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59-1 비가 오는 주말.
요 며칠은 꽤 바빴다.
새로운 시나리오와 배역 문제, 소품, 세트까지.
불과 몇 주 남지 않은 시간이었기에 모두가 바빴다.
간혹 트러블이 일어나 머리가 지끈 아팠으며, 시답잖은 문제에도 예민하게구는 급식들을 중재하며 진행하려고 하니 진짜 힘이 들었다.
바쁜이번 주 평일을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져 왔지만, 그래도 오늘은 아니었다.
주말 아침.
쉴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던 걸까?
아니면 시끄러운 급식들과 엮이지 않는 것이 다행인 걸까?
기숙사 침대에서 일어나씻지도, 갈아입지도 않은 채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크리스틴 선생님도 하루도 쉬지 않고 운동하는 건 좋지 않다고 했으니.’
그날 이후로 나는 크리스틴에게 세세한 운동을 배웠다.
뛰는 법부터 시작해서 어떤 운동을 해야 체력과 근육이 넓어지는지 아주 세세할 정도로 배웠다.
‘이래서 트레이너가 필요한 거구나. 이래서 헬린이한테 PT를 추천하는구나.’
별거 아닌 생각과 함께 복도를 거닐며 도착한 식당.
식욕을 돋우는 향기에 비해 주말 아침이라 그런가 급식들은 꽤없었다.
‘축제 준비 때문에피곤해서 침대에서 퍼질러 자나 보네.’
그러거나 말거나 알렌은 아침 식사 주문과 함께 의자에 앉아 오늘 할 일을 떠올린다.
‘아침 먹고, 대본 정리하고, 크리스틴을 만나러 가면 되려나? 점심때 만난다고 했으니 조금 빠듯하겠네.’
아침을 먹는 사람이 몇 없어서 그런지 금세 완성된 아침 식사 카트를 끌어 테이블에 올려뒀다.
‘오늘은 같이 점심 먹는다고 했으니 적당히 먹어야지.’
총 열 접시.
알렌에게 있어 별로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기겁할 정도로 대단한 양이었다.
이 때문인지 알렌은 학원생, 식당 직원 사이에서 남몰래 미남 대식가로 불리기도 했다.
주로 여성 한정이지만 말이다.
“배고픈데... 참아야지, 뭐.”
어느새 다 비운 그릇을 카트에 쌓으며 배고프다 중얼거리는 알렌.
적당히 먹은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어쩔 수 없나. 점심때 많이 먹는 수밖에...”
****
긴장된다.
전장에 처음 나갈 때 이후로 이렇게 떨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괜찮겠지? 수녀복 이후로 치마는 입어본 적이 없어서 어색하네...”
가게 앞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크리스틴은 부끄럽다는 듯이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를 정리한다.
오랜만에 입은 스커트.
그냥 평소처럼 바지를 입어도 됐는데...
그래도 되는데... 오늘은이상하게 입고 싶었다.
옷장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스커트를 입어보고 싶었다.
‘왜 이러지. 기껏 밥이나 한 끼 먹는 건데. 뭘 이렇게 차려입었지... 안 어울리는 것 같아.’
저마다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웃음이 왠지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선머슴 같은 계집이 왜 스커트를 입는지.
선머슴 같은 계집이 왜 꽃단장하고 나왔는지.
그들의 각자 즐거운 웃음이 내게는 그저 나를 향한 비웃음으로 들렸다.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서, 아니, 시간이 촉박하니근처 가게에서 바지를 사서 입자.
그래. 그러자.
“뭐 하세요?”
“아니. 오랜만에 입는 스커트라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 언제 왔니?”
“방금 이요. 그런데 스커트 잘 어울리시는데요? 색다르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잘 어울려요, 크리스틴 선생님.”
“고, 고마워.”
알렌의 칭찬에 크리스틴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제가 먼저 나오려고 했는데, 일찍 나오셔서 조금 놀랐어요. 스커트도 그렇고.”
“역시... 안 어울리지?”
또 다시 스커트에 대해 되묻는 크리스틴.
그러나 알렌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크리스틴의 모습을 보며 말한다.
