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조우(3)
삐삐삐삐 삐리릭.
쾅.
"여보 나왔어."
"어, 그래."
출장갔다던 년이 돌아왔다.
너는 출장을 다녀온 게 맞냐? 출장다녀왔다는 년이 왜 이리 생기가 넘치지.
어디서 누구 좆이나 빨다왔냐 걸레년아, 개 같은 년이.
평소에는 이런 욕설이 목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갈 텐데 오늘은 별로 불쾌함이 들지 않았다.
왜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제 37살인 이 걸레년의 이름은 고혜정, 일단 법적으론 나의 아내다.
이미 섹스리스 부부가 된 지 2년 차인 여자.
결혼할 때 자금관리를 누가 할까로 싸우다가 각자가 하게 되었다.
그냥 그렇게 살자고 생각하던 차에 집값이 제법 내려갔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 집을 사서 정착하는 게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 말을 꺼냈었다.
집을 사자고.
그랬더니 대통령님이 집값이 싸진다는데 왜 빚을 내서 집 살 생각을 하냐면서 날 미친놈 취급했었지.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어버렸다.
동창회에서 술을 마실 때 집값이 오를테니 집을 사라고 말을 꺼냈던 준범이가 떠오른다.
그때 그 녀석 말을 들었으면 이렇게 아등바등 살 일이 있었을까.
우리는 고작 몇 년 사이에 상대적 거지가 되어버렸고 아무것도 없던 나를 유일하게 지탱해주던 학력과 남들보단 나은 월급이란 타이틀은 한순간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내 학력이 아무리 좋아도, 내 월급을 아무리 모아도 집 한 채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으니까.
준범이가 오랜만에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내 함께 술을 마시다가 집값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사자마자 몇억이 올라서 안 샀으면 큰일이 날뻔했다고 껄껄거리는 준범이.
나는 웃으면서 부럽다는 이야기를하면서도 속으로는 분을 삭였다.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아무 생각도 없이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속에서 솟구치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토해버렸다.
왜 내 말을 안 들어서 이 병신같은 상황이 됐냐고 따졌지.
집만 샀으면 이런 거지새끼가 되진 않았을 거라며 소리를 질렀다.
결국, 그날을 기점으로 우린 완전히 틀어졌다.
그때 이년에게 지랄을 안 했으면 사이가 달라졌을까?
아니, 내 성격상 어디서든 사고를 쳤을 거다. 담아두면 언젠간 넘치기 마련이니까.
술기운도 있었지만, 지금은 좀 후회도 하지만... 그날은 담아뒀던 악감정을 토해내서 속이 시원했다.
아무튼 이 준범이는 좀 특출난 놈이긴 했다.
요령이 좋아서 뭘 하든 항상 절반 이상은 하는 결과를 내곤 했지.
여친도 곧잘 사귀었었고 성격도 좋은 놈이라 싸워도 금방 툴툴 털어내는 녀석.
공부도 전교 1~2등은 못했어도 반에서 4등은 하던 녀석이다.
나는 녀석의 집이 조금만 더 좋은 집이었다면 그 녀석이 훨씬 대단한 일을 했을 거로 생각한다.
준범이는 집이 어려워서 대학도 포기하곤 공장을 다녔는데 그렇게 한두 푼 모은 돈을 어쩌나 했더니 주식에 투자했다.
나에게 주식이란 순식간에 500만원을 증발시킨 무서운 도박장이었으므로 준범이는 미친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준범이는 될 놈이었다.
지금은 다니던 공장도 그만두고 딴따라로 살고 있다.
잘살고 있겠지. 가끔 잘살고있느냐고 카톡을 보내는 놈인데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껄껄거리는 놈이다.
"아, 이거 오랜만이네."
물을 마시러 일어났다가 식탁 위에 있는 우산을 집어 든 개년.
그 손에 들린 건 내가 수진이에게 빌려줬던 조금 비싼 접이식 우산이다.
"뭐가?"
"기억 안 나? 우산이 망가졌다고 했더니 당신이 사준 우산이잖아. 어디 갔나 했는데 당신이 가지고 있었나 보네."
"아ㅡ"
기억났다. 그래, 벌써 6년도 넘었다.
나름 호감이었던 그녀의 관심을 끌고자 비싼 우산을 선물했다.
