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4등급 헌터와 초짜 짐꾼 (2)
우윳빛 머리칼의 실더와 밀크마스터는 이내 게이트를 통과해 던전에 입장했다.
게이트를 처음 접한 유민으로서는 공간 이동 시에 무언가 조금이라도 부작용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살짝 불안했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저 시야가 잠시 일렁이더니, 깨닫고 보면 이미 던전 속이었다.
낡고 오래된 지하실의 느낌을 주는 실내. 이 곳 어딘가에 몬스터가 숨어 있다.
최하급이라지만 던전은 던전. 그 폐쇄적인 풍경에서 느껴지는 음산함에 유민은 저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다가 문득 뒤를 돌아본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어...?”
방금 그들이 통과했던 푸른빛의 게이트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유민의 당황 섞인 탄성을 포착한 서울이 고개를 돌려 라임빛 눈동자로 유민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대강 그의 심정을 파악한 듯, 서울은 미소를 지었다.
“던전 안의 몬스터를 모두 없애야 게이트가 다시 열려요.”
“아.”
그러고 보니 인터넷에서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순간 당황했던 것이 부끄러워진 유민은 옆머리를 긁적이며 대충 화제를 돌렸다.
“그, 유서울 헌터님은 직업이 실더라고 하셨죠?”
“네! 이거 하나로 전부 해결하는 직업이에요.”
그러한 설명과 함께, 줄곧 등 뒤에 매달려 있던 그 거대한 무언가를 자신의 몸 앞으로 가져와 바닥에 세우는 서울.
쿠웅. 하고 매우 육중한 소리가 던전 안에 널리 울려 퍼졌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약간의 먼지와 함께 유민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대형 타워 실드.
그녀의 몸 대부분을 커버할 수 있는 크기의 흑색 직사각형 방패는, 테두리에 둘러진 은빛 금속을 제외하면 별다른 장식 없이 견고한 이음새의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넌 못 지나간다. 라는 문구가 절로 생각날 정도로 든든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엄청 무거워 보이는데... 대단하시네요.”
“헤헤, 테두리 말고는 강철나무라서 그렇게 안 무거워요. 한 번 들어 보실래요?”
“음. 그럴까요?”
강철나무가 뭐지. 대충 강철만큼 단단한 나무라는 뜻인가.
유민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방패 앞으로 다가가 발 사이를 넓게 벌리고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목장갑 낀 두 손으로 방패의 양 옆구리를 굳게 붙잡았다.
D급 헌터의 타워실드이니, 당사자가 가볍다고 해도 F급 헌터인 유민에게는 무거울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은 D급과 F급의 격차를 대강이나마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수년간의 막노동과 아르바이트로 다져진 근육이 유민에게 힘을 실어준다.
그래도 나 역시 각성자인데. 조금이라도 바닥에서 떨어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유민은 그런 마음으로 전력을 다해 자신 앞의 대형 방패에게 힘을 실었고,
그 직후 경악하여 자기도 모르게 이 악문 발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으억, 무야-!”
“아하하하!”
꿈쩍도 하지 않는 방패와 씨름하던 그의 괴성에, 방패의 주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에게 골탕 먹은 것을 깨닫고 뒤로 물러난 유민이 양 손의 목장갑을 고쳐 끼며 투덜거렸다.
“아니, 이거 정말 나무 맞습니까?”
“헤헤헷, 강철나무 맞아요. 겉에는요.”
그럼 안쪽은?
유민의 표정이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지만, 서울은 그저 짓궂은 웃음을 머금은 채 유민이 방금 들어보려다가 나가떨어졌던 흑색의 타워 실드를 가뿐히 들어 등 뒤에 짊어맬 뿐이었다.
그리고는 유민에게 한 마디 던졌다.
“이제 긴장은 좀 풀리셨어요?”
그녀의 질문에, 유민은 그제서야 본인의 상태를 자각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던전의 살풍경한 모습에서 느껴지는 공포에 위축되어 있던 초짜 짐꾼. 그는 어느새 본래의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윳빛의 여헌터는, 모든 경험이 처음인 유민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장난을 쳐 준 것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헌터님 덕분에 한결 괜찮아졌네요.”
“헤헤, 그러면 다행이구요.”
그의 진심어린 감사에 서울은 배시시 웃었다.
가죽 갑옷에 가려져 있지만 여전히 압도적인 모습의 흉부만큼이나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유민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 상냥함 속에 숨겨진 살벌한 무력에 전율했다.
유민이 방패를 들어올리려 시도하면서 느낀 것은, 마치 일반인이 대형 트럭을 맨손으로 들어올리려 발버둥치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 압도적인 무게감에 유민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고작 2단계 위의 헌터임에도 이만큼의 격차가 난다면, 그 윗경지에 있는 강자들은 대체 얼마만큼의 괴물이라는 것인가!
실더에겐 방패 무게 조절 스킬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유민이 미지의 공포에 몸을 살짝 떨고 있자, 서울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한 번 더 장난을 쳐 줘야 하나. 하고 살짝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유민의 직업명이 떠올라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김유민 헌터님은 직업이 밀크마스터...라고 되어 있으시던데. 어떤 특성이 있는 건가요?”
“아, 저는...”
서울의 질문에 정신을 차린 유민은, 자신의 직업과 그 스킬을 떠올렸다.
헌터밀크를 복용하면 일시적인 버프를 부여받는 밀크 감별사. 그리고 헌터밀크의 등급 상승을 위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밀크 솔루션.
