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57-5 축제 준비, 그리고 무의식.
코델리아와 달밤의 산책을 마치고 기숙사에 돌아온 알렌은 침대에 누웠다.
‘피곤하다. 다음부터는 산책하러 안 나가야겠다. 너무 귀찮네.’
야외 플레이를 즐기며 코델리아에게 다섯 발이나 사정한 것이 컸던 것일까.
침대에 눕자 잡념은 사라지며 서서히 눈이 감겼다.
[왔느냐]
“네.”
무의식의 세계.
알렌은 무의식에 들어온 걸 더는 당황하지 않고 왕좌에 앉은 클로 세로에게 다가가 오늘은 무슨 수련을 할지 물어보았다.
[요즘은 본좌의 말을 잘 들어 흡족하구나. 헌데 그 옆에 달라붙은 거무칙칙한 년은 왜 달고 온 것이더냐?]
“네? 아무도 없는데요?”
왕좌에 앉아 시큰둥하게 턱을 괴며 내 옆을 가리키는 클로 세로의 말마따나 내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아무도 없었다.
‘장난 까는 건가?’
[아직 미숙해서 모르는 모양이구나. 빨리 나오도록 해라, 칙칙한 계집]
클로 세로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손가락을 튕긴다.
[들키지 않으려고 했는데, 감이 많이 좋아졌구나? 오랜만이야 불도마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걸 보면 너도 명이 참 질기구나]
내 몸에서 알 수 없는 검은 연기가 빠져나오더니 그 연기가 한곳에 모여들어 클로 세로와 서슴없는 대화를 나눈다.
[클로 세로의 드래곤 레어라. 오랜만에 왔는데 차라도 내주겠어?]
[멋대로 들어온 칙칙한 년이 차를 내와 달라고 하니, 웃음이 절로 나오다 못해 헛웃음이 나오는구나]
둘의 대화를 들어보니 친한 사이? 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사이는 아닌 것 같고.
‘클로 세로한테 반말하는 걸 보면 강하겠지? 일단 가만히 있어야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매정하구나, 여전히]
[우리가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만. 알렌. 빨리 칙칙한 계집을 치우도록]
“저기, 죄송한데. 누구십니까 이분은?”
[존칭할 필요 없다. 그저 멍청하게 굴던 계집이니]
[내가 없는 동안 말재주가 조금은 늘었구나? 무식하게 싸우는 계집이?]
무슨 일일까.
감도 안 잡힌다.
검은 연기는 서서히 형태를 이루며 곧 그 안에서는 보랏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소녀가 나타났다.
[인간의 모습은 오랜만이네. 꽤 괜찮아 보이지, 놈팽아?]
“저요? 제가 왜 놈팽입니까?”
[그렇게 보여. 여기저기서 여자나 후리고 다니는 뺀질이]
“후리고 다니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만, 누구시길래 초면에 무례한...”
화르르륵!
르카네에 대해 물어보는 찰나.
왕좌에 앉은 클로 세로의 손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가 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보랏빛 소녀를 바라보는 클로 세로의 모습은 꽤 무서웠다.
[그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 아니, 작은 움직임이라도 보였다간 그대로 태워주마, 르카네]
[여전하구나. 건방진 말투, 남을 쉽게 깔보는 눈빛까지. 뺀질아. 너 혹시 나한테 배울 생각 없니? 이딴 불도마뱀 계집한테 배우면 힘들잖아?]
내 다리에 몸을 밀착시켜 손을 잡고 흔드는 보랏빛 소녀는 저 이글거리는 클로 세로가 두렵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존나 무서운데.
퍼어어엉!!!
촐랑이는 보랏빛 소녀의 몸을 뒤덮는 섬광과도 같은 화염 세례가 터지며 드래곤 레어를 울릴 정도의 진동과 굉음에 황급히 귀를 막았다.
낙뢰와도 같은 굉음이멈추자 알렌은 여전히, 멀쩡히 다리에 달라붙은 보랏빛 소녀를 보았다.
[본좌의 제자에게 눈독들이지 마라, 르카네]
[말로만 경고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로 쏠 줄 몰랐어. 정말 깜짝 놀랐네]
놀란 듯한 말투. 그러나 목소리는 전혀 아니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살짝 감추며 웃는 보랏빛 소녀는 화염 세례는 아무렇지 않게 내 다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제자라는 말은 진짜인가 보네. 이렇게 상처 하나 없이 나만 노린 걸 보면? 아,심장에 뭐가 있구나?]
