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58-1 새로운 연극 준비.
“희한한 일이야. 나를 프린세스처럼 키우려는 클로 세로가 나를 쫓아내다니.”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온 알렌은 가볍게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며 무의식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르카네라고 했던가. 게임에서는 안 나와서 모르지만, 자세히 알아보는 편이 좋겠지. 추후 어떤 영향이 미칠지 모르니.’
르카네라는 존재는 오늘 처음 알았지만,어딘가 모르게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았다.
‘미라이랑 닮았어.’
미라이 미레이. 르카네.
둘의 공통점은 외견이 비슷.
그리고 마나의 파장이 비슷했다.
‘오늘 물어볼까? 아니야. 말하기 전까지는 그냥 놔두자. 괜히 얽혔다가는 힘들 뿐이니.’
“오늘은 빡세게 뛰어야겠다.”
스트레칭이 마친 알렌은 오늘은 마나를 한계까지.
육체가 허용할 수 있는 최대치의 마나를 몸에 두르며 운동장을 천천히 질주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마나를 한계까지 허용한 신체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겨우 두 바퀴를 뛰었을까.
알렌은 황급히 마나를 거두어 느릿한 발걸음으로 쓰러지듯 벤치에 털썩 앉는다.
“한계까지는아직 무리인가?”
심하게 떨리는 손을 쳐다보며 알렌은 아쉽다며 한숨을 내쉰다.
약하다.
마나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지만, 육체가 너무 약하다.
수련을 게을리한 적도, 빠진 적도 없지만, 너무 약했다.
태생이 주인공친구 포지션이라 그런 걸까.
지금이야 어느 정도 몸이 만들어져 형태를 이루고는 있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그저 마법만 사용한다면 모를까, 내게는 목표가 있었다.
죽기는 싫다.
주인공 친구 포지션이자 주인공의 일회용 총알받이가 되기는 싫었다.
스토리가 많이 뒤바뀌는 중이었지만,아직은 모른다.
어떤 이벤트로 인해 역전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마법만 잘 쓰는 얼간이가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마법과 격투에서도 유능한 인간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이유지만,
마법사라는 착각을 일으켜 상대방을 주먹으로 두들겨 패는, 그런 마법사가 되고 싶을 뿐이다.
“매일 새벽마다 운동장을 뛴다는 소년이 있다고 들었는데. 알렌이었구나.”
“크리스틴 선생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수업할 때 입는 복장과는 다른.
검은색 스포츠 브라와 다리에 착 달라붙은 레깅스를 입은 크리스틴이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섹시하네. 역시 운동미, 건강미 넘치는 미인은 왠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네.’
“그런데 벌써 끝났어?”
“아뇨. 뛰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몸이 안 따라주네요. 근육도 아프고.”
“어디가 아픈데?”
“전체적으로 아픈데 심한 건 손이에요.”
벤치에앉아 아프다는 떨리는 손을 살짝 흔드는 알렌.
“마나를 써서 달렸구나?”
“네?”
“아니야?”
“맞긴 맞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기사단 내에서도 마나를 너무 무리하게 쓴 나머지 전신 근육통으로 고생한 애들은 많이 봤거든. 그리고 마나를 너무 무리하게 쓴 흔적이 보여.”
그렇게 말한 크리스틴은 벤치에 앉아 알렌의 떨리는 손을 이리저리 주무르기 시작했다.
“흠. 예상대로 마나를 너무 많이 썼구나? 그런데 알렌.”
“네, 크리스틴 선생님.”
“혹시 누가 이런 훈련 방법을 알려줬니?”
“그냥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제가 스스로 고안한 방법이에요.”
그 말을들은 크리스틴은 살짝 웃으며 식은땀으로 젖은 알렌의 볼을 살짝 꼬집는다.
“왜, 왜 그러세요?”
“기특해서.”
활기차게 웃는,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게 하는 크리스틴의 미소.
“나중에 선생님이 좋은 운동법을 알려줄 테니까, 이런 훈련은 이제 금지야. 육체가 마나에 익숙해지면 성장을 더디게 하거든. 절대 금지다?”
볼을 놓으며 좋은 운동법을 가르쳐준다는 크리스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도 모르고 난 매일 뻘짓을 한 건가? 야발...’
