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안내원과 두번째 기회 (2)
서울이 몸을 씻는 동안, 유민은 그녀가 입을 만한 옷을 뒤져 보았다.
바지는 적당한 것이 없었고, 대신 큼지막한 티셔츠 하나가 그의 손에 잡혔다.
“선배님. 입을 옷은 문 앞에 둘게요.”
“아, 응! 고마워!”
화장실 문 너머에서 그런 대답이 들려오고 난 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서울이 유민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유민의 커다란 티셔츠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사이즈가 꽤나 큰 지라, 허벅지로 내려오는 밑자락은 이전의 오버핏 셔츠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거나 조금 더 긴 느낌이 들었다.
“다 씻었어, 후배님.”
“네. 금방 씻고 나오겠습니다.”
유민이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몸에서 김을 내뿜으며 속옷 차림으로 방에 들어서자,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 한 서울의 모습이 유민의 눈에 들어왔다.
“선배님, 뭐 찾으세요?”
“어? 으응, 그... 내 바지가 안 보여서.”
“...”
서울의 대답에, 유민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어제의 그녀는, 문자 그대로의 하의실종 패션을 하고 자신의 집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미션의 부작용으로 이성이 희미해져, 기억을 하지 못 한 것인가.
유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깐 말을 꺼내길 주저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 선배님?”
“응?”
“어제... 하의실종 차림으로 오셨습니다.”
“으응. 그건 기억해. 오버핏에 후드자켓 입고 왔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서울의 대답에, 유민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실제에 비해 상당히 왜곡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선배님.”
“응.”
“그, 하의실종이... 말 그대로의 그거였습니다.”
“으응, 그래? 말 그대로...”
매트리스 밑을 슬쩍 들춰 보며 별 생각 없이 중얼거리던 서울은,
쩍. 하는 효과음이 어울릴 정도로 한순간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말 그대로의 하의 실종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믿기 싫어지는 결론을 머릿속으로 내린 서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언가 여러 가지의 감정이 마구 뒤엉킨,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지? 진짜로?”
“...”
허나 서울은 보고야 말았다.
유민의 진지한 얼굴과,
일말의 존엄성은 지켜주겠다는 듯한 침묵을.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 서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한 손을 펼쳐 눈가를 감쌌다.
여러 가지의 의미로 답이 없음을 깨달은 자의 제스처였다.
그녀의 입에서 희미한 흐느낌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미친년... 미친년...
서울의 수치심이 희미해졌다고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유민과 단둘이 있을 경우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 밖의 행위에 대한 피드백은 달라진 것이 없기에,
서울은 자신이 수컷에 미쳐 팬티도 안 입고 보지에 바깥바람을 쐬며 유민의 집으로 달려왔다는 것에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
옷 하나도 똑바로 못 입어서 마지막까지 골탕을 먹이는 내면의 암컷에게 쌍욕을 날리며,
서울은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유민은 그 너머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의 모습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앞으로 서울의 욕구를 반드시 적절한 시기에 해결해 주리라 다짐했다.
“하아...”
헌터의 강인한 의지로 정신력 복구에 성공한 뒤, 그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바닥에 놓여 있는 스마트폰이 서울의 눈에 들어왔다.
그 네모난 형태에서, 서울은 어렵지 않게 자신의 타워 실드를 연상시킬 수 있었다.
잠깐.
내 방패?
생각의 흐름이 거기까지 흘러간 서울은,
머리에 번개가 떨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무릎걸음으로 스마트폰에 달려들었다.
그것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녀석의 화면이 켜지며 현재 시각이 표시되었다.
11시 35분이라는 문구를 보게 된 서울은 경악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어?! 잠깐만, 나 가봐야겠다!”
“네?”
갑작스러운 그녀의 기행에 놀란 눈치를 하고 있던 유민이 그렇게 묻자,
서울은 자신의 후드 재킷을 허겁지겁 걸치며 빠르게 말을 쏘아냈다.
“헌터유 등급 심사도 신청해야 되고, 방패도 가서 정비 맡겨야 돼!”
“어...”
서울의 설명에 유민은 그녀가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알 수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밑에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아.”
유민의 말에, 순간 멈칫한 서울은 허리를 숙여 상의의 밑자락을 확인했다.
유민의 티셔츠는 충분히 컸기에, 허벅지 위까지 충실하게 옷자락 안으로 감추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는 어제의 하의실종룩과 별 차이가 없었다.
문제는 정말 하의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것까지 동일하다는 점이다.
“...”
셔츠의 밑자락을 손으로 꾹꾹 잡아당기며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취하던 서울은,
이내 다시 허리를 펴고 유민을 지나쳐 현관으로 걸어갔다.
물론 부끄러움은 여전했지만, 서울에게는 목숨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실드였다.
방패를 위해서라면, 잠깐의 수치심 정도는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을 터.
서울은 그렇게 생각하며 각오를 다졌다.
“...어차피 집까지 금방이니까, 조심하면서 갈게!”
“아, 네.”
신발을 신은 서울은 비장한 표정을 하고 현관으로 나가려다가,
잠시 멈칫하고 고개를 돌려 유민을 바라보았다.
