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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화 〉 엇갈렸던 자매와 새싹 탐구자 (5) (94/116)

〈 94화 〉 엇갈렸던 자매와 새싹 탐구자 (5)

* * *

“그래, 알았어.”

유민을 이 자리에서 퇴장시키게 되면,

자신과 언니는 제대로 된 대화조차 진행하기 어려울 터.

또한, 언니가 예전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으니,

유민이 지금의 상황에 훼방을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시현은 유민에게 흘끗 시선을 던졌다.

그 눈짓에 유민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맡겨달라는 듯한 그 모습에, 시현은 속으로 픽 웃었다.

그래. 유민이니까.

언니와 똑 닮은 순수함을 지닌 사람이니까 괜찮을 것이다.

시현은 다시 자신의 언니에게로 눈을 돌리며,

대화의 장을 열어갈 첫 마디를 신중히 골라내려 했다.

한 편,

시영의 머릿속에서는 한바탕 혼란이 펼쳐지고 있었다.

유민이 여기에 있을 수 있도록 시현의 허락까지 받아냈으니,

이제 자신의 동생과,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대화를 나눌 차례다.

허나,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는가.

하나 뿐인 소중한 가족을, 타인에 가까워질 때까지 방치하고,

자신의 일에만 신경 쓰며 동생을 고통 속에 내버려 둔 그 죄를, 그 잘못을,

대체 어떠한 말과 함께 사과해야 하는 것인가.

단지 미안하다고만 한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그것만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죄책감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어설픈 사과를 마주한 동생의 반응을, 자신이 버텨낼 수 있는가?

접착제가 발린 듯,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자꾸만 몸이 멋대로 떨려온다. 시야가 좁아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무섭다. 두렵다. 동생의 눈을 마주하는 것이 너무나 버겁다.

도망치고 싶다. 기어서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다.

공포에 질린 그녀의 사고가 탄식을 내뱉는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드는 생각이라곤 그저 이런 나약한 것들뿐이라니.

뭐가 탐구자고 뭐가 리퀴드 위치인가.

자신은 그냥 겁에 질린 한 명의 멍청이에 불과하다.

점차 두려움에 잠식당하며, 시영은 그렇게 자조적인 생각을 이어나갔다.

마음속으로 끈적한 공포가 밀려들어와,

그녀가 애써 지켜내고 있던 용기의 불꽃을 완전히 집어삼키려 든다.

“…?”

허나,

불꽃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두려움은 그녀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 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이, 시영의 주위를 맴돌면서도 치명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 했다.

문득,

그녀는 따스한 빛 한 줄기가 자신에게 비쳐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에 자그마한 의문을 느끼던 시영은,

머릿속에 흩어진 사고의 파편 중 하나가 유독 찬란히 빛을 내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서광이, 질척한 두려움에게서 시영을 지켜내 주고 있었다.

시영은 그 눈부신 파편을 집어 들었다.

어둡고 차가운 마음속에서 유일하게 따스한 온기로 자신을 감싸주고 있는 조각.

그녀는, 그 파편이 원래부터 자신에게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해 냈다.

찬란하고 따뜻한 빛 조각의 주인은,

유민이었다.

“…!”

시영은 맞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유민 또한 그녀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조금 더 굵은 줄기의 마력을 손으로 전달해 준다.

시영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 주는 그 열기에, 점차 가슴 속의 불꽃이 되살아난다.

그래.

유민이 자신의 옆에서 손을 잡아 주고 있다.

따스한 온기를 전해 주며, 자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고 있다.

자신과 함께 탐구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 눈부신 새싹의 호의를, 결코 저버려선 안 된다.

과거의 순수함을 되찾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든 간에,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

자신을 위해. 시현을 위해. 유민을 위해.

한 발짝 나아가야 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시영은 이를 까득 악물었다.

목에 힘을 주어, 자꾸만 아래로 숙여지려는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막대한 두려움에 탁해져 있던 그녀의 자색 눈동자가 점차 총기를 되찾는다.

말해야 한다.

그것이 탐구자로서의 길이든, 동생과의 관계이든 간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 결코 나아갈 수 없다.

말하는 거다.

한 마디로 부족하다면 몇 번이고 자신의 마음을 전해 주는 거다.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입술을 벌리고,

뻣뻣한 혀를 구부려,

성대를 진동시킨다.

“미, 안해…!”

“…!”

자신보다 먼저 입을 연 언니의 모습에,

시현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언니가, 미안해…!”