명품가방은 못 사줘서 미안한데 명품우산이니 2글자 정돈 용서해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10대엔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즐거워서 20대엔 먹고살기 바빠서 연애를 등한시했던 내가 30대가 된다고 숫기가 생길 리도 없다.
그래도 그때 그 멘트는 나름 위트 있었다고 뿌듯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땐 웃으면서 소중히 쓰겠다고 하더니 결국 집안 어딘가에 짱박아뒀고 난 그것도 모른채 예비용 우산으로 챙겨뒀었나 보다.
우산을 잠깐 바라보던 개년은 우산을 식탁에 탁하고 올려놓더니 다시 소파에 누웠다.
...뭘 기대한 거냐. 우린 이미 끝났는데.
***
집에 이년이 있으면 담배를 못 피운다.
냄새난다고 지랄발광을 하니 나가서 펴야 하는데 그게 참 귀찮다.
오늘은 담배가 아닌 맥주와 함께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쓰던 소설을 전부 습작 처리했다.
이제 내 문제점을 알았으니 새 출발을 해야지.
그런 마음가짐을 품었으나 내 손가락은 마비라도 걸렸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멍하니 화면속에서 깜빡이는 커서만을 바라보며 시간을 허비했다.
허무했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데도 그리 달라지지않은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우웅. 카톡이 왔다. 준범이었다. 아무래도 양반은 못 되는 녀석이구나.
`김준수 작가님, 거 웹소설 쓰던 거 왜 갑자기 연중이랍니까?`
뭐냐, 너도 독자였냐.
`쓰는 데 재미가 없다. 난 판타지는 안 맞나 봐`
`그럼 무협은 어떠냐? 요즘은 특이하게 인방하는 천마도 있고 냉동인간이었다가 부활해서 우주에서 싸우는 천마도 있는데`
그게 도대체 뭐냐?
`난 무협은 안 써`
`그럼 수필은 어떠냐? 요즘 야설중에 주인공이 싸이코패슨데 제자들 지하에 감금하고 따먹고 그러는 소설이 좀 유행인데`
미친놈이 그게 수필이라고? 경찰은 어따뒀냐.
근데 수필? 수필이라...
`수필? 음...`
`너 백일장도 심심하면 따고그랬잖아. 적당히 수필 각색해서 그럴싸한 현대배경 소설 하나 써봐`
`그래, 충고 고맙다.`
`오우 난 언제나 널 보고 있다. 어떻게 작가이름이 헤밍웨이? ㅋㅋㅋㅋ`
엄준식은 준범이었나 보다. 개새끼.
아니, 지금은 준범이 녀석보다 소설이다. 수필 형식의 소설... 수필, 소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녀, 이수진이었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어 기가 세 보이는데 뜻밖에 사교성도 밝고 성격도 좋아 보이는 그녀.
나와 그녀의 이야기를 소설로?
신기했다.
방금까지 텅 비어있던 메모장이 순식간에 까만 활자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메모장에 적힌 글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걸그대로 소설로 녹여내면 수진이에게 들킬지도 모른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하꼬 작가의 하꼬 소설이지만 혹시 이번에야말로 대박을 칠지도 모르니까.
그래, 주인공이학원 강사라니 이건 안 되겠다. 히로인이 여고생이라니 요즘은 말이 많이 나올 거 같은데 여대생으로 고쳐야지.
하나, 둘 이야기에 뼈대를 완성해 나갔다.
이제 배경을 어디로 하는 가만 고려하면 되는데...
그때,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내 귀로 파고들었다.
`어때유? 참 푸짐하쥬?`
"음."
이거다!
***
이번에는 글이 너무쉽게 써져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지명이나 속성, 오러니 기사니 하는 잘 모르는 것들을 쓸 필요도 없다.
그냥 서울에 있는 작은 카페를 무대로 잡으면 이렇게 쉬울 수가 없다.
한때는 소설가를 꿈꾸던 40살의 주인공은 재력가인 아버지 덕에 서울에 괜찮은 집도한 채 있고 주식도 펀드도 잘해서 생활에 여유가 있는 남자다.
의식주가 해결되면 자아실현을 목표로 한다고 하던가.
그는 아직도 소설가 지망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의 세를 놓은 가게 한곳이 공실이 되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곧장 아버지를 찾아가 카페를 차리겠다고 말하며 회사를 그만두었음을 알린다.
아버지는 기가 차서 뭐라고 하려다가도 이미 회사를 그만둔 그에게 잔소리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란 걸 잘 알아 한숨을 쉬며고개를 끄덕인다.
