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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화 〉57-6 축제 준비, 그리고 무의식. (102/116)



〈 102화 〉57-6 축제 준비, 그리고 무의식.

대리석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세 명.

정면 왼쪽에서부터 르카네. 알렌.클로 세로.

보라, 금색, 빨강.

이상하게도 무지개가 연상된다.

“그런데  분. 제 옆에 앉으실 겁니까?”

자신의 팔에 달라붙은 초월적인  존재에게 불편하다는 목소리를 내자, 그녀들은 동시에 알렌을 노려보며 손가락을 동시에 치켜든다.

[저 보랏빛 머리칼만 보아도 화가 치민다만?]
[나도 저 붉은 도마뱀 계집을 보면 정신을 부스러트리고 싶은데?]
“...네. 그냥 그대로 앉죠. 싸움은 별로 좋아하니까요.”

두 명의 유녀가 내 팔에 달라붙는 모습은 흡사 어린 딸이 생기면 이러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귀여웠다.

그러나 작은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 그러면 어디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음... 아! 그래.  처음 불도마뱀을 만난 이야기부터 할게. 때는...]
[불가. 시답잖은 말을 뱉을 바에, 차라리 이곳에서 나가라]
[까탈스럽기는. 그렇다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그 원인을 이야기하지!]

르카네가 살짝 손을 들자 웬 이질적인 어둠이 아른거리며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클로 세로. 그 전쟁은 내 의지가 아니었어]
[네년의 의지가 아니라고 지껄이는 것이더냐 지금?]

왼팔이 뜨겁다.

어찌나 뜨거운지 이러다가 내 팔이 숯이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쉽게 믿을 수는 없겠지. 나라도 그럴 거야. 하지만 이것만큼은 진실이야]
[그 말을 어찌 쉬이 믿을 수 있지?]
[나는 설득하려고 이곳에 온  아니야, 클로 세로]
[좋다. 계속 말해보도록]

왼팔을 태울 법한 불꽃이 사그라지자 르카네는 그제야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여타 종족보다 영악하기 짝이 없지.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다, 뺀질아]

진지한 소녀의 목소리.

그러면서도 분노와 후회를 품은 목소리는 어딘가 안쓰럽게 들려왔다.

[인간은 자신이 이루고 싶은 욕망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이는 윤리를, 가난한 자에게서 빵을 훔치는 양심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

르카네는 점점 부정적인 말을 이으며 알렌을 쳐다보았다.

[그런 쓰레기들이 모인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글쎄요...”
[비뚤어진 사상을 품은 최악의 집단이 태어나. 순수한 악의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행보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어]
[그런 쓰레기들의 수장인 바로 저 계집이다, 알렌]
“그렇군요.”
[놀라지 않네? 예상했어?]
“내가 왕년에는  나갔어, 라는 말은 진지하게 안 듣는 스타일이라. 요점만 정리해주시죠.”
[호오... 제자는 스승을 닮는다더니. 아주 천박한 말투를 그대로 빼다 박았구나?]

예상치 못한 알렌의 태도에 르카네의 눈이 꿈틀거렸다.

[시끄럽다. 빨리 알렌의 말대로 요점만 말해보도록]
[자기 말고는 하찮게 여기던 고고한 레드 드래곤이 이렇게 변하다니. 놀라워]

 명의 공세에 르카네는 비꼬듯이말한다.

[그 입을 불로 지지면 조금은 말버릇이 좋아지겠구나]
[내입을 불로 지지면 말을 할 수가 없겠지, 무식한계집아]
“진정하시죠.  분.”

티격태격.

뭐만 말하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 나는 두 존재를 자신이 왜 중재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귀찮네. 애초에 전쟁 얘기 들으려고 한 건데 자꾸 딴소리하고 자빠졌네.’

“그럼 저는 빠지겠습니다.”
[갑자기 왜 빠진다는 것이냐?]
“아니.  분께서 뭐만 하면 으르렁대며 싸우시는데. 굳이 제가 있어야 합니까?”
[참을성 없는 뺀질이네. 알았어. 정리해서 말하자면, 나는 나를 추종하는 녀석들에게 이용당했다. 그것도 아주 무참히]
[내가 아는 존재 중에서 유일하게 간악한 혀로 놀리던 네년이 인간에게, 그것도 추종하는 이들에게이용당했다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르카네의 입에서 이용당했다는 말이 흘러나오자 클로 세로는 사뭇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묻는다.

