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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화 〉조우(2) (3/301)



〈 3화 〉조우(2)

"아, 이런... 미안하다. 액정은 무사한듯싶은데 문제가 생기면 여기로 전화하렴."

나는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서 눈앞의 학생에게 건네줬다.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본 게 얼마 만인가? 1년은 넘은 거 같은데.

"아, 아니에요."

학생은 많이 당황했는지 손과 얼굴을 동시에 좌우로 흔든다

그럴 만도 하지.

갑자기 말을 걸어도 놀랄 텐데 돌연 들려온 재채기 소리는 얼마나 놀랐을까.

"우산이 없어서 그러니?"

"아, 네. 매점에 우산이 다 팔렸다더라고요. 그래서 찾아보니까 금방 그친다고 해서..."

뒤로갈수록 말소리가 작아진다.

평범한 여고생이다. 아니 평범은 아니지, 미인이다.

160대 중반대로 보이는 키, 어깨를 살짝 넘는 검은 생머리에 화장기가 없지만 선명한 쌍꺼풀이 특징적인 똘똘한 눈과 오뚝한 코, 립밤을 발랐는지 촉촉해 보이는 입술.

으레 그 연령대의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싱그러움을 가진 학생이었다.

***

"여기. 이걸 쓰고 가렴."

"아,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는 학생.

그녀의 이름은 이수진이라고 한다. 이수진, 이수진... 좋아. 기억했다.

"근데 선생님은 우산 없어도 괜찮아요?"

"나는 차가 있으니까 상관없어."

"아! 차도 있으면서 저는 안 태워주시는 거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올려다보는 학생. 아니, 수진이.

나를 탓하는 것 같지만, 눈가에는 묘한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처음엔 낯을 가린다고 생각했지만, 굉장히 사교성이 좋은 아이 같다.

"선생님은 진수룰을 치고 있을 뿐이야. 요즘은 미투니 유투니 말이 많아서 말이지."

"아하하!"

크게 웃은 수진이는 우산을 빌려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떠나갔다.

매우 건강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요즘 학생들은 저렇게 웃는 걸까.

10년이 넘게 학생들을 가르쳐왔는데 학생들이 어떻게 웃는지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녀가떠나간 다음 짐을 싸서 강의준비실을 나가려고 하다가 벽에걸려있던 거울에  얼굴이 비쳤다.

말끔하게 깎은 턱수염, 잘 다려진 셔츠, 적당히 깔끔한 머리.

어제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오늘은 왠지 너무나 늙어 보이는 아저씨가 서 있었다.

***

오늘은 웹연갤에 올라온 몇몇 참고 글들을 살펴본다.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독자층은 누구인가?

아주 기본적이지만 자신들의 경험이 실린 이야기들.

어제까지만 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참고 글들을 하나둘씩 읽어내려가며 나에게 부족한 점이 뭔지 생각해본다.

그래. 결국은 그거였다.

나는 내가 쓰고 싶었던 소설을 쓰고 있었다. 남이 읽고 싶게 만드는 소설을 썼던  아니다.

독자들이 원하는 소설이 아닌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는 소설.

이러니 독자가 늘어날 리가 없지.

한숨과 함께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왜 이런 병신 짓을 하고 있던 걸까.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그저 질렸던 것뿐이다.

취미가 독서이고 직업적으로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이젠 질렸던 거다.

어디서 본듯한 스토리와 재미없고 평면적인 등장인물들.

독자들은 그걸 양판소라고 부른다.

양판소는 보다 보면 물리는 법.

나는 그들과 다르다면서 쓸데없는 헛발질을 하고 있었다.

병신새끼. 그럴 깜냥도 안되는 새끼가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건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판타지를 써야하나.

하지만 지금에 와서 내 문제를 인식했다고 해서 바로 써질 것 같지도 않다.

그럼 판타지와 비슷한 무협지? 아니, 그건 아니다.

 새끼가 좋아하던 장르는 도저히 좋아지질 않는다.

그래. 결국, 나란인간은 다른 사람들이 즐겁게 읽을 만한 양판소 조차 쓰지 못하는 인간이다.

양판소를 쓰려고 하면 어떻게든 쓰긴 쓰겠지.

하지만  결말은 반드시 연중이 기다리고 있겠지.

내가 쓰면서 즐겁지 않으니까. 내가 읽으면서 즐겁지 않으니까.

하아... 난 도대체 뭐하는 새낀지 모르겠다.

마음을 다잡고 내가 썼던 소설들을 읽어보니 웃음만 나온다.

가슴속에 쌓인 감정을 풀어내려고 휘갈긴 대변 비스름한 결과물들.

 독자들이  글이 쓰레기라고 했는지 알  같다.