“자, 그러면 손.”
크리스틴이 손을 달라는 말에 나는 떨리는 손을 들었다.
“어머, 엄청 심하네. 마나량이 심상치 않구나?”
저릿하던 손을 부드럽게 주물러주는 크리스틴의 손길은 상당히 섬세했다.
극심한 떨림이 그녀의 손길과 함께 재빠르게 사라지니 뭔가 두둥실 한 기분이 들었다.
‘마사지 잘하네... 나중에 마사지 플레이도 해보고 싶네.’
“자, 끝! 아. 그런데 알렌은 이번 축제 때 뭘 하니?”
이런 문란한 생각을 그리고 있을 때, 크리스틴의 마사지가 끝나고, 축제 때 무엇을 하느냐고 내게 묻는다.
“연극 하려고요.”
“연극? 그러면 주제는 뭐니? 고전? 신화? 아니면 로맨스?”
“로맨스요.”
“코델리아 선생님이 잘도 허락해주셨네? 우리 교사들 사이에서도 친해지고는 싶은데쉽게 다가갈 수 없는 선생님이거든. 예전에는 그랬는데. 최근에는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은 유순해진 기운? 이랄까. 그게 느껴지더라. 혹시 사람들 몰래 연애하나?”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조금은 추리하는 표정이 귀여웠다.
‘역시. 크리스틴도 예쁘단 말이지. 건강미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운동하는여자는 좋아.’
감상도 잠시. 알렌은 다시 대화로 돌아와 나지막하게 말한다.
“그 코델리아 선생님이 연애라. 볼만하겠네요.”
“만약 연애한다면 상대는 누굴까? 지적인 남자? 아니면...”
크리스틴은 신이 난다는 목소리로 여러 스타일의 남자를 입으로 나열한다.
‘사실은나다,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이것 참 입이 근질거리네.’
왠지 모를 우월감이 든다고 할까.
교사들도 쉬이 다가가지 못하는 코델리아의도도함을 내가 굴복시켰다고 하니 저절로 자신감이 생기는 기분이다.
뭐, 자신감이야원래 철철넘쳤지만.
“ 나쁜 남자가 아닐까요. 코델리아 선생님이 기가 좀 세시긴 해도 의외로 밀어붙이는 거에 약하... 왜 그러세요?”
멀뚱히 나를 쳐다보는 크리스틴의눈빛에 살짝 당황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자상한 남자가 좋더라.”
“자상한 남자요? 갑자기 왜 취향 커밍아웃을?”
“그냥. 요즘 생각이 많아졌어. 아카데미에 온 지도 꽤 됐는데도, 애들을 가르치며 기쁨을 느끼는데도 마음이 시리네. 외로워서 그런가?”
갑작스러운 외로움 선언에 코델리아는 조금 씁쓸한미소를 짓는것이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주말에 별일 없으시면 저랑 밥이라도 먹죠.”
“어? 주말에 왜?”
“외로우시다면서요?”
“어, 그,그렇기는 한데.”
“그럼 주말에 저랑 만나요. 같이 밥도 먹고 그래요.”
“축제 준비 때문에 바쁘지 않아?”
조금은 당황한 얼굴. 그러나 살짝 기쁨이 배어 나오는, 얼굴 근육을 씰룩이는 조금은 기대하는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축제 대사는 이미 다 외웠으니 괜찮아요. 그러니 저랑 주말에. 같이 식사해요, 크리스틴 선생님.”
부드러이 웃으며 주말 식사를 권하는 알렌.
그 모습을 가까이서 본 크리스틴은 상반되는 마음이 충돌했지만, 이내 욕망을 중요시하며 알렌과의 식사를 마지못해 승낙하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벤치에서 일어난다.
“주말에 같이 식사하는 게 뭐 대수라고... 몇 시에 만날까?”
****
시끌벅적한 교실.
급식들은 여전히 이야기꽃을 피우며 어제 있던, 푸른 마녀 이야기로 한창 달아올랐다.
“알렌님...”
“응, 미라이.”
“푸른 마녀이야기가 뭐길래... 다들 웃음꽃을 피우는 건가요...?”
“귀족 사회. 아니, 세상에 막대한 영향을 준 파급적인 소설이야.”