[그러게. 아무리 간악한 뱀의 혀가 있다고는 해도 내가 이용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럼. 르카네 님을 추종하는 무리 명은 뭡니까?”
[모른다]
“모른다니.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 명도 모릅니까?”
[애초에 인간을 벌레만도 못한 종족이라 여기는 내게 있어 그게 큰 의미가 있던가?]

인간을 벌레만도 못하다는 말을 평상시 친구와 대화하는 말투로 답하는 르카네.

[클로 세로도 나랑 같은 종류야. 다만, 강한 인간 종족이라면 조금은 인격을 인정해주지. 생각하니 우리  쓰레기처럼 살았네?]
[네년과 본좌를 동등이 여기지 마라. 인간을 소모품처럼 쓰던 계집이]
[하하! 불도마뱀. 너도 나랑 똑같아. 약한 종족은 무참히 짓밟아 불태우는 년이, 심지어는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동족마저 살해한 천하의 병신년이 뭐가 잘났다고 내게 감히 그따위 설교를 지껄이지?]

두 존재의 싸움.

그러나 알렌은 별 상관치 않았다.

어차피 말려도 싸우는데, 굳이 말릴 필요가 없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납니다.”
[더 들을 생각이 없는 것이냐?]
“추종하는 사람들의 단체도 모르고. 또 이용당해서 전쟁이 일어났고, 나중에는  당했다는  아닙니까? 그만 일어나시죠, 클로 세로 님.”
[말이 너무 심한  아니니? 팽이라니]
“...저는 혼자서 놀고 있겠습니다. 그럼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

알렌은  존재를 놔두고서는 홀로 자리를 빠져나온다.

[오만한 뺀질이구나. 옛날의 너였다면. 무례한 녀석을 살려둘 리가 없을 텐데. 세월이 흘러 많이 유순해졌나?]

알렌이 사라지자 르카네는 대리석 테이블에 엎드려 클로 세로를 쳐다보았다.

[마음에 든 인간은 쉽사리 죽이지 않는다]
[그래. 마음에 든 인간은 쉽게 죽이지는 않겠지. 그런데 뺀질이 손에 네년의 기운이 담긴 반지가 있던데. 설마 약혼이라도 했어? 순수했던 물의 흔적이  없어진  보니?]
[본좌가 잃어버린 반지를 알렌이 멋대로 낀 것뿐이다]
[그래? 그런 것치고는 뺀질이를 이름으로 부르고, 또 왕좌에 앉아 있을 때도...]

쾅!!

[시끄럽다]
[난폭한 년]

대리석 테이블을 내려치는 클로 세로의 작은 주먹.

그 모습을 본 르카네는 화들짝 테이블에서 얼굴을 뗀다.

[말투와 다르게 여전히 신경질적이야]
[알렌도 없으니 서둘러 이야기를 진행하지]
[뭐가?]
[르카네. 네년이, 비상한 네년이 자신을 추종하는 단체를 모를 리가 없다. 자, 빨리 말하도록]
[내가 치매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일을 당했는데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지]

어깨를 으쓱거리는 르카네는 클로 세로의 물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검은 태양. 웃긴 단체명이지?]
[어린아이가 지을 법한 단체군]
[그렇지? 그런데 그렇지도 않아.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이상한 녀석들 투성이었지. 내가 뭐가 예쁘다고 그딴 놈들에게 힘을 나눠줬을까?]
[내가아는 칠흑의 계집은 남을 쉬이 믿지 않았을 터인데 힘까지 나눠주다니]
[나는 내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인 줄 알았는데. 신기해. 아무리 벌레라고 한들 칭찬하면 좋아하지는  어쩔  없는 사실인가 봐?]

씁쓸한 웃음이었다.

옛 호적수라 불리는 그녀는 보랏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아주 씁쓸히 웃었다.