“그거 아세요? 저는 거짓말하면 얼굴이 빨개지거든요. 그리고 스커트 잘 어울려요. 음... 비유하자면 청초한 시골 아가씨?”
“에이, 뭐야. 이럴 때는 영애라고 해줘야지.”
“그래도 예뻐요.”
매번 이렇다.
훅 들어오는 그 말이.
별거 아닌 말이라 할지라도 내 심장을 얼마나 두근거리게 하는지, 이 아이는 모른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했다.
전장에서 도망친 적도 없는데, 그들의 비난 섞인 조롱은 사람을 죽이는 것에 비해 별거 아닌데도 나는 도망쳤다.
무서웠다.
영웅이라 불렸지만,사실은 아니었다.
그저 칼을 잘 쓰는, 전장을 휩쓸고 다니는 내게 기분이라도 내라면 붙여준, 비아냥거리는 별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기사단을 떠나 나는 정치 없이 떠돌았다.
사람들을 도우면 뭐라도 달라지진 않을까? 싶은 생각.
흡사 자기만족이었다.
나약한 자를 도와 감사를 받으며 자신감을 얻는.
나는 그런 여자였다.
하지만얄팍한 자기만족을, 잘못된 방향으로 자신감을 얻는다 한들, 모든 것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 경력을 살려 모두를 가르칠 수 있는 아카데미에 취직하기로 했다.
처음엔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순진한 아이들을 가르치며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건 아닐까 싶은 그런 불순한 의도.
하지만 말이다.
비겁하고 욕보이게 하는 악의보다 순수한 악의가 더 무서운 법이었다.
귀족. 아카데미. 소년 소녀.
분노, 시기, 질투,원망.
그들이 나를 향한 악의는 더럽고 추악했으나.
가르치는 학생들의 악의는 너무나도 순수했다.
죽고 싶었다.
밤마다 속삭이듯이.
눈을 감으면 절로 떠오르는 무참한 전장의 광경이.
내가 죽인 이들은 내가 가르치는 소년 소녀들의 얼굴과 목소리로 나를 순수하게 짓밟았다.
매일 생각했다.
내가 수녀원에 남았더라면.
검을 쥐지않았으면.
애초에 마을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이랑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마저도 등을 돌려도망친다면... 나는 다시 누군가의 앞에 설 수 있을까?
참았다.
참는 것이 답이라 여기며 나는 마음을 죽이고, 활발하게 웃으며 나는 서서히 마음을 죽였다.
오늘도 소년 소녀들의 조롱을 듣고는 마음을죽여무덤덤한 모습을 연기하며 심장이 식어갈 때였다.
짜증이 다분한 목소리.
나를 거론하지 않은 폭언.
처음이다.
누군가가, 나를 천하게 여기지 않는 금발의 소년이 성을 내며 나를 변호해줬다.
처음 받아보는 순수한, 타산적이지 않은 호의.
아직 어리지만 당찬 그 포효는 내 죽어가는 내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나는 이 아이의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용기가 난다.
아무리 나를 조롱하고, 출신으로 욕보이며 손가락질해도 이 아이가 나를 지켜줄 것만 같았다.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자, 잘 모르겠네. 뭐가 좋을지.”
“그럼 제가 아는 가게로 가요. 거기가 맛있어요.”
처음일지도 모른다.
이 고동이. 이 떨림이 내게는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진정하자.
****
“저거, 알렌 아니야?”
“비슷한 사람이 아닐까요? 금발은 흔하잖아요.”
따가운 햇볕을 대비하듯 챙이 넓은 모자.
새까만 선글라스를 쓴 두 여인이 익숙한 듯한 소년을 보고 잠시 고민한다.
“그렇겠지? 하긴 저렇게 키가 크지 않았으니.”
“맞아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재봉점에서 주문한 완성된 교복이 담긴 백을 들며 나온 아리아나가 두 여인에게 묻는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 고마워 아리아나. 이렇게 같이 어울려줘서.”
“아닙니다. 두 분의 시중을 드는 것은 당연하니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에블린 님, 로자리아 님.”
“이게 교복인가요? 부드러운 재질이네요. 그렇죠, 장로님?”
“그렇구나. 확실히 달라. 우리가 입던 의류와는.”