손님이 있을 땐 한 명의 바리스타가 손님이 없을 땐 한 명의 소설가가 되는 주인공.
연애는 좋지만, 결혼은 싫은 베짱이.
하지만 요령이 있어 적당히 잘 굴러가는 그의 카페.
어차피 월세도 없어 최저한의 손님만 찾아오면 손실을 보지 않는 장사.
그는 커피 맛을 연구하거나 서비스에 열중하는 대신 현상유지를 하며 그 노력을 손님들을 관찰하는 데 쓴다.
어떤 여자는 외벌이 하는 남편의 월급이 쥐꼬리만 하다는 이야기.
그걸 받아주는 여자는 쥐꼬린데 육아는 안 한다며 독박육아라는 이야기.
흠. 뻔한 이야기다.
한 남자는 여자가 참 많나 보다.
방금전까지 통화하던 여자랑은 다른 여자의 이름을 꺼내면서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하고 과제 때문에 카페에 왔단다.
과제 한다고 카페에 왔다는 녀석이 왜 아까부터 여자랑 통화만 하는 거냐?
많은 인간 군상들을 살펴보며 소설에 쓸 소재로 사용하는 주인공.
띠링ㅡ.
또각.
그녀다!
굽이 높은 구두와 몸매가 부각되는 옷을 입은 차도녀같은 여자.
항상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꺼내놓고 아메리카노와 케이크 세트를 시켜놓고 한참을 있다가 떠나는 그녀.
이 카페에선 오직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요즘 가장 핫한 로맨스 소설을쓰는 작가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로맨스 소설은 읽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만은 예외이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노트북을 열심히 두드리기 시작한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는 알고있다. 그녀는메모장에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이야기를 담아 넣는다.
그래, 그녀의 이야기는 그가 운영하는 이 카페에서 탄생한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그녀에게는 하나의 소재가 되어 각색되고 이야기가 된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에서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몸가짐과 행동이 젠틀한 늙은 점장이 되어있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가 마음에 든다.
그의 따분한 일상에 찾아온 오직 그만의 비밀.
그녀는 오늘도 그의 이 작은 공간에서열심히 집필하다가 집에 돌아가겠지.
웹소설은 일일 연재라는데 그녀도 참 큰일이겠다.
"아메리카노 아이스 한잔이랑 허니 브래드 하나요"
"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렇게 알바생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잠시간 일에 집중한다.
***
뚜둑.
"흐!"
삭신이 쑤신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이다. 이렇게 기분 좋게 이야기를 써내려간 일은.
소설이 이렇게 쓰기 쉬운 거였나.
40살에 이름도 등장하지 않은 점장은 나의 오너캐에 가깝다.
불화없는 부모님,금전적 여유가 있고 짜증 나는 마누라가 없고 잘 먹고 잘 사는 준범이 같은 능력 있는 베짱이.
쓰고나니 너무 양심이 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요즘은 먼치킨이 유행이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시간을 확인해보니 마침 수진이의 소설이 올라오는 시간이다.
오늘은 어떤 내용일까.
소설 속으로 들어간 작가는생각보다 본인의 어드밴티지를 활용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작가가 묘사하는 것은 주인공과 관련된 주변이지 모든 것을 다 담아내지 못하니까.
갈팡질팡하며 불안하기 짝이없는 여행을 계속하는 작가.
그러다가 비가 오기 시작하고 그는 굳이 우비를 산다면 비싼 게 낫겠지라며 10배는 더 비싼 고급진 우비를 샀다.
하지만 그 행동은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칼과 마법 그리고 야만이 살아숨쉬는 판타지에서 비싼 옷이란 불청객을 불러들이는 법이었으니까.
이거 아무리 봐도 오늘 있었던 일인거 같은데.
오늘도 나와의 대화를 이야기에 써준 것인가. 가슴이 벅차오른다.
소설을 쓰느라 늘어졌던 몸에 활력이 샘솟는다.
이 몸에서 흘러넘칠 것 같은 감정을 너에게도 전하고 싶다.
...그래도 저번에 있었던 일이 있으니 적당히 해야지.
사실, 댓글이 아닌 말로 직접 표현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저 한 명의 강사. 너는 그저 한 명의 수강생에 불과하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니 난, 늘 해왔던 방식으로 내 감정을 전하기로 했다.
오늘도 재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