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61. 연극은 다가오고.
[...나쁜 녀석 같으니라고. 어디가 귀족 영애란 말이더냐? 네놈의 달콤한, 간사한 혓바닥에 다시는 속지 않겠다]
왕좌에 앉아 더는 속지 않겠다는 발언과 함께 귀엽게 토라진 클로 세로의 모습을 보는 알렌.
“죄송합니다. 제가 귀여운 걸 보면 괴롭히고 싶은 욕망이 있어서요.”
[더는 네놈의 입놀림에 속지 않는다]
단단히 토라진 모양이다.
“식사라도 차려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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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절대로 용서치 않는다. 그리 알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클로 세로 님.”
그 말을 남기고는 숟가락을 들며 허겁지겁 볶음밥을 집중해서 먹어치우는 클로 세로.
“천천히 드세요. 부족하면 더 차려드릴게요.”
[네놈치고는 제법 눈치가 있구나]
“원래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힙니다.”
입가에 밥풀을 묻힌 채로 나를 칭찬하는 클로 세로.
“뭘 그리 묻히고 드십니까.”
[...원래 제자는 스승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법이다. 만일 닦아주지 않았다면 엄벌을 내렸을 것이야]
“네, 네. 어째 한 그릇 더 만듭니까?”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거늘. 네 녀석은 본좌를 돼지로 아는 모양이더냐?]
“식성이 워낙 좋으셔서. 그리 생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예상 외로 솔직히 사과를 하는 알렌의 모습에 클로 세로는 조금 당혹했다.
[돼, 됐다. 네 녀석이 그러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니. 이해하마]
“역시. 클로 세로 님은 포용력이 넓으시군요. 감사합니다.”
[...왠지 모르게. 본좌를 놀리는 듯한 기분이 드는구나?]
“그런 기분이 드신다면 제가 정식으로 사과...”
[됐다. 것보다... 등은... 괜찮은 것이냐?]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는지 클로 세로는 조금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알렌을 걱정했다.
“괜찮습니다. 무의식인데요 뭘.”
[무의식이라고 한들. 혹시 모르니 내가 흉터를 지워주마]
순간 등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위협적인 불길이 아닌 상처와 흉터가 아무는 느낌.
따뜻한 불길을 비유하자면 마치 사우나에 온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면 됐을 거다]
타오르는 불길을 거두는 손동작.
그러자 알렌의 상처와 흉터를 태우는 불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뭐, 흉터는 클로 세로 님이 새기신 거지만.”
[사족이 많구나. 이럴 때는 그냥 감사하다고 하면 될 것을]
“감사하다고 했는데. 제 진심이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러면 미천한 제가 성의를 표할 수 있는 거라고는 침대에서의 유희인데...”
[...그, 그건 다음에 하자꾸나. 오늘은 피곤하니 이만 돌아가도록 하여라!]
침대, 유희라는 단어를 듣자 클로 세로는 자동으로 얼굴이 벌게지며 피곤하다는 핑계로 알렌에게 서둘러 돌아가라고 윽박지른다.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클로 세로 님.”
얇게 쌓인 스트레스를 해결한 알렌은 해맑게 웃으며 그대로 무의식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사라진 알렌이 서 있던 자리를 보는 클로 세로는 그날 르카네와 단둘이서 이야기했던 말들이 신경 쓰였다.
[그 계집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한 번 찾아가서 직접 대면하는 편이 좋겠군]
****
“비비안 아락시스. 대본은 다 외웠어?”
“응. 다 외웠어, 알렌 메스티아.”
즐거운 시간은 빨리 흘러간다고 했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주말이 지난 평일 방과 후.
내가 속한 A반과 B반은 강당에서 대본과 세트, 소품을 분주히 제작하고 있었다.
“다 외웠으면 합이나 맞춰보자.”
“알았어.”
의자에 앉아 소리를 내 대본을 읽던 비비안에게 연기 합을 맞춰보자는 알렌.
이를 흔쾌히 수락한 비비안은 대본을 의자에 놔두며, 먼저 대사를 내뱉었다.
