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4등급 헌터와 초짜 짐꾼 (1)
‘이번 주말에 연락할게요.’
본인의 전화번호로 문자를 보내게 하여 유민의 번호를 입수한 안내원은, 그 말을 끝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자신의 사과를 받아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최악의 수는 면한 듯하여 유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내원 추행 혐의로 그 자리에서 즉시 제압당하지 않은 것이 어디인가.
가방의 앞쪽 보조 주머니에 자신의 헌터 명함 뭉치를 집어넣고, 거유 안내원- 최시현의 명함은 소중히 겉옷 안주머니에 보관한 유민.
그는 헌터 협회를 나서며 잠시 생각했다.
이왕 시현에게서 버프를 얻었으니, 이것을 활용해서 짐꾼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보통 갓 등록을 마치거나 경험이 부족한 하급 헌터들은 짐꾼으로 던전에 들어가게 된다.
짐꾼은 말 그대로 던전의 몬스터에게서 얻은 부산물과, 마력의 사용으로 인해 중간중간 배출하여 용기에 보관한 헌터유를 챙겨 들고 다니는 운반직이다.
물론 파티원에게 도움을 주는 스킬을 가진 직업군이라면 경험이 다소 적어도 수요가 있으나, 유민의 직업은 그저 헌터유를 마시고 버프를 얻는 것이 전부이므로 해당 사항이 아니다.
솔루션 스킬로 회원을 등록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의 그는 파티원으로서의 가치가 없다시피 했다.
유민은 멈춰 서서 본인의 차림새를 훑어 보았다.
움직이기 편한 트레이닝 복장- 일명 츄리닝과 운동화. 그리고 등에 짊어맨 대형 가방.
그 모습은 영락없는 초짜 짐꾼이었다.
“음.”
그는 일단 제일 가까운 F급 던전 입구에 가 보기로 했다.
집 앞의 편의점만큼 흔한 것이 최하급 던전이기에, 유민은 10분도 안 되어 이름 모를 F급 던전 입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10분에는 잠깐 철물점에 들러 목장갑을 사오는 시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표면을 일렁이며 은은하게 푸른색으로 빛나는 타원형의 던전 출입구, 게이트.
참으로 비현실적인 형태를 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지구에서 저것은 이미 일상에 깊숙이 녹아들어 있었다.
그 신비로운 모습의 게이트 옆에서는, 헌터 협회의 문양이 프린트된 소형 천막 밑에서 게이트 관리원이 하품을 하고 있다.
참으로 한가로운 모습의 그를 잠깐 바라보던 유민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헌터로 보이는 인원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작은 탁자에 팔을 올려놓고 연신 하품을 내뱉던 관리원에게 다가간 유민이 질문을 건넸다.
“저기, 다른 헌터분들은 어디에 있나요?”
“으어? 아, 예. 몇 시간 전에 두 분이 다녀간 것 외에는 없어요.”
지금 이곳에는 헌터가 아무도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전에 이 근처를 지나갈 때는 그래도 사람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유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재차 물었다.
“원래 이렇게 한산한 편인가요?”
“그건 아닌데, 오늘은 이상하게 사람이 없네요. 가끔 이런 날이 있습니다.”
감탄하는 관리원의 말을 듣고 있자 하니, 아무래도 그저 유민의 운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해당 던전에 아무도 없는 것은 좋았지만, 정작 같이 들어갈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경험도 없이 혼자 들어갔다간 개죽음일 텐데. 다른 곳으로 가 봐야 하나. 하지만 거기도 여기처럼 비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으니.
뒤로 물러나서 옆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는 유민.
그의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던 관리원은 이내 저 멀리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유민에게 한 마디 던졌다.
“아, 저기 한 분 오시네요.”
“네?”
그 말에 유민이 반색하여 몸을 틀며 고개를 뒤로 향하자, 과연 누군가가 게이트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무언가 커다란 것을 등에 지고 있었기에 순간 같은 짐꾼인가. 하고 실망하려던 유민은, 상대가 구체적인 외형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오자 눈을 크게 치켜떴다.
분홍빛이 감도는 은발. 아니, 은보다는 우유의 느낌에 가까울 정도로 부드러운 빛깔의 풍성한 단발머리와, 살짝 처진 눈매 안쪽으로 담겨 있는 연두빛 눈동자.
분명히 귀여운 인상의 미인임에 틀림없었지만, 유민은 그녀의 외모보다 복장에 더 눈길이 끌렸다.
어두운 셔츠 위로 훌륭한 크기의 유방과 어깨를 보호할 수 있는 회갈색 가죽 갑옷.
거기까지는 유민이 으레 상상하고, 사진으로 봐 왔던 워리어형 거유 여헌터의 방어구와 흡사했다.
헌데 그 상반신의 모습이 정석과도 같다면, 하반신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물론 그녀의 잘록한 허리 밑으로 이어지는 넓은 골반과 통통한 허벅지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문제가 있다면,
가죽 갑옷과 같은 색상이지만 어딘가 허벅지 부분부터 잘려나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핫팬츠와,
공사장에서 사용할 것 같은 투박한 안전화에게 있을 것이다.
전체적인 밸런스를 박살낼 정도로 괴멸적인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나,
꽤 괜찮은 방호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반신에 비해 하반신에는 투자가 없다시피 하니 저절로 위화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민은 어느 새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등 뒤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거기에 그 자금을 고스란히 쏟아부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수고하시네요!”
유민이 상대의 모습에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감탄하거나 말거나,
그녀는 유민과 관리원 쪽으로 다가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안녕하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호기심 섞인 연두색 눈빛이 유민을 향했다.
