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6화 〉59-2 비가 오는 주말. (106/116)



〈 106화 〉59-2 비가 오는 주말.


“비가 내리려나...?”

거리를 거닐며 노점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먹던 크리스틴이 우중충한 하늘을 보며 말한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회색 하늘.

거리 노점상들도 어두워진 날씨에 분주히 노점을 정리한다.

“비도 오는데.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

알렌을 보며 쉽게 그치지 않을 비라고, 조금은 아쉽다는 듯이 말하는 크리스틴.

“아쉽네요. 좀 더 같이 있었으면 했는데.”
“놀리기는.”
“설마요. 오늘은 데이트하나 싶었는데. 비가 와서 허탈하네요.”
“요, 어린 녀석이 데이트는 무슨. 그냥 밥이나 한 끼...”
“데이트 맞아요. 제가 권유했고. 크리스틴 선생님은 승낙하셨잖아요. 그러니 데이트죠. 뭐, 이렇게 끝나는  너무 아쉽지만.”

하나둘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 우산 사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렴.”
“제가 갈게요.”
“아니야. 선생님이...”
“돌려 말하기 싫으니까. 딱 말할게요.”
“뭐, 뭔데?”

긴장됐다. 동시에 두근거렸다.

맞닿은 손.
전해지는 온기.
그리고 떨림.

설마. 아니겠지.

아직 이른 감이 있지 않을까?

그것보다 나랑 알렌이 몇 살 차이지? 하나, 둘...

아니지. 나는 선생이고, 알렌은 학생인데... 이런 금단의 사랑 같은 관계인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괜히 소문나면 사람들 시선을 감당할 수 있을까?

혹시 도둑년이라고 삿대질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만약. 만약에...

감안하고 사귄다고 하면 그때는 후작님에게 미리 인사드려야 하나?

아이는  명이...

“하얀색 스커트라 젖으면 큰일 나잖아요.”
“응?”
“소재가 얇아서 비에 젖으면 다 보이잖아요. 제가 다녀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얀색 스커트가 젖으면 큰일 난다는 알렌은 곧장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우산을 사러 뛰쳐나간다.

그리고...

“흐으으음...! 더워라... 엄청 덥네...”

점차 비가 쏟아지며 후덥지근한 열기가 서서히 올라왔다.

****

“옆으로  오세요.”
“괜찮은데... 그것보다 어깨가 젖어서 어떡하니?”
“그러게요. 제가 감기 걸리면 나중에 간호해주시면 되잖아요.”
“능글맞기는. 그런데 알렌.”
“네.”
“갑자기 운동은 왜 하는 거니? 혹시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니?”

크리스틴은 운동하는 이유를 묻자 알렌은 잠시 고민했다.

엘프 마을. 그리고 노인.

운동하는 목적, 강해지는 목적은 명백했다.

노인의 비정상적인 강함.

그리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노인과는 다시 만날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일부로 놓아준 것도 심히 거슬리기도 하고.’

“그냥. 운동하면 건강해지잖아요. 얕보일 일도 없고.”
“저번에 했던 대련에서. 혹시 웰턴 때문에 그러니?”
“설마요. 제가 발라버렸는데요. 웰턴 녀석은 아무것도 아니죠. 지금의 저에겐.”

이제 웰턴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며 큰소리치는 알렌이 귀여웠던 걸까.

크리스틴은 능글맞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이. 그때는 알렌이 이겼겠지만, 만일 검이었으면 알렌이 크게 다쳤을 거야. 웰턴은 모든 무에 능하지만, 특히 검은 달라. 마치 살아있다고 해야 하나? 나도 상대가  될 정도니까.”
“저번에는 비비안이 최고라고 하셨으면서, 이번에는 웰턴입니까?”
“비비안은 아직 검을 잡은 기간이 짧지만, 웰턴은 달라. 나도 검술은 자신 있지만, 웰턴 만큼은 아닐 거야.”
“그 녀석이 그렇게 강해요? 처음 알았는데?”

조금 놀라웠다.

대련에서도.
교실에서도.

질질 짜면서 나한테 복종했다는 녀석이 맞나 싶었다.

내 검을 자처하며 나를 지키는 검으로 살아간다는 녀석의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쓸만한 장기 말이 하나 들어왔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크리스틴의 입에서 웰턴이 검을 들면 그토록 강하다는 말을 들으니 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르스나 가주 님께서 장남이 아니라 삼남에게 가문을 물려준다고 했으니까.”
“하긴. 차남도 아니고, 삼남에게 가문을 이으라고 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죠.”

점차 강해지는 빗줄기였지만, 크리스틴과 나는 아카데미에 도착하기까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벌써 다 왔네.”
“그러게요. 아쉽네요. 좀 더 크리스틴 선생님이랑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아카데미의 교문.

어느새 도착한 그들은 조금은 아쉬운 표정으로 서로 바라보았다.

“이대로 헤어지는 것도 아쉬운데.”
“어쩔  없잖니. 비는 오고. 학교에 도착했고. 아쉽지만 헤어져야지.”

크리스틴의 말이 맞다.

비는 오고, 학교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각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크리스틴 선생님.”
“왜 그러니?”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알렌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한 걸음 나아갈지. 아니면 유지할지.

“왜 그래?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서 들어가죠.”
“무슨 할  있던  아니니? 말해 보렴.”
“나중에.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뭔가 좀 그렇네요. 비도 오고.”
“흐으응. 설마 고백하려는 건 아니지? 그치?”

