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0화 〉62-1 미친년. (110/116)



〈 110화 〉62-1 미친년.

참 신기하지 않은가?

한 달이라는 시간.

길면 길고,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이 기간에 우리는 눈을붙일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갔다.

학업과 축제.

이 둘은 병행하는 일은 생각보다 고달픈 시간이었다.

게임에서는 그냥 아침, 점심, 저녁. 이렇게 세 개로 나뉘어 각각 수업이나 축제에 참여하면 금세 시간이 흐르지만, 내가 있는 게임 세계는 진실.

현실이었다.

그리고 게임처럼 스킵 버튼도 없는, 축제를 준비하는 시간 동안 정말 별의별 일이  있었다.

푸른 마녀이야기 퇴짜.
로미오와 줄리엣 오리지널 스토리.
선생들의 존경 및 질투.
다이스의 소문 퍼트리기.
교내 연극 홍보 완전 장악.
다른 반의 견제 및 이상한 찌라시.
각각 소품과 세트 만들기.
강당 사용 시간을 정하려는 다른 반과의 트러블.
같이 합동하는 A반과 B반의 내부 싸움.
주인공 시켜달라고 떼를 쓰는 망나니 새끼.
막판에 다다랐는데 못하겠다고 배역을 내려놓는 개 같은 놈들.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다며 투정부리는 애새끼.
내가 왜 소품을 만들어야 하느냐며 공구를 집어 던지는 좆만이까지.

생각하니 아직도 존나게 많았지만, 대부분이 사람문제였다.

내가 더 빡친  합동하는, A반과 B반의 급식들이었다.

이미 정해졌는데 다른 배역을 달라?
이미 정해졌는데 배역을 거부한다?
이미 정해졌는데 사람들한테 보이기 싫다?
이미 정해졌는데 만들기 싫다고 배역한테 공구를 던진다?

평소 성격이라면 분명 개 팼을 거다.

자기가 정한 일을  싫다고 난리인가?
모두가 결정한 일에 왜 반기를 들고 나대는 건가?

존나게 화났다.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피떡이  정도로 패버리고 싶었다.

나는 머리까지 끓어 오른 분노를 겨우...아주 힘들게 참고는철부지 급식들을 다독였다.

좋은 연극에, 좋은 주인공들이 모였다고 한들 그걸 띄워 줄 조연이 없으면 안 되니까.

그렇게 순간 치솟는 분노를 애써 참아 급식들을 중재하고는 점차 나아지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나 몰라하며 노는 새끼도 있었다.

그때는 뭐, 웰턴에게 살짝 귀띔하니 이제는 알아서 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조금 보람을 느꼈다.

비록 내가 스스로 짜낸 이야기는 아니지만.

모두가 내가 쓴 작품을, 그들이 모르는 표절을 연기한다는 것이 묘하게 흥분됐다.

양심이 성감대라 그런 걸까?

“알렌 메스티아.  부분의대사는 수정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벤치에서 합을 맞추던그 이후로 비비안은 부쩍 내게 말을 많이 걸어왔다.

물론 연극이라는 전제하였지만 말이다.

“어디?”
“이 대사.”

여러 번의 수정을 걸친 대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대사를 내게 보여주는 비비안.

“그럼 이렇게 고쳐. 그편이 더 좋을 거야.”

펜을 들어 대사를 수정해주자 비비안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인지, 조금은 불만인 얼굴을 보였다.

“마음에  들어?”
“조금.”
“솔직하네.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나는...”

물론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그래도 연극에 진지하게 임하는 비비안을 보니.

전보다는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어때.”

펜을 건네받은 비비안은 미리 생각이라도 했던 것인지 알렌이 수정한 대사를 그으며 재빠르게 대사를 쓰고는 감상을 묻는다.

“괜찮네.”
“다행이네.”
“뭐가?”

괜찮다는 말을 들은 비비안이 다행이라는 말을 하자 알렌은 의문형으로 묻는다.

“알렌 메스티아. 너는 매번 나쁘지 않네. 라는 말만 하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괜찮다고 말했으니 지금의 대사가 좋은 대사인 건 확실하잖아.”
“그랬나.”
“매번 그래.”

눈웃음.
살짝 올라간 입꼬리.

처음으로 웃었다.
처음으로 보았다.

비비안이 웃는 것을. 나는 지금껏 처음 보았다.

