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늑대와 헌터 마켓 (4)
그렇게 한층 친밀해진 대화를 나누며,
다희와 유민은 신발 매장을 돌아다니면서 가성비 괜찮은 녀석을 이것저것 골라 보았다.
“오... 야, 이게 제일 괜찮은 거 같은데.”
“그런가?”
그리고 잠시 후, 유민의 새로운 신발이 결정되었다.
시착을 위해 유민의 두 발에 신겨져 있는 어두운 색의 작업용 부츠.
유민은 주머니투성이인 상하의와 이 부츠를 머릿속의 마네킹에 입혀 보았다.
그러자, 실용성에 올인하여 투박하기 그지없는 짐꾼 한 명이 완성되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가방 맨 백수로는 보이지 않을 테니, 거기에서 위안을 얻자.
그렇게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은 유민이 신발을 다시 벗어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유민에게서 상자를 받아든 다희가 북슬북슬한 늑대 꼬리를 살랑이며 계산대로 걸어갔다.
그녀의 커다란 골반과 엉덩이가 씰룩거리며 유민을 유혹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턱을 쓰다듬으면서, 이다음으로 갈 곳에 대해 의식이 쏠려 있을 뿐이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유민의 모습에 픽 웃은 다희.
그녀는 손에 든 신발 상자로 유민의 팔을 툭툭 쳐 그를 상념에서 깨웠다.
“야, 유민. 멍 때리지 말고 받아.”
“어? 응.”
상자를 전달받은 유민은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다희를 보며 선한 미소를 지었다.
헌터밀크를 논할 때의 유민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순박한 모습.
그것에 다희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고마워, 누나. 이렇게 신발까지 사 주고...”
“뭘, 아까 말했잖아. 투자라고.”
“말이 투자지, 이거는-”
“에헤이, 그럼 도로 뺏을까? 반납해 임마.”
“감사히 받겠습니다.”
싫으면 내놓으라는 듯 까닥거리는 다희의 손짓에,
유민은 슬그머니 신발 상자를 가방 속으로 숨겼다.
그런 유민의 행동에 다희가 꼬리를 만족스레 휘두르며 킥킥 웃었다.
“그래, 그래. 모처럼 사준 거니까 제대로 팍팍 써라?”
“...어? 아껴 쓰라는 게 아니고?”
“뭐래. 헌터 장비 아꼈다가 죽을 일 있냐?
이런 거 선물 받으면 망가질 때까지 잘 써먹어 주는 게 예의인 거야.”
“아... 그런 거였어?”
“엉. 그런 거야.”
다희의 설명으로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된 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신발 상자를 넣어 조금 더 무거워진 가방을 등에 매었다.
만족스러운 장비 쇼핑이었다.
유민이 속으로 그렇게 한줄 평을 내리고 있을 때,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다희가 입을 열었다.
“신발도 맞췄는데, 이제 뭐. 더 할 거 있어?”
“아, 뭐를 더 살 건 아니고... 잠깐 둘러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이대로 헤어지는 건가 싶은 마음에 살짝 아쉬움을 느끼던 다희는,
유민의 말에 늑대 귀를 쫑긋 세우며 반색했다.
“그래? 그럼 가자. 몇 층인데?”
“어? 아니... 이거는 누나가 안 도와줘도 괜찮은데.”
사양의 뜻을 밝히는 유민의 대답.
그것에 다희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며 한층 사나운 인상이 만들어졌다.
“엉? 그런 게 어딨어.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야지.”
“아니, 그게...”
“갈 거지?”
누나랑 같이 가면 조금 묘해질 것 같은데.
라고 말하려던 유민은, 다희의 북슬북슬한 꼬리가 기대감을 담아 활기차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거절한다고 해도 억지로 따라올 기세였다.
그에 유민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하핫, 오케이.
근데 2층이면 생활용품 쪽인데, 둘러볼 만한 게 있나? 보관함?”
“어... 큰 의미로는?”
“뭔 소리야, 그게.”
유민의 애매한 대답에 궁금증만 더욱 커진 채 2층으로 내려온 다희는,
그가 방문한 섹션에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을 보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왜 유민이 자신과 같이 오지 않으려고 했는지,
큰 의미로 보관함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하였는지 말이다.
“...”
늑대 꼬리를 느리게 살랑거리며,
다희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진열대에 놓여 있는 물건을 흘끔 쳐다보았다.
무언가를 흡착할 수 있을 만한 넓은 깔때기.
몇 개의 장치, 그리고 관을 통해 깔때기와 연결되어 있는 투명한 병.
마력 전지를 넣을 수 있는 슬롯.
그것은 전동식 유축기- 다시 말해 헌터밀크를 조금 더 편하게 짜낼 수 있는 착유기였다.
