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엇갈렸던 자매와 새싹 탐구자 (4)
* * *
회사가 일류 기업으로 우뚝 올라섬과 동시에,
동생이 그녀에게서 떠나갔다.
실의에 빠져 괴로워하며, 그녀의 속은 계속해서 타들어가고 있었다.
허나 측근들과 전문가들은 그런 가정사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포션의 매출과 회사 경영에 있었다.
옛날의 순수함 같은 사소한 것은 오직 시영 본인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래서, 시영은 유민을 만나 기뻤다.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은 탐구자의 새싹.
유민이라면 그녀 대신 시현을 대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허나,
유민은 자신의 예상을 깨 버리는 행보를 보여 주었다.
그는 단지 그녀의 의사를 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영의 손을 잡아 따스한 온기를 전해 주며, 굳은 의지를 드러내 보였다.
시현과의 대면이 두려울 때, 도망치고 싶을 때,
자신이 그녀와 함께 해 주겠다며 진중한 목소리를 건네주었다.
그저 시현을 데려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겠다고 말해 주었다.
찬란한 의지를 불태우는 눈빛으로,
새싹 탐구자는 탐구자였던 것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당신의 과거를 되찾기 위해,
그 길을 함께 걸어 주겠노라 외치고 있었다.
“아…”
그녀의 동생 외에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그리고 남자에게는 생전 처음으로 받아보게 된 그 순수하고 눈부신 호의에,
차갑게 식어 있던 마녀의 뺨이 조금씩 열기를 품기 시작했다.
얼굴을 살짝 붉힌 채 유민의 눈을 멍하니 쳐다보던 마녀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상대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어, 으음… 그러니까, 도와주겠다는 거죠?”
“네. 동생 분을 독대하는 게 힘드시다면,
제가 양해를 구하고 같이 있어드리겠습니다.”
“…”
그 말에, 시영의 머릿속에서 다시금 동생과의 시뮬레이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시현이의 차가운 얼굴을 마주한 채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자, 또 다시 두려움이 마구 밀려들어온다.
그에 어깨를 움찔 떨면서도,
마녀는 단 둘만이 존재하는 그 공간에 유민을 배치해 보았다.
동생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 하고 벌벌 떨고 있는 자신의 옆에서, 유민이 손을 뻗어 자신의 손을 맞잡아 준다.
따스한 온기가 손을 타고 전해지며 그녀의 마음에 안정감을 준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이, 그가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유민의 그런 모습에, 자신은…
“…!”
상념에서 깨어난 시영이,
고개를 들어 유민을 마주 보았다.
신비로운 기운이 담긴 자색 눈동자.
거기에 서려 있던 두려움이 확연히 옅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유민이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결정하셨나요?”
“…그래요.”
유민의 물음에 시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는 무척이나 어렵겠지만, 유민이 함께 한다면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만나러 갈게요, 우리 시현이.”
살짝 떨리기는 했지만 확연히 기운을 되찾은 목소리로,
마녀는 그렇게 동생에게 한 발짝 나아가 볼 것을 선언했다.
유민은 그에 미소 띤 얼굴로 시영의 두 손을 감싸고 있던 자신의 손을 거둬들였다.
그의 손이 떠나가자 자연스레 밀크 테라피를 응용한 기술 역시 중단되어,
시영은 더 이상 그 따스한 온기를 느끼지 못 하게 되었다.
“아…”
저도 모르게, 아쉬움이 담긴 탄성을 작게 흘리는 마녀.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려도, 그 따뜻한 감촉은 점차 식어만 가고 있었다.
조금 더, 잡고 있어도 괜찮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본인의 손을 내려다보던 시영은,
유민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마녀님?”
“…!”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린 마녀는,
살짝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요. 그럼 가 볼까요?
시현이가 어디서 만나자고 했어요?”
“본인의 집입니다.”
“집…”
동생의 집으로 간다니.
살짝 헛숨을 들이킨 마녀의 머릿속으로 다시금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허나 그녀는 유민에게 전해 받았던 온기를 떠올리며,
애써 공포를 떨쳐내고 유민과 함께 공방을 나섰다.
폴라 크롭티 위로 가디건을 걸친 시영은,
유민의 인도를 따라 시현의 집으로 향했다.
동생의 주소는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이렇게 실제로 찾아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헌터가 위험한 던전을 공략하듯이, 비장한 마음으로 걸음을 내디디는 시영.
하지만 마음속에 내재된 공포를 그리 쉽게 이겨낼 수는 없는지,
시현의 집이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시영의 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곁에서 그런 마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유민은,
그녀와 가까운 쪽의 손을 조심스레 뻗어, 시영의 가녀린 손을 감싸 쥐었다.
마녀가 그에 흠칫 놀라기도 잠시,
손을 통해 전해져 오는 따스한 온기가 자신의 마음을 점차 안정시켜 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걸음을 주춤거리게 만들던 두려움이, 그 따뜻함에 조금씩 녹아내린다.
그에 시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유민에게 붙잡힌 쪽의 손가락을 움직여, 그의 손을 제대로 맞잡았다.
“…시현이네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이제 곧 있으면 도착합니다.”
