서 함부로 욕하지 말고 나쁜 행동도 하지 말고. 알겠어?`
쯧.
이렇게 머리가 아프고 졸려 죽겠는데도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며 나를 억압한다.
강의준비실에 도착하니 인한 강사의 자리는 이미 짐이 없고 나머지 2명의 강사는 아, 지금 짐을 싸서 나가는구나.
다행이다.
이러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 없이 잠깐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쓰러지듯 의자에 앉아 그대로눈을 감았다.
내 육체는 이미 한계가 가까웠는지 눈을 감은지 3초도 지나지 않아 그대로 의식이 끊어졌다.
***
"선생님~"
수진이? 왜 갑자기 날 부르는 걸까?
"무슨 일이니?"
"선생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오늘의 수진이는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까칠해보이지만 사교성이 있고 예의 바르고 할 말은 하는 코카콜라 같은 그녀.
그녀는 오늘따라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남에겐 들려주면 안 되는 비밀이라도 말할 생각인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사람이 있는지 살펴본다.
"할 말이 있는 데 따라와 주실래요?"
그렇게 말하곤 강의준비실로 들어가는 수진이.
강의준비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강의실에 성큼성큼 들어가 나의 자리에 앉는다.
찰칵.
"응?"
강의준비실의 문이 잠기는 소리.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앞머리에 얼굴이 가려져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수진이가 서 있다.
"선생님, 솔직하게 말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올려다보는 수진이의 표정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흥분했는지 숨이 벅차오른 상태에서 붉어진 얼굴,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공격성을 띈 날카로운 눈매.
수진이는 나의 잘못을 탓하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선생님, 저 좋아하시죠?"
"뭐?"
"선생님, 선생님은 정말 개변태에요. 어떻게 띠동갑도 넘는 학생한테 반할 수가 있죠?"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수진이의 시선에 압도되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를 흥분된 눈으로 추궁하던 눈빛은 어느새 아름다운 반월을 그리고 있었다.
19살의 소녀에게서 여자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그 눈빛에 매료되었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다.
그 눈빛을 사람을 미치게 하는 매력을 품고 있었다.
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수진이의 눈을 바라봤다.
수진이는 검지로 입술을 쓸며 나를 올려다봤다.
"봐요. 이렇게 흥분하셨는데?"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나의 허벅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이 아이에게 욕정하고 있었나.
"저는 개변태 교사입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한테 욕정 해서 밤마다 자위합니다. 한번 따라 해보세요."
"뭐라고? 미쳤어?!"
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큰소리를 치며 수진이를 밀어내려 했다.
"미친 건 제가 아니라 선생님이죠. 그렇게 열렬한 사랑 고백을 해놓고서... 모를 줄 아셨나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헤밍웨이."
"!!"
"후훗,슬쩍 상황만 바꾼다고 모르겠어요? 저에 대한 사랑을 그리 절절하게 써놓으셨으면서... 아~ 살면서 이런 러브레터는 처음 받아봐요."
러브레...터?
지금 러브레터라고 했나? 나의 소설이 러브레터라고?
굳어진 나를 바라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인 수진이는 나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나의 고개를 강제로 끌어내린다.
그리고 겹쳐지는 나와 수진이의 입술.
나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
쿵.
"윽! 아! 씹!"
책상에 무릎을 박아 정신이 또렷해진다.
이 아픔이 조금 전까지의 일이 꿈이었음을알려준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밑으로 향했다.
30 중반이 넘으며 이젠 점점 쇠퇴하기 시작한 나의 남성의 상징.
나의 파트너는 20대의 젊음을 되찾은 것 같은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한 냄새도 축축한 물기도 없다.
정말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만약 누군가가 이 모습을 봤다면 어색해서 한동안 얼굴 보기도 힘들 테지.
인한 강사였다면 `오 아직 청춘이네요 하하하!` 하고 웃으며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여성강사들이 봤다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네.
나는 자리에 앉아서 다리를 떨며 애국가를 불러본다.
진정해야 한다. 진정해라.
나는 파트너가 고개를 숙일 때까지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애국가를 불렀다.
하지만 내 파트너는 쉽사리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됐다. 어차피 이 시간이면 학원에 남은 사람도 없을 텐데 얼른 돌아가자.
나는 서둘러서 짐을 정리하고 내 차가 주차된 곳으로 뛰어갔다.
차에 타고 서둘러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갑갑한 넥타이와 정장을 벗어 던지고 곧바로 책상 앞에 앉는다.
오늘은 아내가 회식이 있다며 늦게 돌아온다고 문자를 보냈다.
어차피 같이 밥을 해먹는 사이도 아닌데 쓸데없이 정중하다.
아내로서 최소한은 하고 있다고 시위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은 그런 것보다 이거다.
그렇게 나는 이래도 아재냐? 파트너라면서 고개를 까딱이는 나의 분신에 손을 댄다.
기묘하다. 이렇게 이렇게까지 흥분한 건 도대체 얼마 만일까.
나는 정말 오랜만에 자위했다.
***
샤워를 마치고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를 피우면 그년이 지랄할 것을 알지만, 지금은 담배를 피우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늘 위로 올라가는 뿌연 연기.