유민과 다희는,
헌터밀크와 관련된 물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끙...”
다희는 왠지 모를 쑥쓰러움에 자신의 북슬북슬한 꼬리를 앞으로 내밀어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유민을 곁눈질하는 그녀.
그는 신중한 탐구자의 눈빛을 한 채,
유축기 하나를 집어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 유민의 모습에,
밝은 회갈색의 늑대녀는 다시 눈을 돌리며 끙. 하고 옅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만일 그녀 혼자서 이런 곳에 오게 되었다면,
다희는 헌터밀크의 배출에 이런 번거로운 기계까지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작은 의문을 품으며, 별 관심도 없이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다희는 혼자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본인 입으로 끝까지 함께 하겠다 선언했기에, 어디론가 도망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러한 도구와 기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일행은,
다희가 처음으로 친근한 관계를 맺게 된 ‘남자’였다.
다희를 누나라고 부르는 그가,
여헌터인 그녀의 곁에서 헌터밀크 착유기를 둘러보고 있는 모습.
마치, 유민이 다희의 젖가슴에 사용할 착유 도구를 고르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미묘한 그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유민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희와 함께 하는 것을 주저했지만,
결국 다희의 고집에 의해 이런 불미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냥 아까 연락처만 교환하고 헤어질 걸.
다희는 그렇게 후회했지만, 이미 버스는 저 멀리 떠나간 뒤였다.
옆에서 뭣 마려운 강아지 마냥 끙끙대고 있는 다희의 모습에,
아무리 헌터유에 진심인 유민이라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곳으로 갈까?”
“...어? 아니! 괜찮아, 괜찮아. 옆에 있을 거니까 볼일 봐.”
“아까 제대로 말해줄 걸... 미안해 누나.”
“야이씨, 내가 가자고 한 건데 왜 니가 사과를 해.”
내뱉은 말을 취소하는 것은 늑대의 자존심이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희는 그리 퉁명스레 대답하곤,
발갛게 물든 얼굴로 애꿎은 꼬리만 괴롭히며 눈앞의 유축기를 노려볼 뿐이었다.
“...”
하지만 그렇게 눈빛만으로 물건을 박살낼 것처럼 가만히 진열대를 보고만 있어 봐야,
유민에 대한 의식이 점점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다시 진중한 눈빛으로, 이번에는 헌터유 용기 보관함의 뚜껑을 열어 보는 유민.
황금빛 눈동자를 슬쩍 굴려 그런 유민을 훔쳐보던 다희는, 문득 방금 전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처럼 진지한 표정을 한 채,
명함에 배어든 자신의 냄새를 맡는 유민.
마음속의 늑대조차 얌전하게 만드는, 오직 그에게만 존재하는 맑은 눈빛으로,
자신의 매력과 엮어서 헌터밀크의 냄새를 칭찬하는 유민.
“...읏.”
또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늑대의 본성이 자꾸만 유민을 인정하라며 항의를 보내고 있었다.
괜한 것을 떠올렸다고 생각하며, 숨을 길게 내쉬어 마음을 가라앉혀 보는 다희.
하지만 그녀가 현재 처한 상황- 유민과 헌터밀크 섹션에 있다는 자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민의 깊고 순수한 눈과, 자신의 헌터밀크 냄새가 배어든 명함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
그러다가 돌연,
다희는 헛숨을 삼키고 말았다.
자신의 체취. 헌터밀크의 향기.
그것은 유민에게 준 명함뿐만 아니라, 지금 자신의 몸에서도 계속해서 풍겨 나오고 있을 터.
자신의 냄새이기에 익숙해지기는 하였으나, 늑대의 후각은 그 고소한 향의 존재를 충분히 인지하고
그 냄새는 확실히 집업을 뚫고 새어나와, 지금도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헌터유 용품을 보고 있는 유민의 곁에 붙어 서서,
그가 좋아한다던 헌터밀크 냄새를 열심히 전해 주고 있었던 것인가?
“윽...?!”
저도 모르게 유민을 냄새로 유혹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다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개졌다.
그녀의 꼬리가 흥분감에 바짝 치켜들어지고, 늑대 귀 또한 꼿꼿이 세워졌다.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다희는 서둘러 몸을 움직여 유민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
하지만,
그녀의 발이 당최 떨어지지를 않았다.
하반신이 다희의 의지를 거부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체 왜?
라고 스스로에게 따져묻고 싶었으나,
다희는 이미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늑대로서의 그녀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시동을 건 것이다.
수컷들과 타의적, 자의적으로 격리되다시피 한 암컷 늑대는 무척이나 파트너에 굶주려 있었다.
오늘 처음 본 남자에게 무슨 파트너를 운운하는 것인가.