그것은 시현이 방금 전에 들었던,

포식자 앞의 초식동물처럼 공포에 젖어 있는 나약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시영의 억눌린 어조에는,

진하디 진한 감정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그녀가 결코 드러낼 수 없다고 자조하던 그 농밀한 감정이, 한껏 담겨 있었다.

“언니가…!

내가 잘못, 했어…!!”

엇갈린 관계에 대한 슬픔.

그 관계를 촉발시킨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다시금 동생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 기쁨.

“시현이 마음을,

언니가 몰라줘서 미안해…!!”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아울러 뒤섞인, 거대한 하나의 감정.

“미안해, 시현아…!”

유일한 가족에게 향하는,

애정이었다.

“정말로 미안해에…!!”

그 농밀한 감정이, 시영의 두 눈에서 넘쳐흐른다.

볼을 타고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려, 턱 끝에서 방울져 떨어진다.

그에 시영은 황급히 소매로 얼굴을 문질러 눈물을 훔쳐낸다.

뭐가 잘났다고 울음을 터뜨리는가.

가해자는 자신이란 말이다. 눈물 같은 걸 흘릴 자격 따윈 없다.

눈물을 그치고, 어서 사과를 전해야 한다.

타인에게도 잘못을 하면 고개를 숙이는 마당에,

하나뿐인 가족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신의 죄는 너무나 크다.

설령 용서받지 않아도 좋다. 욕설과 폭행도 받아들일 것이다.

그저,

자신의 진심을 담아서, 이 마음을 한껏 목소리에 담아서,

소중한 동생에게 전해 주는 거다.

이를 악물고 애써 울음을 삼켜내며, 시영은 의지를 불태웠다.

눈가로 넘쳐흐르는 감정을 참아내느라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다시 자색 눈동자에 용기의 불꽃을 담아내며 얼굴을 들었다.

사과의 말을 건네기 위해 입을 열었다.

“…!”

허나,

열린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일은 없었다.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선 시현이,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에 시영이 뭐라 하기도 전에,

동생은 언니에게 몸을 날렸다.

시영은 주먹이나 손바닥이 날아올 것을 예상하고, 눈을 감았다.

그래.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도 괜찮아.

­풀썩!

“?!”

허나,

그녀는 고통 대신에 자신의 몸이 뒤로 휙 밀리는 감각을 느꼈다.

상반신이 침대 위로 털퍽 쓰러지는 미약한 충격과, 자신의 위에서 느껴지는 무게감.

그에 숨을 작게 토해낸 시영이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려 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위로 올라탄 채,

팔을 등 뒤로 둘러 꼬옥 껴안고 있는 시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현의 어깨가 간헐적으로 들썩인다.

동생의 얼굴이 파묻혀 있는 봉우리가 조금씩 젖어 간다.

윽, 끄윽. 하고 억눌린 울음소리가 그 안에서 새어나온다.

그에 시영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크게 당황했다.

동생이 자신의 품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건 정말 오래간만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손을 들어 시현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시, 시현아…. 울지 마….”

허나 그 말에, 시현은 언니를 껴안은 팔에 더 힘을 줄 뿐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시영의 시선이, 문득 유민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진중한 표정으로 시영을 지켜보고 있던 유민은,

그녀와 맞잡고 있던 손을 들어 보였다.

그에, 시영의 자색 눈이 순간 크게 뜨여졌다.

유민의 손은, 비어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있던 자신의 손은,

어느 새 시현의 목어깨를 상냥히 감싸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마음은 더 이상 두려움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의 손을 통해 전해지던 온기가 가슴 한 구석에 싹을 틔운 것이다.

어느새 조그맣게 자리 잡은 의지의 불씨가, 부정적인 감정을 몰아내고 있었다.

시영이 그것을 확인하고 놀란 기색을 표하자,

유민은 미소를 지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지만,

탐구자였던, 그리고 탐구자로 돌아가려는 그녀는 새싹 탐구자의 눈빛에 얽힌 의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시영 또한 미소를 지었다.

다시금 촉촉해지는 자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동생을 되찾은 그녀의 감사 인사에, 유민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언니가 동생을 다독이는 소리를 뒤로 하고, 유민은 조용히 시현의 집을 나섰다.

그녀들과 해야 할 이야기는 꽤나 많았지만, 지금은 자매끼리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이다.

헌터밀크에 미쳐 있는 유민이라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들 간의 관계 개선이 밀크 길드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이나 다름없었기에,

없는 눈치를 만들어 내서 한 발 물러나는 판단을 내린 것에 가까웠다.

내일, 누구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누가 먼저 자신에게 연락을 해 올 것인가.

유민은 그런 사소한 고민을 하며, 천천히 자신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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