내가 러브레터를 썼다고?
꿈속에서의 사건을 떠올리자 나의 분신이 나는 아직 한창이라며 꿈뜰꿈뜰반응을 보이려고 한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가 쓰고 있던 소설을 훑어본다.
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퇴고를 한 적이 없다.
나의 마음속에 넘쳐흐르는 감정, 흔히들 소설가가 말하는 영감.
나는 내 몸속에 피 대신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던 그 감정들을 토해내듯 써내려갔다.
내 몸을 구성하던 감정들이 시원하게 내뿜어지며 가을도 아닌데 가을을 타는 듯한 알 수 없는 감정의 요동을 해소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감정. 나는 오늘 처음으로 내 소설의 퇴고 작업에 들어갔다.
처음엔 내가 쓴 글을 한 번 쭈욱 훑어보는 시간.
10여 분의 시간을 들여 최근에 쓴 글까지 단숨에 읽어버리자 나는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씨발"
도대체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스크롤은 점차 느려졌고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한 순간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굉장히 잘 썼다고 생각했던 소설.
그래, 지금까지 내가 써왔던 소설과 비교하면 굉장히 잘 쓴 소설이긴 하지.
몇몇 오·탈자가 보여서 잠깐 수정도 거쳤지만, 내가 느꼈던 그 순간의 감정이 이야기 속에 잘 녹아들어 있어 읽는 맛이 있는 생생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이건 훌륭한 러브레터로 밖에 보이지않는다는 게 문제지.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썼던 소설을 살펴봤다.
남들은 모르지만, 나만이 알고 있는 그녀의 비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나도 몰래 시야를 빼앗기는 카페주인 강범수.
평생 읽지도 않던 로맨스 소설을 그녀가 쓴다는 이유로 읽으며 내가 여기에 있다고 알려주듯이 오늘도 재밌었습니다 라며 댓글을 남기는 그.
그녀와 동질감을 느끼며 그녀를 주제로 소설을 쓰고자 하는 강범수.
그가 소설을 쓰기 위해 메모장에 그녀와의 사건과 카페에서의 소음, 그것들을 녹여내며 문장을 자아낸다.
이제 40인데 이런 감정이 어디에서 솟아나는 거지라며 창작의욕이라고 자신을 속이는 강범수.
하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은연중에 지어지는 미소는 그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잘 내포하고 있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을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채 그녀를 보면 영감을 얻는다며 좋은 소재라고 뇌까리는 강범수.
하지만 우산을 빌려준다는 작은 사건을 거쳐 조금 더 가까워진 그녀와 나누는 인사 한 마디에 기뻐하는 그는 첫사랑에 신이 나서 나고를 치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내가 쓴 글인데도 낯설게만 느껴지는 소설.
새벽에 쓰지 말자고 했는데 결국에는 잠이 오지 않아 써버린 탓일까?
읽어내려갈수록 강범수는 본인도 모르게 그녀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이 그의 독백을 통해 드러난다.
그래. 강범수의 모델은 나고 그녀의 모델은 수진이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아이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이 글을 지우려고 했다.
하지만... 차마 지울 수는 없었다.
내가 이 나이가 되어 쓴 소설 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고 쓰면서 즐거웠던 글을 차마지울 수는 없었다.
***
오늘은 도저히 연재를 할 수 없을 것 같다.
지금 이소설을 이어서 쓰는 순간 그 꿈에 영향을 받을 것 같아 두려웠다.
교사와 학생의 러브스토리? 너무나 진부한 스토리다.
멀리서보면 진부한 러브스토리며 희극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겐 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의 커다란 비극이다.
나는 38살에 어른, 그녀는 19살에 학생.
소설도 아니고진짜로 연애를 꿈꿔? 난 지금유부남인데?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겠지.
나는 어른이다. 어린애가 아니다. 감정에 취해 멋대로 행동할 수 없는 존재다.
어른과 어린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많겠지. 많겠지만 난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생. 사람은 누구나 상대방에게 이러한 행동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을 품지.
남편에겐 자상함과 듬직함을 원하고 아내에겐 포용감과 안정감을 원하고 아이에겐 씩씩함과 똘똘함을 기대하는 것 등등.
사회엔 알게 모르게 구성원에게 이런 행동을 해줬으면 하는 묵시적인 강요가 있다.
그걸 엇나가는 순간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며 그 사람을 욕하고 비난하지.
나는 그 시선이 두렵다. 난... 그냥 평범한 어른으로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세금을 내며 착실한 삶을 기대받는 묵시적인 강요에 따라 살아가고 싶다.
나는 이미 현실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어른이다.
그녀를 한 명의 교육자로서 바르게 이끌 의무는 없지만 적어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바라는 상식적인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니까.
나는 어른이니까.
책임이 따른다.
그러니까 이 감정은 새벽 감성이 불러온 그래, 요정의 장난이다.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아주 잠깐의 일탈을 경험했을 뿐이다.
내가 매일 담배라는 사소한 일탈을 하듯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꿈의 사건과 그녀에게 닿지 않은 나의 소설은 나의 사소한 일탈이 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생각하니 머리가 정리되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의 소설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다시 한번 담배를 입에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