“로미오. 당신은 왜 로미오인가요?”
애절한 비비안의 목소리는 모두가 돌아볼 정도로 호소력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저기, 비비안 아락시스. 목소리는 참 좋은데... 그 표정은 어떻게 못 하는 거냐?”
“...내 표정은 뭐 어때서?”
청백색 소녀도 자신의 표정을 눈치채고 있던 것일까.
뜸을 들이며 반론하는 것이 이 나이대의 소녀다운 반응 같았다.
“어차피 합만 맞추는 건데, 표정 연기까지 할 필요가 있어, 알렌 메스티아?”
“뭐, 그렇긴 하지. 그럼 다시 해보자.”
한쪽 무릎을 꿇어 비비안을 올려다보는 알렌은 손을 슬며시 들었고.
비비안도 살짝 손을 내리며 알렌과 합을 맞추며 살짝 손가락이 닿았다.
“...!”
알렌의 손가락이 닿으니 비비안은 기겁한 채로 놀라며 무섭다는 듯이 손을 등 뒤로 감춘다.
이를 본 학원생은 무슨 일인지 관심을 두지만, 이내 하고 있던 일로 돌아가며 열심히 세트를 제작할 뿐이었다.
“...미, 미안해.”
“뭐가 미안하다는 거냐? 아마 정전기가 올라와서 그런 거겠지.”
두려움이 녹아든 사죄.
바지를 털며 일어서는 알렌을 보며 겁에 질린 얼굴로 살짝 뒷걸음치는 비비안.
‘과거로 돌아가서 트라우마를 없앨 수 있으면 좋겠네.’
겨우 손가락이 닿는. 아니다.
솔직히 내가 반대로 비비안의 입장이었으면, 남자가 다가오기만 해도 기겁하며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에 그만한 일을 당할 뻔했는데도 멀쩡한 척하는 비비안을 보니 감탄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당할 뻔했으면 아마, 아니, 평생 트라우마에 휩싸여 미쳤거나, 안 된 말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누가 끔찍한 상처를 잊을 수 있을까?
“되도록 사람들과 닿지 않게 대본을 수정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고마워, 알렌 메스티아.”
“이번이 두 번째인가?”
“뭘?”
“고맙다고 한 거. 체육 창고에서 한 번. 그리고 지금이 두 번.”
“...미안하지만, 먼저 돌아가도 될까...?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럼 같이 가자. 바래다줄게.”
“괜찮아. 내가 혼자서 못 걷는 것도 아니고, 됐어.”
“방과 후, 모두가 노는 것도 참고 열심히 연극 제작에 참여하는데 혼자만 빠지면 모양새가 조금 그렇잖아?”
사실 비비안이 여주인공이 됐다는 사실에 불만인 여학생들이 많았다.
이렇게 방과 후에 홀로 내뺀다면 무슨 질타를 받을지 모르니 일단은 나랑 같이 가서 합을 맞춘다는 변명을 둘러댈 수는 있지 않은가.
“알았어...”
비비안도 이 사실을 알았기에 알렌의 의중을 알며 허락한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며 급식들을 감독하는 코델리아에게 다가가는 알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가?”
“강당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해서요. 비비안이랑 같이 바깥에서 합을 맞춰도 될까요?”
“바깥에서? 알았다. 허락하마.”
뜻밖이었다.
전에는 무슨 이유를 대라며, 굳이 나갈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었던 그녀였지만.
며칠 전에 한 달밤의 산책에서 원하던 대답을 들었기 때문일까?
“신기하네요.”
“무슨 뜻이지?”
“예전에는 술 드시고 울고불고 다른 여자한테 가버리는 건 아니냐며 울던 분이. 이렇게 쉽게 허가해주시니 놀랄 노릇 아니겠습니까?”
“나는 믿으니까. 알렌, 너를 믿어.”
해탈의 경지? 아니면 알렌을 향한 굳은 믿음을 내보이는 걸까?