[너무 과했던 것이지. 너무 심취했던 거지. 나를 숭배하며 우상시하는 녀석들의 끈질긴 혓바닥에 너무 오랫동안 놀아난 거야.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꼴사납지?]
[...멍청했군]
[맞아. 멍청했지. 그래서 인간이라는 종족은 다시는 믿지 않으려고 다짐했지. 다짐했는데 내가 살아난 것도 인간... 아니,  소녀의 도움이 매우 컸지]
[아이러니한 이야기로군. 인간에게 배신당해 죽음까지 갔던 네년이 다시 인간에게 구원받아 살아났다는 건가?]
[처음에는 나와 파장이 맞는 인간을 찾은 건 기적에 가까웠지. 그래서 나를 죽음에 내몰리게 한 녀석들은 찢어 죽이려고 했지. 아니, 죽이지는 않고 아주 처절한 고통을 죽을 때까지 맛보게 셈이었지... 그럴 셈이었는데...]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사실을.

자신을 호적수라고 여기는 불도마뱀이 조용히 듣고 있어주니... 이상하게도 감정이 복받친다.

조용히 르카네의 과거를 들은 클로 세로는 아무런 미동 없이 그저 경청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구한 사연이로군. 한 때는 모든 정령의 두려움이었던 네년이 이렇게나 떨어졌을 줄이야. 네년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너를 죽이려고 그들끼리 다툼이 일어나겠지]
[그러니까. 비밀로 해주면 고맙겠어, 불도마뱀. 나는 평생을 속죄하며 살아갈 거야.  아이가 행복한 인생을 즐길 수 있도록. 후에는 좋아하는 사람과 맺어지는 미래를 원해]
[네년의 업적다운 악행이 말 하나에 사라질 것 같으냐?]
[없어지진 않겠지. 길이 남아 그들의 후세까지 전해지겠지]
[또 소녀의 인생을 불운으로 만들었다고 네년이 죄책감을 느낄 정도 개과천선했다는 말을 본좌가 쉽게 믿을 수는 없지]

당연한 것이었다.

정령과 인간, 심지어 다른 종족까지.

모두가 르카네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은 수를 헤아릴  없었다.

그럼에도 한 소녀의 인생을 망쳤다는 그녀의 말이 마음에 쉽게 닿지 않았다.

진실된 이야기나 오히려 거짓으로, 가식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거 알아, 클로 세로? 종족 관계없이 밑바닥으로 떨어진 자가 어떠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너는 모르겠지]
[그래. 본좌는 모른다. 앞으로도, 평생을 모를 터]
[맞아. 떨어지지 않은 자는 몰라. 하지만 나는 알아. 평생을 정상에서 폭군처럼 살아갔던 나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 소녀를. 그 아이의 인생의나락을 곁에서, 안에서 지켜봤어]

다리를 흔들며 고개를 떨군 르카네는 계속 말한다.

[내가 들어가지 않았다면 행복. 아니, 조금은 힘든 일이 있었겠지. 그래도 역경을 헤쳐나가 열심히 살아가며 곧 행복한 미래를 손에 넣었을 거야. 그런데 나라는 존재가 그 아이를 망친 거야. 처음에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몸을 손에 넣었으니까. 나를 나락으로 떨군 녀석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좋았어. 그런데 아니더라. 정말 아니더라]

흔들던 다리가 바닥에 닿으며 으쓱했던 어깨는 점점 축 늘어졌다.

[인간의 추악함은 내가  알아. 그들은 꼴사나운 모습으로 만들며  모습을 지켜보며 웃는 나였어. 그런데 바닥까지 떨어진 내가 그 모습을 가까이, 당하는 처지에서 보니 정말로... 역겹더라. 과거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내가 너무나도 역겨웠어. 죽고 싶었어. 죽고 싶었는데도 살고 싶더라. 이런 모순적인 말이 어딨을까?]

보랏빛 머리카락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곧 어린 몸뚱어리가 떨리며 흐느끼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뒤늦은 후회지만, 과거의 악행을 유희로 즐기던, 그들의 기억에서는 잊히지 못할 흉터로 남겠지. 나는 비겁해]
[딱히본좌는 너를 옹호해  생각은 전혀 없어. 이미 저지른 악행을 동정심이 묻어난 사연 하나로 마음이 바뀐다니]
[그거 알아, 클로 세로? 내가 말이 진심이면서도 마음 한편에서 잠깐이라도 나를 용서해주지는 않을까? 라는 역겨운 마음이 들었어. 나는 여전히, 앞서 말한 것처럼 너무나도 비겁해]

울었다.

짙은 보랏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모두가 두려움에, 그런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고 즐기던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것도 본좌 앞에서.

본좌를 죽도록 싫어하는 계집이 본좌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모습이 어찌나 안쓰러웠는지 한동안 목 놓아 우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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