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4인 파티와 파랑바위꽃 (1)
* * *
거사 아닌 거사를 치르게 된 두 여헌터들의 심정이 어떠한가와는 상관없이,
다음 날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짐꾼 특유의 투박한 복장과 함께 주말에 새로 장만한 짐꾼용 백팩을 등에 매어, 보다 완벽한 F급 짐꾼으로 거듭난 유민은 약속 시간에서 조금 이른 시기에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유민을 제외한 셋이서만 모이거나 하면 상당히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질 수 있으니,
유민이 먼저 마녀를 만나 파티에 같이 합류토록 해 달라고 두 명에게서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내 마녀의 공방 앞에 도착한 유민은,
자동으로 열리는 유리문을 통과하여 공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편의점을 연상케 하는 단정한 내부 안쪽에서 마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왔어요, 유민?”
“아, 네.”
그 느긋한 목소리를 따라 카운터 쪽으로 다가간 유민은,
카운터 뒤의 문을 열고 나오던 시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아하게 굽이치는 검은 머릿결과 나비 장식이 달린 머리띠,
어깨에 사뿐히 걸쳐진 카디건과 면 바지는 평소의 그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허나 그녀의 거대한 젖가슴을 온전히 감싸고 있던 상의는,
유민이 지금껏 보지 못 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살짝 푸른 색이 감도는 어두운 빛의 민소매 블라우스.
그녀의 동생처럼 목 근처까지 단추를 채워 놓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 옷자락 사이로 깊은 가슴골이 살짝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허나 그러한 골짜기보다도 유민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으니,
거대한 볼륨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밑가슴 쪽에서부터 은빛의 세로선 두 줄기가 각각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봉우리를 타고 올라와 윗가슴 바로 근처까지 이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양쪽 젖가슴의 첨단 부분을 경유해서 그어져 있는 금속 질감의 선과도 같은 그 장식에 유민이 시선을 집중하고 있자,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커다란 유방 위에 한쪽 손을 얹었다.
“디자인이 좀 특이하죠?”
“아, 아뇨. 그렇게까지는….”
“얼굴에 저게 뭐 하는 물건일까. 라고 적혀 있는데요, 뭘.”
큭큭 웃으며 가벼운 핀잔을 준 마녀는, 이내 카운터를 넘어 유민의 근처로 다가왔다.
신비로운 자색의 눈동자가 담긴 눈매를 살짝 휘며, 나긋한 목소리를 건네는 그녀.
“이따가 보여줄게요. 이게 무슨 옷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가 볼까요?”
마녀는 이내 면바지에 감싸인 커다란 엉덩이를 씰룩이며 앞서 걸어나갔고,
유민은 그녀의 뒤를 따라 공방을 빠져나왔다.
“파티원들한테는 내가 온다고 얘기 했어요?”
“네. 어제 알려줬습니다.”
“그래요? 그럼 지금쯤 긴장하고 있겠네요.”
시영의 말에, 유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긴장 수준이 아니라 거의 패닉을 하는 것 같던데.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시영과 유민은 옆 구역의 공원으로 이동했다.
유민의 파티가 몇 번이고 공략했던 평원숲 혼합 필드 던전의 게이트가 위치한 곳이었다.
“으음. 오늘 공략하는 곳이 여긴가요?”
“네. 재료들 때문에 저번주부터 계속 다니고 있었습니다.”
“계속 다녔다는 건 아직 성과가 없다는 거네요?”
“…그렇죠.”
정곡을 푹 찌르고 들어오는 마녀의 말에 유민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유민의 옆에서 걷던 시영은 그런 그의 모습에 픽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원래 헌터마켓에 없는 재료 구하는 건 노가다에요.
될 때까지 던전 도는 것밖엔 답이 없어요.”
“그렇겠죠…?”
그러한 대화와 함께 게이트가 놓인 공원 광장에 들어선 시영과 유민.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던 유민은, 이내 게이트 옆에 서 있는 다희와 서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위협적인 모습의 각반과 장갑을 착용한 다희는 상당히 불편한 듯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늑대 꼬리를 긴장감이 묻어나는 움직임으로 흔들어 대고 있었고,
묵빛의 대형 타워 실드를 등에 지고 있던 서울은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은 채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저기 있네요.”
“흐으음.”
마녀에게 그녀들의 존재를 알리며,
유민은 잔뜩 긴장한 듯한 두 여헌터에게로 다가갔다.
“오, 유민이 왔….”
날카로운 늑대의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던 다희가 먼저 유민을 발견하고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하지만 곧 유민의 뒤에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금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러한 다희의 반응에, 서울은 숫제 울상이 되었다.
진짜로 여기에 오는 것인가. 헌터 업계를 들었다놨다 할 수 있는 그 마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유민은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다희 누나, 서울 누나. 나 왔어.”
“어어. 그래….”
“으응. 유민이 안녕….”