치익 후ㅡ.

낙타를  모금 들이키며 그들의 지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뒤져보면 세상엔 같은 독자가 있겠지.

소드마스터도 마나도 써클도 엘프도 지겨운 독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독자라고 하더라도 마나, 써클, 엘프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소설을 보지는 않겠지.

내가 쓰면서 재밌다고 느끼며 독자들이 읽으며 즐겁다고 생각하는 소설을 써야한다.

모든 것을받아들이고 차분한 마음이 되자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이 평소보다는 경쾌했다.

한참동안 메모장과 눈싸움을 하고 눈이 뻑뻑해져 미간을 주무르며 벽으로 눈을 돌렸더니 벽에 걸려있던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 9시가 되다니 오늘은 생각보다 시간이엄청 빨리 흘러간 것 같다.

9시.

9시는 내가 그 소설을 보러가는 시간.

나같은 아재도 즐겁게 볼만한 소설. 오늘은 소설 속에 들어간 작가가 히로인을 만나지 못하는 장면에서 시작됐다.

그가소설에 썼던 시간과 장소는 틀림없는데 히로인이 없어 당황하는 작가.

불안한듯 손톱을 깨물면서 '이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씨발 씨발!'이라며 절규를 하는 작가.

하지만 그가 어떤 상황에 빠졌든 소설 속의 세계는 파멸로 치닫고 있다.

원작의 주인공은 여기서 후대에 성녀로 칭송받는 사제였던 여성과 연인이 된다.

작품 후반까지 주인공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포지션의 그녀지만 작가는 그녀와 만나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낙담하고 있던 작가가 어떻게든 정신을 가다듬곤 다른 사제를 영입한다.

'아하하, 하하, 하하하하하! 이게, 이게 펜스룰인가? 어떻게 파티에 고추밖에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속으로는 자신의 불운을 저주하는 작가.

겉으로는 멀쩡히 행동하면서 얼굴엔 썩은 미소가 걸린 작가를 비웃으며 주인공은 작가의 다음 행동을 관찰하며 어떻게 할지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치익 후ㅡ.

발을 떤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가슴이 아프다.

뭐지이 감정은? 미칠 것 같다.

굉장한 충족감. 이런 충족감을 느끼는 것은 얼마 만일까?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 어머니가 솜씨를 발휘한 요리를   가득 차려줬을 때인가. 군대를 전역했을 느꼈던 기분인가.

가슴속에 차오르는 환희를 빗대어 표현할 대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하꼬작가 김준수가 그녀의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

확실하다. 펜스룰이라니... 이건 분명히 내 영향이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가슴 한편에서계속 간질거렸던 감각이 사라졌다.

대신 알 수 없는 뜨거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감사의 댓글을 남겼다.

내가 지금 느낀 이 만족감과 벅차오름을 공감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독자들이 즐겨 찾는 갤러리로 들어간다.

k-헤밍웨이.jpg

그런 글이 념글에 올라가 있다. 뭐지?

 글은 나는월억킥 작가의 소설에 내가 달았던 댓글의 캡처 본이었다.

'이 분충 글은 존나 못쓰는데 댓글은 존나 맛깔나게 달았네 ㅋㅋㅋ'

'아이~ 싯팔!'

'와 시발 존나 틀딱냄새난다.'

'40대 진보청년 근첩같음 ㅋㅋㅋ'

'k-펄럭'

무수히 올라가는 추천수.

나는 얼굴에 열이 뻗쳐서 후다닥 갤러리를 꺼버렸다.

옹호하는 댓글이나 글을 쓰면 헤밍웨이 어서오고라는 댓글이 적힐 것이란  뻔히 안다.

미치겠다. 내가 왜 이런 미친 짓을 한 거지?

나는 작품에 썼던 댓글을 지울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쓰읍 하ㅡ.

담배를 물었는데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

원문이라도 지워야겠다는 생각에 소설의 댓글창을 확인하는데 대댓이 달려있었다.

'헤밍웨이님 장문의 댓글감사합니다.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 바른 아이. 고맙구만.

...댓글은 그냥 남겨둬야겠다.

***

탁탁.

오늘도 평소와 같은 강의를 한다.

변함없는 일상.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하지만 지금의 나는 묘한 충족감을 느끼고 있다.

교탁에서 우측 창문 쪽에 앉은 그녀, 이수진.

그녀가 내 수업을 듣고 있다.

칠판을 노려보고 노트에 정리를 하며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너는 오늘도 9시 정각에 소설을 올리겠지.

갤러리에서 뻘글이나 싸지르는 놈들아. 나를박제하고 놀리던 쓰레기들아.

너희들의 감정소비는 아무것도 낳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달라.