장난스러운 말과 함께 알렌을 볼을 찌르는 크리스틴.

그러나 알렌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왜... 아무 반응이 없니...?”

살짝 떨리는 목소리.

크리스틴은 볼을 찌른 손을 느릿하게 내려놓지만, 알렌은 그 손을 도망치지 못하도록, 손목을 잡으며 진지한 얼굴을 한다.

‘아니겠지? 설마 고백...?’

알렌에게 잡힌 손을 뿌리칠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붙잡힌 손목이 뜨거웠다.

겨우 진정된 심장이 급히 뛴다.

빗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이러다 심장이 터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여기, 우산이요.”
“...우산?”
“젖으면 감기 걸려요.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

크리스틴 손에 우산을 쥐여주고는 쏟아내리는 비를 맞으며 뛰는 알렌.

오늘 반응을 보면 호감도는 얼추 80%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공략하지는 않을 거다.

비비안을 공략하기 위해 합동 축제 및 오리지널 스토리로 연극을 준비하는데.

굳이 호감도가 높은 크리스틴을 공략하기는 위험이 컸다.

자칫 크리스틴과의 관계를 비비안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골치 아파지니까.

그래서 자중했다. 괜히 긁어부스름을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

기숙사 입구에 도착한 알렌은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는.

알렌의 온기가 남은 우산을 든 크리스틴은 그저 멍하니.

기숙사로 들어가는 알렌의 모습이 보이질 않자 두 손으로 우산을  쥐며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진이 빠진다.

기숙사가 아닌 비밀 공간 침대에 누우니 노곤한 잠기운이 슬며시 몰려왔다.

딱히 아무것도. 그저 점심이나 먹고 가볍게 거리를 돌아다녔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피곤했다.

‘클로 세로나 만날까? 조금 이르지만.’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며 다시금 눈을 뜨니 익숙한 공간이 펼쳐졌다.

[이른 시간이로구나. 웬일이더냐?]

사색에 잠긴 클로 세로가 왕좌에 앉은 채로 알렌에게 묻는다.

“그냥, 심심해서 왔습니다.”
[여간 할 짓도 없는 모양인 게로구나? 본좌가 네놈의 심심풀이라도 된다는 것이더냐?]

조금은 서운한 것일까.

클로 세로는 뚱한 목소리로 알렌을 타박한다.

“그럴 리가요. 제자가 어찌 하늘 같은 스승을 심심풀이로 여기겠습니까?”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가 않을 터인데. 쯧]

클로 세로는 알렌의 입에 발린 소리에 짧게 혀를 차고는 왕좌에서 내려온다.

[심심하다고 했으니 따라오너라. 오늘도 그런 플레이를 원해서 온 것이 아니더냐]
“네? 그냥 심심해서 오긴 했는데, 딱히 섹스까지 할 생각은 없는데요? 혹시 쌓이셨습니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클로 세로가 알렌의 말을 듣더니 금세 얼굴이 벌게지며 헛기침을 한다.

[흐, 흐흠...! 쌓이기는 누가, 본좌가 그런 행위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흐흠...!]

요 며칠은 수련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니 이제는 보지가 근질거려 원하게 된 것일까?

그녀의 모습을 보니 어째 장난을 치고 싶었다.

알렌은 클로 세로 뒤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껴안자 경기를 일으키듯 놀라며 꼬리가 요동쳤다.

[뭔 짓이더냐...?]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다.

“저랑 정을 나누고 싶으십니까?”
[...시끄럽다. 불경하게. 감히 스승에게]
“오늘은 제가 아주 달콤하게 유혹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간 행했던 것들이 별거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죠.”
[그딴 감언이설에 넘어갈 본좌가 아니다]
“스승이라는 분께서 제자를  믿으십니까?”
[본좌에게 믿음을 준 적이 있더냐?]

‘태극권 오지네. 뭐만 하면 다 받아치니.’

그렇다고 한들. 기대한다는 듯이 살랑이는 꼬리는 솔직한 모양이다.

“저는 스승을 믿는데, 스승은 제자를  믿으시다니. 섭섭합니다.”
[달변이로구나. 입을 놀리는 것이 아주 달변이야]
“스승의 명에 응하는 것도 제자이니 제가 오늘은 기분이 날아갈 정도로, 봉사를 받고 있는 귀족 영애처럼 대우해 드리겠습니다.”

클로 세로의 흘러내리는 홍염의 머리칼을 만지며 귓가를 속삭이는 알렌.

[정... 그렇게 원한다면야. 못 들어줄 의향도 없지. 허나, 본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그때는 네놈도 잘 알 것이라 믿겠다]
“그럼요. 누구 앞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런데 르카네 님은 없으신가 보네요?”
[그 계집은 진작에 돌아갔다. 그러니 얼른 가자꾸나]

새초롬한 얼굴로 빨리 가자며 알렌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클로 세로.

그 모습을  알렌은 일명 공주님 안기로 클로 세로를 품에 안으며 침실로 걸어갔다.

“어떻습니까?”
[...못 본 사이에 잔재주가 늘었구나. 하지만 네 정성이 갸륵하니 이번에는 봐주도록 하마]

붉어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얼굴을 돌리는 클로 세로.

그와 별개로 여전히 꼬리는 신이 난다며 붕붕 소리를,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기뻐했다.

'솔직하면 참 귀여운 양반인데. 뭐, 그게 매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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