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화 〉각성 (2/116)



〈 2화 〉각성

어두운 단칸방.
접이식 매트리스 위에 깔개도 없이 널브러져 있던 사내는, 스마트폰을  손으로 받쳐들고 화면 속의 좁디좁은 쿼티 자판을 두들겼다.

[아 1등급 헌터유 마렵다]
-냉장고에 1등급 헌터유만 종류별로 가득 채워넣고 끼니마다 배터지게 마시고 싶다

글을 게시한 지 1분도 안 되어 댓글이 주르륵 달리기 시작했다.



- 벌써 점심시간임?
 딱 12시네 소름돋는다 진짜;
- 이딴 꾸준글 싸지르는 니인생은 4등급따리인데ㅋㅋ

“4등급...”



4등급이라고 하니, 냉장고 깊숙한 곳에 모셔놓은 그것이 문득 떠오른다.
사내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부스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바로 근처에 놓여 있는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약간 누렇게 변색된 냉장고 문을 열어 팔을 깊숙이 집어넣자, 사내의 손에 자그마한 유리병 몇 개가 닿았다.


사내는 그것들 중 하나를 꺼내어 시야 높이로 가져왔다.
어스름한 방 안의 어둠 속에서도,  액체가 담긴 병 표면의 검은 글자는 확연하게 눈에 박혀들었다.

[4]

헌터협회에서 기본으로 지급하는 헌터유 전용 포장용기에 어떠한 라벨도, 장식도 없이 그저 숫자 하나만 덜렁, 그마저도 직접 손으로  듯한 조잡함이 느껴지는 모양새.
고귀하신 헌터들에겐 별 가치가 없어 주로 일반인들에게 유통되는 최하급 헌터유다운 포장법이었다.

이걸 포장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사내는 그렇게 생각하며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개봉된 용기 안에서 솔솔 피어오르는 달콤한 향기.
등급에 따라, 그리고 개인차에 따라 다르겠지만  향이라 함은 보통 이러했다.
눈을 슬쩍 감고 그 향긋한 내음을 잠시 음미하던 사내는 이내 병의 주둥이를 입가에 대고 천천히 내용물을 입 안으로 흘려보냈다.


향과 달리 미미한 단맛.
그리고, 그저 그것뿐.

유리병을 모두 비운 사내는 곧 눈을 떴다.


“음.”



이게 인생이지.
그것이 이름 모를 여헌터의 유두에서 뿜어져 나온 분비물에 대한 사내의 감상이었다.


최하급의 헌터유에서 미미(美未)를 기대하기는 꽤나 어려웠다.
긍정적인 맛을 따지기 이전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로 불쾌하지나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맛을 기대하지 않고 오직 영양분-일반인 기준에서-을 위해 마시는 것이 일반적인 4등급 헌터유다.
헌데 약간이지만 달콤함이 느껴졌으니, 이는 사내가 방금 마신 녀석이 4등급 중에서는 최상위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등급은 맛으로만 정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리 큰 의미는 없었으나,
당장 헌터유를 마시는 사람에게 가장 처음으로 느껴지는 것이 맛이니만큼, 이는 복용자에게 중대사안이기도 하다.

냉장고에 같은 물건이 하나 더 남아 있으니, 그것 또한 괜찮은 맛이겠지.
사내는 오래간만의 행운에 흥분을 느끼며 잠시 손에 든 유리병을 살펴보고는, 그것을 다시 냉장고 아랫칸에 넣어두었다.
그곳에 가득 줄지어 세워져 있던 빈 유리병들에게 새 동료가 생겼다.

슬슬 협회에 빈병 반납하러 가야 하나.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내는 기지개를  번 쭉 키려다가,

“...?!”




문득,
이변을 느꼈다.

“흡!”




사내는 무심코 뱃가죽을 움켜쥐었다.
배가 아프다. 뱃속이 뜨거워진다. 아니, 차가워지는 건가?
안에서 무언가가 소용돌이치며 꿈틀거리는 것만 같다.

자신의 몸속에서 느껴지는 괴상한 감각에 기겁한 사내가 배를 붙잡고 119를 불러야 하나 싶어 스마트폰을 줍기 위해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바로  때,

[...습니다.]

사내의 시야 한복판에,
참으로 이질적인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 각성했습니다.]