나의 자그마한 행동이 그녀의 작품에 반영된다.

그저 그 한 단어 '펜스룰'

그 별것없는 단어에 이렇게까지 가슴이 설렐 수 있다니.

평소보다 경쾌해진 목소리, 힘이 실린 분필이 칠판을 두드린다.

나는 강의를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수진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히죽.

수진이가 이쪽을 바라보며입가를 살짝 비틀면서 웃어 보인다.

흠칫

못된 장난을 들킨 아이처럼 몸이 굳는다.

나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다시 강의를 이어간다.

판서를 끝내고 시계를 보는데 평소보다 5분이나 수업이 빨리 끝나버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반장은  치면 칠판 좀 지워줘."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 강의실에서 나가자  너머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겠지. 나도 당황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도 날 모르겠다.

***

스읍하ㅡ.

"오! 준수 강사님 요즘 자주 오시네?"

"아, 인한 강사님, 수고하셨습니다."

"뭐 좋은 일 있었습니까?"

주머니에서 전자 담배를 꺼내려던 그가 다시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곤 그리 물어왔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예?"

"오늘따라 얼굴에 생기가 있는 거 같아서요."

생기? 생기라...

"잠을 좀 잘 잔 거 같습니다."

"하하하! 오늘은 아내분이랑 의무방어전 안 하셨나 봐요?  씨, 전 요즘 와이프가 둘째도 가지고 싶다고 해서 얼마나 힘든지... 흠흠."

카악 퉤.

그는 그렇게 말하다 말고 가래침을 뱉는다.

"아, 죄송합니다."

"아뇨. 뭘."

담배를 피다 보면 가끔 뜻하지 않게 가래가 나오긴 하지.

가래에 의해 대화가 끊겼다. 우리는 정적 속에서 담배를 태우고 커피를홀짝였다.

어색했다. 대화가 끊기는 게 이리 어색한 일이었나.

"...안 한 지  됐습니다."

"예?"

"의무방어전, 와이프도 저도 2세 생각이 없어서."

"아,아~ 그랬구나. 요즘은 애 없는 가족도 많다는데 그것도 좋죠. 뭐."

인한 강사는 껄끄러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뭔가를 꺼내려고 하고 있었다.

또 휴대폰으로 아기 사진이라도 보여줄 생각이었을까.

내가 얼마나 무심하고 주변에 관심이 없는 인간이었는지   같다.

인한 강사는 나와의 대화가 어색해서 대화가 끊기려고 할 때마다아기 사진을 보여주면서 앵무새처럼 같을 말을 반복했던 거겠지.

그는 팔불출이 맞다. 아마 그건 맞을 거다.

하지만 사람이 옆에 있을 땐 휴대폰을 들여다보기보단 대화를 시도하는 최소한의 예의는 있는 사람.

오늘의 그는 달라 보였다.

아니, 달라지진 않았겠지. 내 시선이 바뀐 거다.

그저 잠깐의 헤프닝. 내가 생각하기엔 드라마틱하지만 세상 어디에서든 일어날 법한 우연.

정말 우연히 내 강의를 듣는 학생이 글에 재능이 있었을 뿐이고 내가 그 학생이 웹소설을 쓴다는 것을 알아버린 작은 사건.

 작은 사건 하나가 이렇게나 나를 바꾸는 건가.

늘 먹던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마저 평소보다 달게 느껴졌다.

***

"아, 선생님!"

흡연실을 나와 강사대기실로 향하는데 손을 흔들며나를 불러세우는 그녀, 이수진.

"여기요!"

수진이는 어제 나에게서 빌려  우산을 내밀어 왔다.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잘 썼어요."

환한 미소. 싱그럽다.

왤까? 학생들이 깔깔거리며 웃는 장면은 자주 봤는데 그 미소에 할 말을 잃었다.

"선생님?"

"아,아아 그래? 그거 잘됐네. 우산이 빌려줬던 그대로라서 새  줄 알았어."

"아하하! 뭐에요~ 그게. 아, 맞다. 아까 교실에서 자꾸 저 쳐다보시던데 그렇게 비싼 우산이었어요?"

"뭐?"

"선생님들이 교탁에 서면 우리가 뭐 하는지 다 안다는데 우리도 선생님들이 어딜 보는지 정도는 알거든요."

...다음부턴 주의해야겠다.

"비싸긴 하지. 15만 원짜리 우산이니까."

"예?! 아니  그렇게 비싼 우산을 써요?"

그러게,  이렇게 비싼 우산을 쓰는 거지?

"비싼 우산은 도둑질당했다고 신고하면 경찰이 잡아주니...까?"

"아하하! 뭐예요, 그게~"

그녀는 나의 말이 제법 재밌었는지 한참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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