백 안에 든 교복을 구경하며 만지는 엘프들은 신이 난 목소리를 낸다.
“아리아나.”
“네, 에블린 님.”
“이건 우리가 들게.”
“아닙니다. 제가 어찌.”
에블린은 갑자기 두 손을 펼쳐 들었다.
“나는 두 손이 멀쩡해. 그런데 친우에게 감히 내 짐을 들라고 할 수 있겠어?”
“맞아요. 아리아나 씨. 이건 우리가 들게요.”
“두 분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아리아나에게 백을 건네받은 두 엘프.
그리고 에블린은 안에 든 교복을 보며 남몰래 웃음을 참으며 얼굴이 씰룩거렸다.
‘내가 교복 입고 짠하고 나타나면 놀라겠지?’
축제.
알렌의 부하이자 동생에게 들은 정보에 따르면.
앞으로 2주 후에 축제가 열린단다.
그러면 몰래 교복을 입고 들어가서 알렌과 함께 축제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되네...”
들리지 않을 혼잣말을 한 에블린은 교복을 보며 배시시 웃는다.
****
“잘 먹는구나?”
“맛있어서 그런가 봐요.”
“아무리 맛있다고 한들... 스무 접시는 너무 많지 않니?”
쌓여만 가는 접시. 그리고 놀란 표정으로 쌓인 접시를 치우는 종업원과 주위 손님들까지.
예절을 지키며 점심을 들고 있었지만,쌓인 접시는 뭔가 괴리가 느껴질 정도였다.
크리스틴은 궁금했다. 어떻게 된 위장인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기사단 내에서도 세상을 돌아다니며 많이 먹는 이를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먹으면 살로 가지 않니?”
“오늘은 적게 먹은 것 같은데? 그리고 그만큼 운동하니까 괜찮아요.”
그리 말하고서는 알렌은 다시 손을 들어 종업원에게 요리를 주문한다.
“또 먹게?”
“아침을 별로 못 먹어서요.”
그렇게 총 서른다섯 접시가 비워졌을까.
알렌은 이제야 좀 배가 부르네, 라는 표정으로 물을 마셨고.
크리스틴은 도대체 저걸 어떻게 다 먹었을까, 라는 표정으로 목을 축인다.
“이제 밥도 다 먹었으니 어디 갈까요?”
“다음? 밥만 먹고 헤어지는 거 아니었어...?”
얼빠진 대답을 내놓는 크리스틴의 답에 알렌은 몇 초간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웃으며 말한다.
“밥만 먹고 헤어지게요? 그러지 마시고 소화도 시킬 겸 조금걸을까요?”
“어? 그럴까?”
“싫으시면 뭐, 어쩔 수 없고요.”
“아, 아니야. 걷자. 나 걷는 거 좋아해.”
“그럼 먼저 나가 계세요. 계산은 제가 할게요.”
“아니야. 내가 선생님인데 내가 사야지.”
“싫은데요? 제가 권유했으니 제가 사는 게 맞아요.”
두 사람은 한참을 계산 문제로 실랑이 벌었지만.
결국에는 알렌에게 설득당한 크리스틴은 조용히 식당을 나오고 그 뒤로 알렌이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왔다.
“내가 계산한다니까.”
“그럼 다음에는 크리스틴 선생님이 사주세요. 그럼 괜찮죠?”
“그래. 그 대신에 아까처럼 많이 먹으면... 조금 그런데. 자중해야 한다?”
“에이. 성장기 소년한테 자중하라뇨.”
“신기하네. 그렇게 먹었는데도 배가 안 나오다니.”
의미심장한 말투로 허리를 살짝 숙여 알렌의 멀쩡한 배를 보는 크리스틴.
“만져보실래요? 나왔나, 안 나왔나?”
“얘, 얘는 남사스럽게. 어떻게 바깥에서...”
숙였던 허리를 급히 펴는 크리스틴은 살짝 민망하다는 듯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그럼 걸을까요?”
“그래, 걷자.”
햇살은 맑았다. 하지만, 구름은그렇지 않았다.
‘비라도 오려나?’
우중충한 먹구름이 저 멀리서 바람을 타고 다가오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