괜한 부끄러움에 그런 질문을 던지며,
시영은 유민의 손을 꼬옥 잡은 채 다시금 목적지를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원룸 빌라의 계단을 오르는 동안,
마녀는 뒤돌아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몇 번이나 휩싸였다.
그녀의 숨이 가빠질 때마다 유민이 다독여준 덕에,
시영은 마침내 동생이 살고 있는 집의 현관문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유민의 손을 맞잡고 있던 시영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유민 또한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는다.
마녀는 유민과 손바닥을 밀착한 채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긴장감에 터져 버릴 것만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이 문을 열면, 자신의 동생을 만나게 된다.
지레 겁을 먹고 다가서지 못했던 자신의 가족과,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후우…”
몇 차례 심호흡을 한 뒤에야,
시영은 유민과 맞잡지 않은 쪽의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초인종을 꾸욱 눌렀다.
날카로운 차임벨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시영의 머릿속에 쩌렁쩌렁 울려 댔다.
긴장에 의해 극도로 민감해진 헌터의 감각이,
이 쪽을 향해 타박타박 걸어오는 발소리를 감지한다.
“으, 읏…”
시영은 저도 모르게 유민과 잡고 있는 손을 그녀 쪽으로 당겨,
그의 팔을 꼬옥 끌어안았다.
마녀의 압도적인 젖가슴에 유민의 팔이 포옥 파묻힌다.
그녀의 거대한 유육이 사내의 팔에 꾹 눌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뭉개진다.
자신의 팔에 부드럽고도 탄력감 있는 압력이 가해지자,
유민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허나 입 밖으로 말을 꺼내어 내색하지는 않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몸으로부터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현관문이 덜컥 열렸다.
그에 흠칫한 시영이 유민에게 거의 매달리듯이 몸을 붙여 왔다.
커다란 유방이 유민의 몸에 눌려 마구 일그러졌지만, 두 남녀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열린 문 사이로, 시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니와 닮았지만 조금 더 차가운 인상의 그녀가 유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돌려,
유민의 옆에 꼭 붙어 있는 자신의 언니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시영의 자색 눈동자는, 본인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듯이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용케 눈을 피하지는 않고, 그 행동에 대한 용기를 얻고자 하는 것처럼 옆에 서 있는 유민에게 반쯤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 언니를 빤히 쳐다보던 시현은,
이내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가며 한 마디를 남겼다.
“들어와요, 둘 다.”
시영과 유민은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았고,
시현은 의자를 끌고 와서 그런 그들을 마주 보는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가슴 밑으로 팔짱을 낀 채,
동생은 자신의 앞에서 조금씩 떨고 있는 언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언니의 얼굴에 반가움이 솟아오르고,
자신의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 모습에 안쓰러움이 차올랐다.
하지만 시현은 그러한 감정을 머릿속에서 치워냈다.
자신은 아직 언니를 용서할 수 없었다.
우선, 그녀는 먼저 유민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로, 데려왔네요.”
“네. 물론 언니 분을 강제로 모셔온 건 아닙니다.”
“그렇겠죠. 당신이 끌고 온다고 해서 순순히 끌려올 사람도 아니고.”
시현은 그렇게 말하며,
여전히 굳건하게 맞잡고 있는 시영과 유민의 손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시영이 흠칫했지만, 결코 유민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가시방석보다 더한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언니의 모습에, 시현은 다시금 유민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혼자 오는 건 무서워서 당신을 데려온 거 같은데, 맞아요?”
“제가 먼저 제안했습니다.
동생 앞에 서는 게 두려우시다면, 같이 있어 드리겠다고.”
진심을 부딪친다는 게, 그런 뜻이었나.
하기야, 그런 눈을 하고 있으니. 유민과 언니 사이에도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었을 터다.
속으로 납득하는 한편, 약간의 불쾌감이 느껴지는 시현이었다.
허나 그 대상이 누구인지 명확하지도 않은, 스쳐 지나가는 감정에 불과했기에,
시현은 그것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말했다.
“…그럼, 나랑 이 사람이랑 얘기할 때도 계속 옆에 있으려고요?”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에 시현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비록 자신들의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기는 하지만, 유민은 엄연한 타인이었다.
그가 보는 앞에서 가족 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부정의 뜻을 표하기 위해 시현이 입을 여는 순간,
“시, 읏, 시현…아.”
“…!”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침내 다시 듣게 된 언니의 부름.
시현의 마음속에 울컥하는 감정이 차올랐지만, 그녀는 그 감정을 애써 가라앉히며 시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동생과 눈을 마주친 언니는 흠칫 몸을 떨었지만,
어떻게든 입을 열어 더듬더듬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신입, 아, 아니, 그… 유민은…
옆에 있게, 해 주면… 안될, 까?”
“…”
불안한 눈초리로 유민의 손을 꼬옥 부여잡고 그렇게 말해 오는 시영의 모습에,
시현은 유민과 언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후우…”
자신에게 얼마나 커다란 죄책감을 느끼고 있기에,
얼마나 거대한 두려움을 품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이기에,
의지할 대상이 없으면 자신의 앞에서 버티고 있을 용기조차 내기 힘들어하는 것인가.
독하게 먹고 있던 마음이 자꾸만 풀어지려는 느낌에, 시현은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알았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