그러고 보니. 조건을 충족할 경우 솔루션의 회원으로 등록할 수 있다고 했지.
유민은 상태창의 일부를 시야에 띄워 스킬 정보를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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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 솔루션]
○ 고유 스킬
밀크마스터의 본분이자 모든 것.
▶ 헌터 밀크의 품질 상승을 위한 솔루션을 순차적으로 제공한다.
▶ 조건 충족 시 신규 회원을 등록할 수 있다.
- 조건 A : 동일한 생산자의 헌터밀크 3회 이상 복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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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헌터유를 3번 이상 마시면 솔루션의 회원 등록 조건을 충족. 유민이 생각하기에 그리 어려운 조건은 아니었다.
우선적으로 솔루션이 필요한 이들은 헌터유 등급이 낮은 헌터들이고, 짐꾼 일을 하다 보면 3~4등급의 헌터밀크 3병 값 정도야 쉽게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조건’이라는 단어 옆의 ‘A’, 그리고 그 밑의 물음표들.
이는 분명 솔루션의 조건이 1개 이상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거기에 더해서 이러한 조건을 하나만 충족해도 회원 등록이 가능한 건지, 아니면 모든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김유민 헌터님?”
“아, 죄송합니다. 상태창을 보느라...
저는, 헌터밀크를 마시면 일시적으로 버프를 받습니다.”
말하다 말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서울이 의문을 표하자, 유민은 서둘러 상태창을 닫고 자신의 직업 특성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아, 헌터유를...”
서울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쓱 내려 본인의 커다란 봉우리를 쳐다보고는, 살짝 귀가 빨개진 채로 몸을 홱 돌렸다. 그 움직임에 분홍색이 도는 우윳빛 단발 머리칼이 흩날린다.
“음! 알겠어요. 그럼 이제 슬슬 가볼까요?”
“그러죠.”
등에 매어진 타워실드 위로 빼꼼 드러나 있는 그녀의 하얀 뒤통수를 바라보며, 유민은 다시 솔루션에 대하여 생각했다.
회원 등록 조건의 개수도, 조건 충족과 회원 등록의 상관관계도 짙은 안개에 가려져 지금. 그것을 넘어서 진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누군가의 헌터유를 3번 복용하여, 조건 A를 만족시켜 보는 것.
그리고 지금, 유민은 그 ‘누군가’ 명찰을 자신보다 앞서 걸어가고 있는 우윳빛 실더에게 건네기로 마음먹었다.
좁은 복도와도 같은 초입 구간을 지나자, 조금 넓은 방이 유민과 서울을 맞이했다.
그 순간 멈춰선 서울이 등에서 방패를 빼어 내부 손잡이에 왼팔을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철커덕!
“여기 가만히 있으세요!”
팔과 평행한 방향으로 길게 장착된 방패를 앞세워, 그녀가 앞으로 힘찬 걸음을 내딛었다.
그녀와 방패에 가려져 시야를 제대로 확보할 수 없었던 유민은, 서울이 안쪽으로 전진하자 그제서야 방 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구 하나 없이 황량하기 그지없는 실내. 그러나 양쪽 벽면에서 무언가가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서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에 있던 것은, 다름아닌 목각 인형.
눈코입도 새겨지지 않은 채 그저 원통형의 팔다리와 네모난 몸체로 이루어져 있는, 투박한 형체의 녀석들이 기계적인 발걸음을 내딛어 우윳빛 헌터에게 접근해 왔다.
“흡!”
-콰직!
그리고, 어느새 코앞까지 내질러지는 검은 방패에 그들은 반응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서울이 허리를 비틀며 휘두른 묵빛 타워 실드가 한 번에 목각 인형 두셋씩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거대한 직사각형의 둔기가 부웅. 부웅 하고 섬뜩한 휘파람을 부르며 검은 궤적을 그릴 때마다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학살!
그 모습은 힘과 힘이 맞붙는 전투라기 보단 일방적인 폭력에 가까웠다.
유민이 그녀의 압도적인 신위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어느 새 인형까지 거대 방패로 뭉개 버린 서울이 얼빠진 짐꾼에게로 다가와 그의 눈앞에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김유민 헌터님? 일하셔야죠.”
“어, 아! 넵!”
서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가방을 고쳐맨 유민은, 이내 신비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방 안에 잔뜩 어질러진 나무 조각들이, 점차 가루로 화하여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몬스터의 잔해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짐꾼이 챙겨야 할 부산물들. 목각 인형의 팔, 다리 등이 곳곳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평범한 나무토막처럼 보이는 그것들을 주워다 가방에 채워넣으면서, 그는 무심코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런 게 팔리긴 하나.
“팔리죠. 그렇게 비싸진 않지만 잘 팔리더라구요.”
“그래요...?”
그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유민의 곁에 있던 서울이 그렇게 답해 주었다.
겉보기엔 그냥 나무토막이어도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건가.
유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목각 인형 몬스터들의 부산물을 마저 챙긴 뒤에 몸을 일으키려다가, 코에 익숙한 향기가 닿는 것을 느끼고 멈칫했다.
유당의 달콤한 냄새.
그것을 쫒아 시선을 돌려 보니, 거기에는 회갈색 가죽 갑옷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안에서 풍성한 볼륨을 뽐내고 있는 젖가슴이 범인이었다.
방금의 전투에서 마력을 사용한 유서울의 젖샘에, 헌터유가 차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