알렌을 궁극적으로 믿는다는 미소를 보이는 코델리아는 어쩐지 한 차례 성장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있는, 어이없는 착각으로 내 뒤통수를 술병으로 쳤던 게 엊그제 같은데... 결혼이란 위대하면서도 무서운 거구나.’
불현 듯 예전에 어떤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봤던 글이 떠올랐다.
-니들은 결혼하지 마라...
ㄴ왜?
ㄴ그냥하지 마 씨발 새끼야.
그때는 그냥 웃으면서 넘겼는데...
생각하니 웃으면서 넘길 일이 아닌 것 같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럼 다녀오세요, 알렌 주인님.”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
“코델리아 선생님은 조금 무서운 선생님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코델리아의 악명이 자자했던 것인지, 비비안마저 코델리아를 무서운 선생님으로 인식하는 모양이다.
“무섭기는. 그냥... 귀여우신 분이지.”
“...저기 말이야.”
“왜?”
“저번 주말에 크리스틴 언니랑 만났어?”
“만났지. 저번에 말해주지 않았나?”
“둘이서 정말 식사만 한 거야?”
알렌을 향해 추궁하는 의심 섞인 비비안의 목소리.
“내가 너한테 일일이 다 말해줄 의무는 없잖아.”
“듣고 싶어.”
몇 분 전에 겁에 질려 떠는 목소리가 아닌 정말로 강단 있는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직설적이시네. 별거 없었어. 점심 먹고,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거리 돌아다니다가 비가 와서 어쩔 수 없이 돌아왔어.”
“그게 끝이야?”
“그럼 뭐가 더 있겠어?”
“얘기해줘서 고...”
비비안은 아차 싶었다.
‘감사’
강당에서도 고맙다는 말을 해서 놀림을 받았는데 또다시 놀림을 받기는 싫었다.
“지금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지?”
“아니. 그런 적 없어.”
알렌의 말을 딱 잘라 답하는 비비안은 빠른 걸음으로 앞을 뛰쳐나간다.
“고맙다면 고맙다고 하면 될 것을. 보는 사람이 더 민망하다, 야.”
“아니. 쑥스러워한 적도 없는데?”
빠른 걸음으로 달아나는 비비안을 뒤쫓는 알렌은 싱글벙글 웃으며 비비안을 이때다 싶어 놀리기 시작했다.
“좀 더 솔직해지자, 우리. 고맙다는 말이 뭐가 어렵다고 그래?”
“아, 아니라니까...! 누가 고맙다고...!”
비비안은 적잖게 당황했다.
끈질긴 금발의 소년.
평소였다면 대응하지 않고, 공기 같은 남자를 무시했을 터.
그러나 이상하게도 금발의 소년과 대화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를 잡은 벽이 허물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알았어. 이 얘기는 그만. 잘 가, 비비안 아락시스. 나는 잠깐 시간이나 때우고 다시 강당에 돌아가야 하니까.”
벤치에 앉아 비비안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알레느.
그리고...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괜히 들키면 좋은 것도 없으니까.”
알렌이 앉은 바로 옆 벤치에 다소곳하게 앉는 비비안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답한다.
“어차피 안 돌아갈 거면 연습이나 하자. 스킨쉽 없이 대사만 주고받자. 나부터 할게.”
각각 다른 벤치에 앉은 금발의 소년과 청백색의 소녀는 역할에 몰입하며 정말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답답한 강당을 벗어나 벤치에 앉아 탁 트인 세계에서.
알렌은 대사를 말하는 동안 비비안의 옆을 살짝 훔쳐보았는데.
‘과거의 일만 아니었더라면... 저렇게 웃고 다녔겠구나.’
성녀의 미소라는 건 비비안의 미소가 아닐까 싶었다.
청백색 소녀의 목소리는 귀를 즐겁게 했으며.
청백색 소녀의 미소는 보는 사람을 절로 미소 짓게 하는 아름답고 어여쁜 희망과도 같았다.
"사랑하는 줄리엣... 그대는 여전히, 아니, 웃는 모습이 제일 아름답군요.”
"대사 틀렸어."
"...그래. 틀렸지. 다시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