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카페에서의 우연한 만남(1)
오늘의 나는 너에게 어떻게 보일까.
나는 학생들을 둘러보는 척 조심스레 수진이를 살펴보았다.
수진이는 오늘도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다.
나의 따분하고 지겨운 수업을 들으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아주 열심히.
그 열중한 모습이 아쉽게 느껴진다.
꼭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나에겐 특별한 일이었는데 너에겐 아니었던 말일까.
아쉽다.
강의실에 선 지금은 너에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
나와 너 사이에선 교단과 책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져 있으니까.
나는 학생들이 웃으면서 입에 담는 기계 김준수, 칼퇴근 강사가 되어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나는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이 아니다.
너를 몇 번 미소 짓게 하던 위트있는 남자다.
마누라라는 년이 셔츠를 다려주지 않아도 난 매일 다려입고 다니는 성실한 남자다.
나의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다.
툭.
"아."
너무 힘을 줘서 판서했는지 분필이 부러졌다.
당황하지 마라. 창피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 이 시간이 얼른 끝나기만 하면된다.
띵-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반장은 2분 후에 칠판 좀 지워주고."
오늘도 간신히 강의가 끝났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서둘러서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이곳에 계속 있으면 내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여줄 거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도망친 곳은 흡연장.
쓴웃음이 나온다.
벌써 몇 년이나 이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 데도 내가 가는 곳은 강의실, 강사대기실, 화장실과 흡연실 정도가 끝이었으니까.
난 이렇게 재미없는 인간이었구나.
"준수 강사님, 요즘 자주 오지 않아요?"
"그런가요?"
"그런데요?"
오늘도 아빠가 되어가는 자.강인한 강사가 먼저 와있었다.
이름은 세 보이는데 왜 금연은 못 하는 걸까.
"요즘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요?"
"예?"
"뭔가 털어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요. 아, 집에 좋은 일이 있다거나?"
"없어요."
"그래요?"
"그냥... 요즘 옛날 생각이 나서 뭔가 끄적이고 있거든요."
교실에서의 불쾌함이 문제였을까.
나는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말을 내뱉고 있었다.
"끄적인다니... 혹시 소설이라도 쓰세요?"
"이래 봬도 한때는 소설가 지망의 문학 소년이었습니다."
"하하!"
짧고 큰소리로 웃은 인한 강사는 전자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천천히 연기를 토해냈다.
"후ㅡ. 이리 보든 저리 보든 학생들한테 국어를 가르치면 다들 본인 소설 하나 끄적이는 거 아닌가요?"
"그런가요?"
"그런 거죠."
자신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인한 강사.
소설을 보다 보면 어느새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하던 친구 이야기.
결국, 친구도 소설가는 그만두고 교단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단다.
"듣고 보니 비슷하네요."
"그렇다니까요. 하하!"
오늘따라 웃음이 헤프구나. 인한 강사.
"언제가 저도 읽게 해달라고요. 선생님의 소설."
"뭐, 기회가 되면그러죠."
"아, 이거 안 보여주는 엔딩인데."
"애초에 소설은 보시나요?"
"이래 봬도 열혈독자라구요? 웹소설로 쓰는 돈이 한 달에 10만원이 넘어서와이프가 용돈 줄인다 뭐 다 시끄러워서 영~"
그렇게 말하면서 혀를 끌끌 차는 인한 강사.
음, 그건 정말 의외다.
강인한 강사.
난 당신이 수업과 관련된 내용을 제외하고 책을 읽는 모습을 상상도 한 적이 없는데.
***
나름의 기분전환이 되었지만, 아직 머릿속이 복잡했다.
집에 돌아가서 쓰던 소설의 뒷부분을 쓰고 싶다고생각하는 한편 개년이 기다리는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진저리가 난다.
학원 근처의 카페에서 시간을 떼우며 이 복잡한 머리를 비우고 가야겠다.
나는 평소에 자주 찾는 단골 카페로 들어가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이곳은 프랜차이즈가 아닌 가게.
40대로 보이는 남성이 혼자서 운영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1층짜리 건물.
오늘은 이곳에서 1시간만 시간을 보내고 가기로 정했다.
아직 봄이라기엔 좀 쌀쌀한 4월.
창가자리는 좀 춥지만 멍해지려하는 머리를 식히는 덴 딱 적당하다.
나는 멍하니 카푸치노를 마시며 오늘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어제 중단한 이후의 스토리를 어떻게 써야 하나?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수진이와 한마디도 말을 나누지 않았다.
수필에 가까운 소설.
결국은 작가이자 주인공인 내가 겪지 않으면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는 이야기.
시작은 편했으나 막상 이어서 쓰려니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다.
우선은 내가 쓴 이야기의 주인공 강범수가 히로인인 그녀와 평행선을 그리는 현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딱딱딱딱.
손톱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무엇이 좋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와의 첫 만남 그 자체가 나에게는 훌륭한 boy meets girl이었다.
아니 아재 밋 걸이라고 해야하나.
강범수는 비가 오는데우산이 사라져서 허둥지둥거리는 약간 허당같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신가요?
살짝 긴장한 느낌으로 범수를 향해 돌아선 그녀.
말을 걸어온 사람이 이 가게의 주인이란 것을 눈치챈 그녀는 약간 경계를 허물고 가져온 우산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범수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곤 카운터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그의 큰 덩치에나어울리는 크고 비싸 보이는 그래, 한마디로 골프 우산을 들고온다.
그는 그녀에게 우산을 내밀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다.