고개를 갸웃하는 움직임에 부드러운 우윳빛의 머릿결이 흔들린다.
“이 근처에서 처음 뵙는 것 같은데...? 혹시 다른 지역에서 오셨나요?”
“아뇨. 오늘 각성해서 처음 짐꾼일 하러 나왔습니다.”
“어, 진짜요? 그럼 각성하시자마자 바로 능력 검사 받고 일하러 오신 거예요? 와아...”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유민은 아까부터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위화감이 자꾸 신경 쓰였다.
처음에는 기형적인 투자로 인한 복장에서 나오는 감정인 줄 알았으나, 무언가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기시감이었다.
이 우윳빛 머리칼과 라임색 눈동자의 그녀를, 분명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 이렇게 개성적인 차림새를 한 헌터와의 만남을 자신이 잊어버릴 리가 없는데.
그때, 그녀가 미처 잊고 있었다는 듯이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커다란 무언가 안쪽을 뒤적거리더니 카드 한 장을 꺼내 유민에게 건넸다.
“짐꾼이라고 하셨죠? 여기요! 제 명함.”
“아, 네. 저도 명함 드릴게요.”
유민은 황급히 가방 앞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어 그녀에게 마주 내밀었다.
안내원 최시현의 도움을 받아 마력으로 글씨를 새긴 헌터 명함. 그것을 상대와 맞교환한 유민은 우윳빛 그녀의 이름과 직업을 확인했다. 슬쩍 살펴보았던 뒷면의 알파벳은 D였다.
[유서울]
[실더]
그녀-유서울이 실더(Shielder)라는 것은, 등 뒤의 거대한 저것이 방패라는 뜻이겠지.
아니 그런데 잠깐. 유서울?
그녀의 이름을 보고서 마침내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은 유민이 입을 열었다.
“유서울 헌터님. 그, 혹시 며칠 전에 헌터유...?”
“밀크마스터가 뭐지... 네? 며칠 전에... 아아!”
말끝을 흐린 유민의 질문에, 유민의 명함에서 시선을 떼고 잠깐 의문을 표하던 서울이 박수를 쳤다.
“제 밀크 사 가신 분이구나! 아니 뭔가 표현이, 그러니까 헌터유!”
“일용할 양식으로 잘 마시고 있습니다.”
“에헤헤, 쫌 부끄럽네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헌터유 매니아의 진심어린 인사에, 서울은 멋쩍은 듯이 한 손으로 다른 쪽 팔꿈치를 붙잡았다.
유민이 집에서 마시고 그 달콤함에 행운을 느꼈던 헌터유.
그녀- 유서울은 바로 그 헌터밀크의 주인이었다.
계속해서 느껴지던 기시감은, 서울이 평범한 사복으로 마스크를 쓴 채 유민과 헌터유를 거래했기에 발생한 것이었다.
그 둘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관리원이 한 마디 했다.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헌터유 사먹던 일반인이,
각성해서 그 헌터유를 팔았던 헌터 앞에 짐꾼이 되어 나타났다는 겁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뭐, 신기한 건 신기한 거고, 저는 제 할 일을 하겠습니다. 두 분이서 던전 입장하시겠어요?”
관리원이 탁자 위에 놓인 차트를 툭툭 치며 묻자, 서울이 반색하며 유민을 쳐다보았다.
“앗, 그렇네요!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짐꾼 계약 하실래요? 그... 김유민 헌터님!”
“저야 환영이죠. 그런데 저희 둘이서만 들어가는 건가요?”
“네. 저는 원래 솔로잉을 주로 해요.”
던전을 홀로 공략하는 행위, 솔로잉. 그녀의 말에 유민은 잠깐 서울의 직업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실더는 그저 방패로 막는 것이 아닌, 공방일체의 직업이었나.
하기사, 저 커다란 놈의 무게에 더해 힘을 실어 후려치면 흉기가 따로 없을 것이다.
헌데, 왜 파티원과 동행하지 않고 솔로잉을 단행하는 것인가.
유민은 그러한 의문이 들었으나, 이내 그것은 일개 짐꾼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서울이 방패 어딘가에서 꺼내든 계약서를 살펴보았다.
중간에 이탈하지 말 것. 물품을 우선으로 지킬 것 등등 짐꾼으로서 숙지해야 할 항목들을 눈으로 훑고 내려가던 유민은 임금에 시선을 고정했다.
[부산물로 인한 소득의 25%]
25퍼센트. 약 4분의 1.
그저 짐만 들고 가는 운반직이라기엔 보수가 매우 높아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헌터의 주된 수입원은 던전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부산물이다.
허나, 여성 헌터에게는 부산물만큼이나 가치 있는 소득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헌터밀크다.
헌터유의 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이는 그들에게 있어서 아주 유용한 자원이자 경쟁력이었다.
헌터유로 소득을 더 올릴 수 있으니, 타 남성 헌터들보다 좀 더 비싼 값에 짐꾼을 고용할 수 있다.
짐꾼을 고용하면 더 많은 헌터유의 보관이 가능해져 던전 안에서 아깝게 줄줄 흘러내리는 헌터유를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다.
따라서 여성 헌터들에게 짐꾼은 단순한 운반역이 아니라 돈 복사기이기도 한 것이니, 그들의 가치가 높아짐에 따라 자연히 보수도 올라가게 된 것이다.
임금도 괜찮고, 헌터도 사람 좋아 보이고.
무엇보다 헌터유가 4급이라지만 좋은 맛이었기에 유민은 흔쾌히 계약서에 사인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계약서 한 부를 받아든 서울이 방긋 웃었다.
4급 헌터유를 지닌 D급 헌터와 밀크마스터 초짜 짐꾼의 계약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