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62-3 미친년.
은은하게 빛나는 총구를 내게로 들이민 파멜라는 조금 전의 일은 거짓이라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가 단숨에 바뀌었다.
“어떻게 할래?”
총.
마법보다 검보다 효율적인 무기라 할 수 있는 이 시대 최고의 무기가 지금 나를 겨누며 총구에서는 금방이라도 총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마나로 싸운다면 이긴다. 몸으로 붙는다면 질 수가 없다.
그러나 총은 다르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총구 앞에서 허튼짓을 했다가는 바로 사망이다.
“대답이 없네. 아까처럼 따박따박 잘만말하더니.”
기세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다.
파멜라는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제가 어떻게 하셨으면 하는데요?”
“바보구나. 아까 말했잖아. 내 것이 되라고.”
‘미치겠네.’
솔직히 말하자면 살려달라고 빌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빌어먹을 심정인데도 이상하게도 머리는 상쾌했다.
“후... 역시. 말로 해서는 안되겠네요.”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주저 없이 쏠 거야.”
“파멜라 선배는 절대로 나를 못 쏴.”
“왜 그렇게 생각해?”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흠집이 난다면 가치는 떨어지게 돼 있어. 설상 정교한 기술로 복구해서 물건을 봐도 스스로 흠집을 낸 기억 때문에 얼마 못 가서 버릴 게 분명해.”
이건 분홍빛 소녀를 동요하기 위해 지껄이는 구차한 목숨 구걸이었다.
타아앙!!
“아니. 쏠 거야.”
코를 간지럽히는 화약 냄새가 아련히 풍겨오는 동시에 칼을 든 오른쪽 팔이 뜨거웠다.
아니면 파멜라의 서투른 사격 솜씨 덕분에 스친 걸까.
“빨리 내 것이 된다고 계약해. 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너를 영원히, 다음 생에서도 너를 무조건사랑할 거야. 그러니 너만 내 곁에 와준다면 돼. 그걸로 충분해.”
비뚫어진 소유욕. 아니, 사랑일까?
소녀의 언행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파멜라 선배. 총소리가 은근 큰 거 알고 계시죠? 곧 있으면 사람들이 들이닥칠 겁니다.”
“그 전에 받아낼 거야.”
“배짱도 좋으시네. 안 되겠다. 어차피 여기서 대치해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혼나기 싫으면 빨리 총 버려요.”
“할 수 있으면 해 봐. 네가 빠른지, 내 총이 빠른지. 어디 증명해볼까.”
방과 후 축제 준비에 한창이던 녀석들이.
특히나 선생들이 이 소리를 듣고 안 올 리가 없다.
이대로 있다가는 선생들이 교실에 들이닥쳐 이 난장판인 교실을보고 말 것이다.
‘이제껏 공들인 연극을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총알에 스친 팔이 뜨거웠다.
그렇지만, 다리에 모여든 마나는 더욱 뜨거웠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흩어지는 연기처럼 어지럽게 움직이는 알렌.
그리고 파멜라는 재빠르게 총구를 돌려 알렌을 향해 쏘려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또다시 커다란 파공음이 교실을 가득 메운다.
은은히 빛나는 총구는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매캐한 화약 냄새를 풍기지만...
“그만 하세요. 이만하면 되잖아요.”
어느새 파멜라에게 다가가 알렌은 흉흉한 리볼버를 뺏으며 그만하자고 부탁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내가 싫어?”
“그 얘기는 나중에 하죠. 일단은 도망치죠.”
****
“여긴 어디야?”
“아카데미에 숨겨진 장소? 저는 그냥 편의상 비밀 공간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신기하다... 아카데미에 이런 장소가 존재하다니.”
침대에 앉아 비밀 공간을 구경하는 파멜라는 천진난만한 아이와도 같았다.
다만, 파멜라의 손에 들린 것이 리볼버가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흉흉한 물건은 내려놓으시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보죠.”
“진솔한 이야기? 후배야. 나는 너 말고 다른 건 관심이 없어.”
조울증이라도있는 건가. 기분이 너무쉽게 변하는 파멜라를 보니 절로 나오는 한숨을 참았다.
‘얀데레 기본 패시브 스킬인가... 시발.’
“그럼 제가 먼저 얘기하죠. 파멜라 선배가 말씀하신 걸 유추하면 저랑 결혼까지 생각...”
“응. 할 거야.”
“즉답이시네요.그 난리를 피워놓고 저와 결혼을 하신다고요?”
“그냥 사소한 부부싸움이잖니.”
판타스틱하네...
예전에 외국 쪽에서 이런 사례를 자주 본 것같은데...
부부싸움 하는 도중에 분을 못 이겨 그만 총으로 남편을 쏴 죽인... 그런 뉴스를 봤었는데.
“이게 지금 사소한 싸움... 하아...”
기껏 참았던 한숨을 내쉬며 알렌은 미간을 잡으며 잠시 화를 식혔다.
“파멜라 선배. 다음 주가 축제에요. 그런데 이런 소동이 일어나면어떻게 될 것 같아요?”
“예정대로 축제는 진행될 거야.”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세요?”
“대륙의 유명 인사들이 오는 자리인데 축제 일정을 뒤로 미루는, 중지한다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니?”
참 속 편한 이야기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인데, 어째 일을 벌여놓고 태평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더 열 받네.
“저를 원하신다고 하셨죠?”
“맞아. 후배를 원해. 그러니...”
“알겠습니다. 그럼 축제가 끝날 때 답을 드리죠.”