다희는 속으로 그렇게 버럭 화를 내며 다리를 움직이려 애썼다.
누구보다 자신의 냄새를 좋아하는 남자에게서 왜 거리를 두려는 것인가.
마음속의 늑대는 그렇게 마주 화를 내며 다리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본능의 일갈에, 순간 받아칠 말을 생각지 못해 다희가 머뭇거리는 동안,
다희의 몸은 그녀의 이성을 기다려주지 않고 옆으로 슬쩍 한 발짝을 옮겼다.
유민과 떨어지기는커녕, 한층 더 가까워진 것이다.
“...!!”
다희는 황급히 유민의 모습을 곁눈질해 살펴보았다.
유민은 별다른 반응 없이 헌터밀크 용기 보관함의 안쪽 재질을 확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늑대의 뛰어난 눈이 단 하나의 자그마한 특이점을 발견하고 말았다.
유민의 코 부분이, 작게 씰룩인 것이다.
그것은 보통 후각에 변화가 생겼을 때 일어나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다희는 그 변화가 어떤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냄새를 더욱 짙은 강도로 유민에게 전해 주고 있다.
농밀한 암컷의 향기를, 우수한 수컷에게 넘겨주고 있다.
그런 자각에, 다희의 얼굴뿐만 아니라 몸까지 점차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다희의 머릿속을 흥분감이 좀먹어 갔다.
가슴에서 나온 젖의 향기를 유민에게.
그윽하고 고소한 젖의 냄새를 수컷에게.
체취와 섞인 그 진득한 내음을 파트너에게!
다희의 손길에서 벗어나 천천히 살랑거리던 꼬리가,
스르륵 한쪽으로 치워지며 반바지형 레깅스에 감싸인 탄탄한 엉덩이를 드러냈다.
저절로 벌어진 그녀의 입에서, 거친 맹수의 숨소리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게슴츠레하게 뜨여진 다희의 눈매.
그 속의 황금빛 눈동자가 샛노랗게 빛났다.
수컷에 굶주린 암컷 늑대의 몸이 강제로 발정기에 돌입하려는 그 때,
누군가의 침착한 목소리가,
한층 민감해진 그녀의 감각을 꿰뚫었다.
“-나, 다희 누나?”
“...캬앙?!”
그에 화들짝 놀라, 다희는 선 자리에서 살짝 공중에 떠올랐다.
갑작스레 짓쳐들어온 외부의 자극에 깜짝 놀라게 되자 머릿속을 한차례 환기시킬 수 있었던 그녀는, 잽싸게 유민에게서 거리를 두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격한 반응에 덩달아 놀란 유민이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한 기색을 표했다.
“다희 누나, 왜 그래? 괜찮아?”
“어, 어어? 아, 엉. 괜찮어.”
노랗게 빛나는 눈을 깜빡이며 잠시 몸을 추스른 다희는,
이내 멋쩍은 듯 유민에게로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너이씨, 왜 갑자기 부르고 그래. 사람 놀라게.”
“아니... 내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
“...그랬냐?”
“그랬어.”
유민의 말에, 다희는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손을 들어 거친 움직임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파트너, 아니. 옆 사람 목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혼자 발정을 해?
이게 사람새끼야, 짐승새끼야.
다희는 그렇게 자괴감에 몇 번이나 얼굴을 손으로 문질러 댔다.
잠깐 뒤, 조금 개운해진 표정이 된 다희가 입을 열었다.
“그랬구만. 그건 내가 미안하다.
근데 왜 불렀던 거야?”
“그... 이쪽은 다 봤으니까, 옆으로 이동하려고.”
“...여기가 끝이 아니었어?”
다희의 허망한 표정을 읽은 유민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니 뭐... 여기서 끝내도 되는데.”
“하... 아냐, 아냐. 마저 봐.”
다희는 잠시 이마를 손으로 짚더니,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말했다.
무언가 비장해 보일 정도의 그 모습에 유민이 속으로 의문을 표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유민의 뒤를 따라가던 다희는,
날카로운 늑대의 눈으로 주위를 한 번 살펴보았다.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녀는 한쪽 손을 아래쪽으로 가져가,
반바지 레깅스- 스패츠에 감싸인 허벅지 사이의 둔덕 부분을 살짝 훑었다.
“크흣...”
아직도 민감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다희의 몸.
고간에서 전해지는 찌릿한 자극에 그녀는 꼬리를 순간 바짝 세웠다.
그와 동시에,
다희는 스패츠 안쪽이 이미 질구에서 흘러나온 애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검은 걸로 안 입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 축축한 느낌에 작게 몸서리를 치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개 씹, 진짜.”
“어?”
“아, 암것도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