사내는 눈앞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그것에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둔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끙끙대며 몸을 추스르던 사내는, 문득 뱃속의 이질적인 감각이 씻은 듯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그는 다시금 제 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무언가에게 의식을 집중했다.
그러자 그것은 사내의 행동을 의식한 듯이, 이내 자신의 몸집을 점차 불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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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민


밀크마스터 (F랭크)
=헌터밀크 입문자=

-스킬-

[밀크 감별사]
○ 패시브 스킬

▶ 헌터밀크 복용  해당 헌터밀크의 생산자를 확인 가능하다.
▶ 복용한 헌터밀크의 특성과 복용량에 따라 일시적인 버프를 부여한다.



[밀크 솔루션]
○ 고유 스킬

밀크마스터의 본분이자 모든 것.

▶ 헌터 밀크의 품질 상승을 위한 솔루션을 순차적으로 제공한다.
▶ 조건 충족  신규 회원을 등록할 수 있다.


- 조건 A : 동일한 생산자의 헌터밀크 3회 이상 복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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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해하기 힘든 말들이 구구절절 적혀 있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사내- 김유민은,
마침내 자신에게 인생의 변환점이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재된 힘의 각성.
상태창을 지닌 '헌터'가  것이다.

“...밀크, 마스터?”




하지만 뒤이어 유민은,
 변환점이 뭔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것 또한 깨닫고 말았다.


상태창 이곳저곳에서 헌터밀크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보이고 있었다.
아니, 헌터밀크가 언급되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가 더 어려웠다.


유민은 혼란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상태창을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정독해 보았다.
그러자, 반쯤 일그러져 있던 그의 얼굴이 천천히 원상복구되기 시작하더니, 말미에는 오히려 얼굴 근육이 한껏 기쁨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저 방긋, 정도가 아니었다. 유민의 표정은 ‘빵끗’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자신의 페티시를 한계까지 충족할 가능성을 얻은 사내는  자리에서 그대로 한참 동안 환희에 젖어 있었다.

조금 뒤, 행복의 물살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그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저 알바 그만두겠습니다.]

빠르게 옷을 챙겨입고 지갑을 주머니에 쑤셔넣으며 현관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사내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커다란 가방에 냉장고 속 빈 유리병들을 모두 쓸어 담은 뒤에야 비로소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가방 하나를 짊어지고 좁은 단칸방에서 빠져나온 유민은, 제일 가까운 헌터 협회 지부를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에 잠겼다.


밀크마스터.


헌터밀크를 마시면 버프를 얻고,
헌터밀크의 품질 향상 솔루션이라는 것을 제공하는 직업.


재미있다.
그리고 위험하다.

유민이 평하기에 헌터밀크 복용을 통한 버프는 부가적인 혜택에 불과했다.
핵심은 바로 밀크 솔루션.


헌터밀크의 생산자이기에 그런 것인지,
여성 헌터들은 남성 헌터보다 헌터밀크 복용 시 효율이 훨씬 좋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국내 최상위 랭커들은 모두 여성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누구나 같은 결론을 내릴 것이다.
헌터밀크는 틀림없이 헌터의 성장에 도움을 준다. 그것이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간에.
그리고 그 성장률은, 분명 헌터밀크의 등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

헌터밀크의 등급을 올리는 방법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고,
설사 등급이 상승했다고 해도 그 해답이 다른 헌터들에게까지 통용된 적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현재 헌터밀크의 등급을 정하는 것은 오직 선천적인 운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솔루션이라는 분명한 열쇠를 가진 유민이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낸다면?
헌터밀크에 목마른 누군가, 또는 어딘가에서 F등급에 불과한 그를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가 목숨만 붙여두고 등급 올리는 기계로 사용할 가능성이 아주아주 높다.

유민은 물론 헌터유-헌터밀크라는 것에, 강하고 매력적인 여헌터의 유두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그 녀석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헌터밀크에 절여지는 행복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야 누릴 수 있지 않은가.

그는 잠깐의 충동에 인생을 던져 넣을 수 있는 상남자가 아니었다.


본인의 직업명과 헌터밀크 복용을 통한 버프.
유민은 헌터 등록을  때 그 외의 것을 절대 발설하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솔루션이라는 것은 그 누가 되었든 간에, 반드시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했다.
가늘고 긴 삶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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