다소 떨떠름한 인사를 건네는 그들을 보며 쓰게 웃어 보인 유민은, 이내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서 있던 흑발의 마녀를 바라보았다. 파티원들에게 그녀를 소개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허나, 옅은 미소를 띠고 있던 시영이 유민보다 한 발 앞서 입을 열었다.
“소개는 던전 들어가서 할까요? 여기서 하기는 좀 그러니까.”
“…아. 그렇네요.”
그녀의 정체를 생각하면 이런 공공장소에서 함부로 말을 꺼내는 것은 위험성이 크기 마련이었다.
유민은 이내 그것을 깨닫고 다시 두 여헌터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유민과 마녀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그녀들은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관리원의 확인을 마치고 게이트를 통과해 던전 안으로 입장한 유민 일행.
그들은 또 다시 숲과 평원이 교묘하게 섞여 있는 듯한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유민의 곁에 서 있던 마녀를 제외하고 말이다.
사라지는 게이트를 바라보던 유민은,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마녀를 불렀다.
“마녀님.”
“불렀어요?”
“방금 확인 절차는 어떻게 통과하신 겁니까?”
제대로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리퀴드 위치가 이 던전에 입장했다는 사실이 퍼지게 되면 상당히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게 될 수도 있었기에, 그의 의문은 합당한 것이었다.
그에 마녀는 옅은 미소를 유지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번에 말했잖아요. 우리 신입 말고는 신분 위장하고 다닌다고.”
“…단순히 명함만 다른 게 아니라 게이트 입장까지 위장할 수 있는 건가요?”
“협회 데이터베이스도 위조 가능한데 이 정도야 뭐 간단하죠.”
“….”
마녀의 말에, 유민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설마 그녀가 아무 조치도 없이 이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유민의 반응에 픽 웃어 보인 마녀는,
이내 옆에 멀뚱히 서서 자신과 유민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희와 서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졸지에 업계 거물의 시선을 받게 된 두 여헌터는 흠칫 몸을 떨었다.
신분 위장이니, 데이터베이스 위조니 심상치 않은 말들이 나온 직후였기에 더욱 긴장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잔뜩 긴장한 두 명을 빤히 바라보며, 마녀는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여러분.”
“어, 그.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다희의 존댓말을 처음 들어 본 유민이 그 생소함에 쓴웃음을 짓는 동안,
시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유민에게 미리 들어서 알겠지만,
나는 리퀴드 위치, 최시영이에요. 일단 A급이구요.”
“컴뱃울프 강다희입니다. C급입니다.”
“쉴더 유서울입니다! 등급은 D에요!”
마녀의 자기소개에 둘 역시 얼른 자신들을 소개하며 준비해 온 명함을 꺼냈다.
시영도 예의 블랙 카드라고 불리우는 검정색 명함을 바지 주머니에서 두 장 꺼내어 잠시 그들과 명함 교환식을 가졌다.
말로만 듣던 블랙 카드를 접한 두 여헌터의 눈이 잠시 지진을 일으켰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리고 유민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마녀와 조심스레 대화를 나누었다.
솔루션에 대한 것과 밀크 길드의 창설 등등,
시영은 모두 팩트 체크를 해 줌과 동시에, 자신 또한 이 모든 일에 진심으로 임하고 있음을 밝혔다.
“물론 신입만큼은 아니겠지만요.
아무리 나라고 해도 유민의 탐구심은 못 이겨요.”
“아니, 마녀님까지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쟤는 대체….”
“유민아….”
“…분야가 달라서 그래.”
그 과정에서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 또한 서서히 풀리게 되어,
두 여헌터는 그제야 긴장의 끈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었다.
이내, 그들은 앞으로 진행할 던전 공략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얘기는 들었어요. 여기서 재료를 구해야 된다고.”
“아, 예. 파란색 바위꽃하고 그…. 유민아. 걔 이름 뭐였냐? 자꾸 까먹네.”
“블랙그레이 실키.”
“그래, 그거. 블랙그레이 실키라는 놈을 잡아야 됩니다.”
다희의 설명에, 마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으으음? 그 닭가슴살 말하는 거면, 마켓에 팔지 않나요?
뭔가 직접 사냥을 해야 되는 이유가 있나?”
“네. 사냥한 직후에 유민이가 마력을 주입해야 한대요.”
서울이 그렇게 갓 잡은 몬스터 부산물의 필요성을 설명해 주자,
시영은 모두 이해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확실히 노가다가 필요한 게 맞네요.”
“네에….
파란 바위꽃은 여기에 있는 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겠죠. 여기 필드에서 나오는 바위꽃은 다 분홍색이니까.”
“혹시 마녀님은 알고 계십니까?”
다희의 물음에,
마녀는 옅은 미소와 함께 나무가 우거진 평원으로 시선을 향했다.
“모르지만,
이제부터 알아 보려고 여기에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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