“다음 주부터 축제 시작이니 많은 사람이 몰려올 거야. 물론 많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해야만 해.”
“알고 있어.”
“그럼 눈 감고. 내가 말하는 대로 상상해 봐.”

비비안은 눈을 감으며 곧 긴장된 것인지 목덜미에는 땀  방울이 흘러내렸다.

“환호하는 관객. 더 보여달라며 앵콜을 원하는 관객.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성대한 광경에 너는 아마 놀라 자빠질 거다.”

사실. 말하고 싶었다.

수많은 남자, 수많은 시선, 수많은 손짓, 수많은 목소리.

과연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태연히 줄리엣을 연기할 수 있을까?

“뭐야 그게...”
“사람들 앞에서 연극을 한다는 거. 이거 쉬운  아니야. 다른 예시를 들자면 너, 친구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어?”
“친구 없어서 괜찮아.”
“굉장하네. 아무튼, 마음 굳게 먹어, 비비안 아락시스.”
“알고 있어, 알렌 메스티아.”
“수정한 대본은 잘 외우고. 그럼 나는 먼저 간다.”
“혼자 어디 가는데?”
“아는 동생 온다고 해서. 나가봐야 해.”

****

“알렌 형님.”
“어, 그래. 애들은  있지?”
“네. 누님들은  지내고 계십니다.”
“누님이라. 하기사... 엘프니까. 누님이 맞네.”

아카데미 교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사람들도  왕래하지 않은 외딴 숲에서 만난 두 사람.

“알렌 형님. 아카데미 수속은 다 끝냈습니다. 언제든 원하신다면야.”
“지금은 됐어. 다음 주부터 축제 기간인데 오면 정신만 사납지. 가뜩이나 사회 적응도 안 된 애들인데.”
“알겠습니다. 그럼 알렌 형님이 편하신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것보다 거래는 잘 돼 가고 있냐?”
“일단 길을 텄는데, 아무래도 신분이 미천하다 보니.”
“어쩔 수 없지. 돈이 하늘만큼 많아도 귀족 작위는 현왕의 법으로 금하고 있으니. 그래도 그것까지 참작하고 나서는 길이잖아.”
“네, 맞습니다. 저... 그런데 알렌 형님.”

뜸을 들이며 답하는 마로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뭔데?”
“그... 며칠 전에 이상한 일이 있어서... 보고 드릴 만한 일은 아닌데...”
“말해 봐.”
“그게... 저택에 그년이 찾아왔습니다.”
“누구?”
“파멜라 쉴버나스. 그년이 직접 저택에 왔습니다.”
“...알았어. 오늘 내가 만나서 말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죄송합니다. 알렌 형님.”
“죄송은 씹. 그냥 놔둬. 내가 알아서 할게.”

한동안 잠잠하더니 이제 일을벌이는 모양이다.

카페 이후로 일부로 만남을 피하고 있었고, 그렇게 서서히 잊힐까 했는데.

“아무튼, 절대로 신경 쓰지 마라. 또 파멜라가 찾아오면 내가 따라 보자고 말해. 알았지?”
“알겠습니다.”
“새끼야, 쫄지 마. 너는 그냥 나만 믿어.”
“저,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그런데... 파멜라는... 저를 단숨에 몰락하게 만들 정도로 악랄한 계집입니다... 또 약에 관한 것도 눈치챘는지 거래를  귀족 이름이나 가문을 언급하니... 미치겠습니다... 이러다가 제가 이룬 것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이 되는 건 아닐지... 두렵습니다.”

마로스의 어깨를 다독이자 떨림이 전해졌다.

근본적인 공포라고 할  있겠지.

게임을 하면서도 파멜라는 미친년이라는 소리가절로 나올 정도로 싸이코니까.

“남자 새끼가 어깨 봐라. 나한테 맞고 싶지 않으면 펴고 다녀.”
“넵...”
“목소리 봐라. 아가리에 주먹을 꽂아야 원래대로 돌아오려나? 그리고 내가 무섭냐, 파멜라가 무섭냐?”
“무, 물론... 아, 알렌 형님이 더...”
“그렇게 말해야지. 그래야 내가 끝까지 챙기고 갈 거니까. 그러니 떨지 마, 새끼야.”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마땅한 방안이 없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찾아갔다가는 파멜라의 의도대로 흘러갈 것이 분명했으니.

‘뭐가됐든 쇼부는 쳐야지. 이대로 있다가는 파멸 엔딩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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