ㅡ 우리 매장에는 CCTV가 있거든요. 싸구려 우산은도둑맞았다고 경찰에 신고해도 웃으면서 넘어가는데 이렇게 몇십만 원짜리 우산이라고 하면 얼굴색이 달라집니다.
ㅡ 네?
그녀는 그가 무슨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ㅡ 단골이시라서 빌려 드리는데 꼭 가져오세요. 아니면 경찰에 신고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억지로 그녀의 손에 우산을 쥐여준다.
ㅡ 후훗.
손으로 입을 가리고 우아하게 웃는 그녀.
ㅡ 네~ 저도 이 나이에 경찰서 가고 싶진 않네요, 카페는 가고 싶어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범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ㅡ 비가 내리는 것도 가끔은 나쁘지않아.
***
훌륭한 프롤로그다.
내가 생각한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 시원하게 떠올린 문장.
내가 소설을 쓸 때 이 정도로 쉽게 머릿속으로 스토리가 그려지는 적이 있었던가?
단언컨데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소설 한 편을 쓸 때도 그냥 쓰지 않는다.
엄준식이 아니, 송준범이 그 새끼가 그렇게 악담을 하지만 나는 소설을 쓸때 많은 것을 고려해서 쓴다.
오탈자는 없는지 전개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5막 구조를 25편의 소설 안에 잘 맞추어 넣었는지 설정오류는 없는지 확실하게 확인을 한다.
이 시간이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걸렸었지.
나는 병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난 자신을 정말로 헤밍웨이라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닉네임을 헤밍웨이로 지어놓고도 부끄러움도 없이 글을 싸지르고 있던 거겠지.
헤밍웨이 팬들이 좆같다는 댓글을 달아도 닉네임을 바꾸지 않았던건 내가 아직도 순문학 작가마냥 내 작품에 작품성이 있고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가 나쁘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쯧. 난 병신인가?
기승전결의 25편이니 교훈이니 그런 시시콜콜한 형식에 얽매인다고 고통을 받지 않으니 얼마나 깔끔하고 멋진이야기가나오는거냐.
카푸치노를 마신다.
이 이야기의 끝은 어디로 이어질까.
단편이 아닌 장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치일지도 모른다.
난 38살에 유부남, 그녀는 앞날이 창창한 19살 여고생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난 지금 민짜 여고생을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다시 한모금 카푸치노를 마셨다.
이미 식어서 벌컥벌컥 마셔도 되는 카푸치노.
아까까진 달콤한 향기와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씁쓸하게 느껴졌다.
***
커피 잔이 비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이곳에 온지 30분은 넘은 것 같다.
젠장. 1시간은 보낼 생각이었는데... 30분이나 일찍 돌아가게 생겼다.
이제 집에 돌아가서 와이프랑 얼굴을 마주쳐야한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아파왔다.
그래도 어쩌나. 집에 돌아가야지.
집에 가기 위해 짐을 정리하고 엉거주춤 일어서려는 순간 나는 어색한 자세로 굳어버렸다.
"어라, 선생님?"
바깥의 찬바람에 코와 귀가 발갛게 변해 안쓰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수진이가 내 앞에 나타났으니까.
"와, 선생님도 여기 단골이에요?"
"그래. 주에 한 번 정도는 찾아오거든."
"아, 제가 갈려는데 붙잡아서 죄송해요."
"으응, 아니야. 리필하려고."
"아, 그래요? 그러면 같이 앉아서 드실래요?"
정말 그래도 될까.
심장이 쿵 하고 뛰었지만 겉으로는 점잖은 어른을 연기했다.
"그래."
나는 커피 잔을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이 카페에 다닌건 2년 정도다. 그 동안 리필을 한적은 한 번도 없었고.
주인도 날 놀란 눈빛으로 쳐다보고는 수진이를 힐끗 바라봤다.
그리곤 아무렇지도 않게 주문을 받았다.
오해하지말아라. 나는 강사고 그녀는 수강생일 뿐이다.
"밖이 많이 추웠나? 얼굴이 많이 빨가네?"
여기서 학원은 5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 잠깐 사이에 이렇게 빨갛게 변하는 걸까? 최소한 10분 이상은 밖에 있었던 거 같은 느낌이다.
"아, 정말 엄청 추워요! 그러니까 우리 창가석 말고 저 안쪽 석에 앉아요!"
그리 말하며 창가석이 아닌 카운터와 창문에서먼 안쪽자리를 가리키는 수진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옮겼다.
"저선생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혹시 들어주실 수 있나요?"
"부탁?"
"학교에서 백일장을 열거든요.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어서요."
후릅.
나는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수진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그런데 그냥 간편하게 수필로 하려고요. 그런데 뭔가 떠오르는 게 없어요. 어드바이스같은거 해주실 수 없을까요? 국어 선생님이잖아요?"
"강사야. 선생님이 아니고."
"아무튼요."
너의 말은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너 소설 잘 쓰잖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다는건 무슨 소리일까.
백일장은 거짓말인가? 그냥 주변에서 소재를 얻으려고 하는 거 아니야?
엉큼한 녀석. 하지만 마음에 든다.
결국 네가 수필을 쓴다면 나의 이야기를 적어주는 것이고 네가 수필을 쓰지 않는다면 나의 뻔하면 뻔하고 특이하다면 특이한 인생이너의 소설 속에서 다채로운 필력으로 살아나겠지.
나의 이 쳇바퀴 굴러가듯 똑같은 재미없는 일상이 너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난다면... 나는 얼마든지 내 재미없는 이야기를 들려줄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불륜이라는 단어를 한구석으로 밀어냈다.
이건 불륜이 아니다.
...그저 상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