“소설이요?”
미라이는푸른 마녀 이야기를 모르는 모양이다.
“대부분 여자가 좋아하는 요소가 들어있는 로맨스 소설이랄까.”
“로맨스라면... 사랑이라는 건가요?”
“맞아. 사랑. 한 번도 안 읽어 봤으면 내가 나중에 도서관에 가서 찾아줄까?”
“아, 아녜요...! 저, 저한테는 자극적인 소설인 것 같아서...!”
두 손을 뻗어 적극 손사래 치며 당황하는 미라이.
“아니야. 한 번 읽어 봐. 우리가 연극을 할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미라이와 함께 소설 이야기. 사소한 잡담을 나누는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
“다들 자리에 앉도록.”
열렸던 문이 닫히자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익숙한 목소리가 시끌벅적한 교실을 평정한다.
“곧 있을 축제에 기쁘다는 건 알겠다만, 조금은 자중해졌으면 좋겠군.”
또각이는 하이힐 소리가 멈추자 출석부를 교탁에 내리치는 코델리아는 싸늘한 눈빛으로 급식들을 노려보았다.
“아주 중요한 사항이 있다. 모두 실망하지는 말도록.”
중요한 사항.
무엇일까? 코델리아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급식들의 침을 삼키는 소리가 파도처럼 들려왔다.
“이번 연극 테마인 푸른 마녀 이야기는 불가하더군. 아니, 차라리 기존에 없던 새로운 이야기를 필두로 연극을 완성해 보이라는 교장 선생님의 명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급식들은 한 4초간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깨닫고는 탄식 섞인목소리로 불평하기 시작했다.
“모두 조용. 안타까운 마음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권한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더군.”
안타까운 목소리.
코델리아도 내심 기대했던 걸까?
그렇다고 한들 푸른 마녀 이야기가 안 된다니.
‘이러면 나가린데? 그나마 푸른 마녀 이야기를 택한 것도 비비안이 푸른 머리칼이니까 잘 어울려서 그냥 고른 건데? 그보다 자작극이라니? 교장 새끼 대가리에 총이라도 맞았나? 그러면 다이스도 괜히 불렀네?’
알렌도 예상치 못한 사태에, 교장이라는 변수에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새로운 연극을. 오리지널 연극을 만들 수밖에 없다. 빠듯한 기한이지만.”
알렌은 고뇌했다.
그러나 고뇌도 잠시.
오리지널 연극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코델리아의 말에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코델리아 선생님.”
알렌은 의자에서 일어나코델리아를 부른다.
“왜, 왜 그런가, 알렌 메스티아... 무슨 질문이라도...?”
알렌의 부름에 코델리아는 쵸커를 만지작거리며 달밤의 산책이 기억났던 건지 조금은 부끄러운 목소리로 답한다.
하지만, 이런 코델리아의 진귀한 모습을 지켜볼 겨를이 없는 학생들은 푸른 마녀 이야기가 불가하다며 볼멘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오리지널 연극이면 시나리오는 제가쓰겠습니다. 예전부터 작가가 꿈이었거든요.”
물론 구라다.
어차피 푸른 마녀 이야기연극을 못할 바에는, 누군가가 시나리오를 쓸 바에는 내가 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그러는 편이 비비안을 공략하기 더 편하기 때문이다.
“좋은 시나리오가 있는 건가?”
“네. 그래도 최종적으로는 교장 선생님께서 결정하시니까, 제가 직접 교장 선생님에게 시나리오를 들려 드리고 허락을 맡으면 어떨까요?”
“...알았다.일단 교장 선생님께 물어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코델리아 선생님.”
알렌의 머릿속은 지금 수많은 이야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께 보고드리기 전에 나도 이야기를 살펴 검토하고 올려도 좋은지 확인해보겠다. 그러니, 방과 후에 시나리오를 들고 나를 찾아오도록. 알겠나, 알렌 메스티아?”
“네. 코델리아 선생님.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재밌는 이야기를 짬뽕하는, 그런 이야기라면 모두가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게임 세계니까. 뭘 쓰든 아무런 문제는 없겠지. 그리고 어차피 나가리 판. 내가 따따블로 먹으면 더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