“후배님도 같이 갈래? 밥 사줄게.”
“아, 마음은 감사하지만...”
유민은 그렇게 운을 띄우며, 엄지로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어젯밤부터 새벽까지 이어진 격렬한 정사로 인해 난장판이 된 방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일단 방부터 정리해야 될 것 같습니다.”
유민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그 광경을 본 서울은, 슬며시 몸을 돌렸다.
“...못 도와줘서 미안.”
“아니에요. 늦기 전에 얼른 가 보세요.”
“으응, 그럼 다음주에 봐!”
그 말을 남기고, 서울은 현관문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현관 쪽을 바라보고 있던 유민은, 그제서야 떠오른 사실에 아. 하고 탄식을 흘렸다.
진작에 3급 회원이 되었음에도,
솔루션에 관해서 아무것도 이야기를 하지 못 했다.
하지만 지금의 유민은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안내원과의 약속까지 남은 시간은, 협회까지 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2시간 가량.
그 안에 난장판이 된 방을 정리하고, 매트리스를 빨고, 점심까지 해결해야 했다.
일단 움직이자.
유민은 그렇게 판단하고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팔을 걷어붙였다.
어찌어찌 시간을 맞추어 모든 것을 끝마치고,
이전과 비슷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다시금 헌터 협회 제4광진지부 앞에 도착한 유민.
벌써부터 후각을 조금씩 건드리는 헌터밀크의 달달한 내음이 유민을 자극했다.
언제 맡아도 머릿속을 자꾸만 흐리게 만드는 향기였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향일 수 있지만,
유민에게는 항상 각별한 것이었다.
유민은 그 미향에 고개를 작게 저으며 지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거침없이 2층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슥.
그러던 도중,
한 명의 헌터가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
이내 유민의 후각에,
꽤나 이질적인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아니.
이 향기에 섣불리 이질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일 수는 없었다.
헌터밀크의 맛과 향은 개인차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달콤함을 베이스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금 유민의 코에 포착된 것 역시 어느 정도 유당의 존재감이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지금의 냄새에서 달달한 쪽은 어디까지나 구색만 갖추고 있을 뿐, 그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 하고 있다.
그보다 더한,
훨씬 더 커다란 녀석이 거의 모든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곡물류와 견과류가 섞여 들어간 듯한,
거칠다고 표현해도 괜찮을 정도로 강렬한 고소함이었다.
녀석은 달콤함이라는 베이스와 섞이려 들지 않았다.
오직 자신을 강조하는 받침대로 사용하여, 본연의 존재감을 난폭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보관용기 반납을 위해 협회 지부를 드나들며 고소한 향이 섞인 헌터밀크의 내음은 몇 번 접해 봤지만,
이런 식의 그윽한 향기는 처음 경험해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 모든 감상은 유민의 머릿속에서 매우 짧은 순간에 이루어졌다.
언제나 헌터밀크에 진심인 유민의 뇌가, 후각으로 녀석을 감지하고 즉시 분석하여 내놓은 결과물이었다.
“...!”
그 새로운 향기에 약간의 놀람과 흥분을 느낀 유민은, 슬쩍 눈을 돌려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고소한 향의 헌터를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의 스쳐감이었기에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밝은 회갈색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등허리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머리칼의 느낌은 짐승의 갈기와도 비슷했다.
거기에 머리 위로 빳빳이 솟아 있는 개과 동물의 귀와,
엉덩이 근처에서 살랑거리는 복슬복슬한 꼬리까지.
수인형 각성자.
그렇게 흔한 케이스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신기하게 여길 만한 것 또한 아니었다.
유민 역시도 그런 외형적인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입에 군침이 돌게 만드는 상대의 향기에 흥미가 이끌렸을 뿐이다.
밝은 회갈색의 수인형 헌터와, 그녀가 풍기는 헌터밀크의 향기.
그 매치가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감상평을 뒤로 하고, 유민은 조용히 그녀를 지나쳐 갔다.
상대가 이 지부를 출입한다는 것은 유민과 비슷한 구역에서 활동한다는 뜻.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유민은 그런 막연한 감상에 젖은 채, 계단을 모두 올라 2층에 도달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2층의 프런트.
그곳에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거유의 미인 안내원이 앉아 있었다.
단추가 끝까지 단정하게 채워져 있는 흰색 블라우스.
그리고 그 하얀색 옷자락에 온전히 담겨진 채, 프런트 위에 얹힌 커다란 봉우리.
젖가슴의 첨단에 부착된 주머니- 밀크커버가 촉촉하게 젖어 그 너머의 분홍빛을 내비쳤다.
프런트에 몸을 슬쩍 기댄 채 고개를 돌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있던 안내원은,
유민의 인기척에 시선을 옮겨 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 움직임에 그녀의 유육이 작게 흔들림을 보였지만, 크기가 크기인지라 그 상하 운동은 유민의 눈에 확연히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매력적인 오피스 룩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묶음머리의 그녀.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 인상은 그대로였지만, 그가 보기에 이틀 전보다는 나아져 있었다.
유민이 프런트 앞에 당도하자,
안내원 최시현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입술을 벌려 담담한 목소리를 내었다.
“어떤 용무로 방문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