“그때까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게 뭐 어때서요?”
“뭐?”
저쪽에서 뻔뻔하게 나오는데, 나도 뻔뻔하게 나오는 게 좋지 않은가.
“제가 무슨 짓을 하든 파멜라 선배는 저를 원하시잖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질 거야.”
저 눈이 무섭다는 거다.
원한다면, 가지고 싶으면 주위에 있는 모든 걸 배제할 수 있는 저 과감한 붉은 눈동자가.
“그러니 축제가 끝나고 합의를 보죠.”
“축제를 핑계로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는 거야?”
“네. 그러면 안 됩니까?”
“뻔뻔하구나.”
“뻔뻔한 건 오히려 파멜라 선배가 아닐까요. 대놓고 교실 안에서, 제게 총을 쐈으면서.”
무표정한 얼굴이 바뀌었다.
언제나처럼 웃음기 가득한 소악마적인 웃음으로.
“재미있네. 내 앞에서 대놓고 뻔뻔하다고 하다니. 후배는 너무 귀엽다.그 말을 들으니 더 기다릴 수가 없는데.”
“그거아세요? 이 장소는 저 말고 아무도 몰라요.”
“어쩐지 나를 죽이겠다는 말을 돌려서 말하는 것 같네?”
“그렇게 들리셨다면 제대로 들으셨네요. 맞아요. 빙빙 돌려서 말한 거.”
“나를 죽이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다시 총알을 넣고 내 이마를, 내 머리를 그 총으로 꿰뚫어보렴.”
알렌에게 성큼 다가오는 파멜라.
그리고는 리볼버를 쥔 알렌의 손을 잡으며 자신의 이마에 총구를 갖다 대는 대범한 행동을 보인다.
“제가 존경하는 파멜라 선배를죽이기라도 하겠어요? 농담으로 한 말이에요, 농담으로.”
“농담이 아닌 것 같은데~?”
“뭐, 이쯤에서 그만 하죠. 이 이상 얘기해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알았어. 후배가 말하는 대로 축제가 끝나면 합의하자는 거지?”
“그게 편하잖아요. 선배도 나도.”
“좋아. 그 대신에 계약은 안 할게.”
뜻밖이었다.
축제가 끝나면 합의하자는 계약을 작성할 줄 알았는데, 하지 않는다니.
“하지만, 축제가 끝나고 내게 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네가 아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없을 거야.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간단하네요. 좋습니다. 하죠. 그 대신에 축제 전에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되는지 제가 몸소 보여 드릴게요.”
“좋아. 그럼 후배도 축제가 끝나기 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진지하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심하고 대답해줘.”
“좋습니다.”
****
“안가세요?”
“나가도 할 것도 없는데 뭘.”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알렌은 침대에 누워 다리를 교대로 흔들며 책을 읽는 파멜라를 보며 묻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알리바이라도...”
“괜찮아. 세상에는 돈으로 안 되는 게 없거든. 지금쯤이면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을 거야.”
‘미친년... 아카데미에 돈을 얼마나 퍼부었길래 저런 말이 나오는 거야? 그것보다 미리 계획한 건가? 그래서 총을 쏜 거야?’
“후배 혼자 마시지 말고 나도 맛있는 것 좀 줘.”
“알아서 타 트세요.”
“에이~ 그러지 말고 한 번만 해 줘~ 귀여운 선배의 부탁인데~”
“...뭘로 드실래요.”
“으응~ 나느으은~ 홍차~? 거기다가 케이크도 있으면~”
“홍차만 드세요. 케이크는 없으니까.”
“고마워~”
침대에 누워 고맙다고 활짝 웃는 파멜라를 보았다.
이중인격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뭐... 내 알 바는 아니다.
‘고맙기는. 네년의 태도 덕분에 이렇게 내가 손수 홍차를 타주는 건데.’
알렌은 선반에 놔둔 찻잎과 암시장에서 산 미약을 같이 꺼냈다.
그리고는 찻잎을 우려낸 그윽한 홍차에 미약 한 스푼을 넣고 잘 저어줬다.
‘웬만하면 축제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미약이 섞인 옅은 주황빛 홍차.
빛깔이 참 좋다.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지.’
불과몇십 분 전에 파멜라와 했던 약속을 금세 어기는알렌.
이유는 간단했다.
약속은 했으나 믿지 않는다.
오늘 본 파멜라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대뜸 총을 쏘고, 미친년의 기본 패시브 스킬인 집착 및 조울증과 함께 되도 안 되는 말을지껄이는데 어떻게 합의를 할 수 있을까?
더는 질질 끌고 다니기는 싫다.
차라리 이렇게 하는 편이 더 간단하다고 생각했다.
“다음부터는 돈을 쥐여주고 시키세요. 저도 할 일이 있는데.”
“에이~ 돈도 많으면서~ 그래도 고마워. 잘 마실게~”
침대에누워서 기다리는 파멜라에게 건네주며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향기 너무 좋다~ 나중에 내 수중에 들어오면 집사 시켜줄까?”
“싫은데요?”
“하하~ 너무해. 내 전속 집사가 되면 나랑 이것저것 사랑스러운 짓을 할 수 있잖니. 한 번 고민해보렴.”
그 말을 남기고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침대에 누운 채로 알렌이 건네준 홍차를 홀짝 들이켜는 파멜라.
“저는 대본 연습하고 있을 테니까, 파멜라 선배도 적당히 하고 돌아가세요.”
“응, 응~ 알았다니까~ 나도 조용히 책만 읽고 나갈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말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