[희미하게 남은 의식마저사라져 소멸하고 싶지 않다면 떨어지는 게 좋을 거다, 르카네]
[너는 매번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구나]
[너야말로 쓸데없이 혀를 굴려 본좌의 화를 돋우는구나]
멀리서 본다면 나랑 유녀들이 귀엽게 놀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가까이서 보면 전혀 다르다.
나를 방패 삼아 계속 도발적인 언행으로 클로 세로를 빡치게 하는 르카네.
말빨이 조금은 딸리는지 손에 들린 불꽃과 여러 개로 나뉜 창이 타오르며 르카네를 노려보는 클로 세로.
‘시발. 옛말 하나도 틀린 거 없구나.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야.’
알렌은 멍하니 유녀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클로 세로는 우리들의 무의식에.
그 전쟁 이후로 세상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르카네가 버젓이 살아 이곳에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르카네]
[왜 그러지, 도마뱀?]
[그대. 아직 살아있구나]
[영롱한 금색 눈은 장식이야?]
[알렌. 이쪽으로 오너라. 본좌의 제자가, 본좌의 적을 감싸는 행동. 본좌는 허락하지 않았다]
“감싼 적은 없지만, 알겠습니다. 야, 손 놔.”
[뭐? 지금 나한테 야? 내가 잘못 들었나?]
알렌의 다리를 방패 삼아 숨던 르카네가 순간 어이가 없었던 것인지 코웃음 치며 알렌을 올려보았다.
“이런 확 씨! 어디 클로 세로 님한테 깝치고 있어! 저리 안 꺼져!”
[하! 이런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을 제자로 들이다니. 영롱한 금색의 두 눈은 이제 애물단지가 된 건가? 응, 클로 세로?]
[알렌을 모욕하는 건 상관이 없다만, 본좌를 우롱하는 건 참을 수가 없군]
‘뭐지? 이럴 때는 반대 아닌가? 제자가 욕을 먹으면 스승이 적극 변호해주는 거 아닌가?’
달라붙은 르카네를 떼버리고 클로 세로의 곁으로 가자 웬 이상한 논리와 함께 불꽃의 창이 기다렸다며 일제히 르카네의 몸을 꿰뚫었다.
그러나.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르카네에게는 별 타격이 없는 모양인지 여유롭게 하품하는 모습을 보이며 손가락을 치켜든다.
[클로 세로. 너도 잘 알잖아? 너는 나를 못 죽여]
[맞는 말이지. 그러나 무의식에서 쫓아낼 수는 있겠지. 개미만도 못한 마나를 지닌 옛 호적수여]
[클로 세로. 잠깐 기다려. 할 말이 있어]
잠시 할 말이 있다는 르카네.
그러자 일제히 날아가는 불꽃의 창이 르카네의 눈앞에 멈췄다.
[강한 자는 약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법이니, 말해보도록]
[나는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그냥확인만 하러 온 거야]
[또 네년의 주특기인 뱀 같은 혀를 놀릴 셈이더냐?]
[아니. 이번엔 진심인데? 내 말투 때문에 그런가?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로, 아주 정중히 부탁할게. 아무것도 안 해]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 일순 바뀐다.
[본좌가 그걸 어찌 믿지?]
[맞는 말이야. 인제 와서 쉽게 믿어달라니. 내가 생각해도 참 바보 같은 말이야]
진중한 표정은 어느새 다시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와 어깨를 으쓱인다.
“클로 세로 님. 누굽니까?”
[본좌의 호적수였다.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계집이 된 모양이지만]
[미운 정이 많이 들었잖아. 나도 오랜만에 만난 너와 이것저것 얘기하고 싶다고. 또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리고 내가 왜 다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궁금하잖아?]
‘전쟁? 무슨 소리야 야발... 하나도 모르겠네.’
[그 참혹한 일을 벌여놓고 왜 일어났는지 궁금하다니. 네년의 머릿속이 궁금하구나. 좋다. 어디 변명 한 번 들어보자꾸나]
[이제야 말이 통하네. 아, 그리고 놈팽이도 같이 듣자. 우리 이야기 궁금하지?]
궁금하기는 했다.
내가 아는 전쟁이라고는 게임 막바지에서 일어나는 전쟁뿐이 없었으니까.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생각 같았다.
“좋습니다. 아, 그리고 조금 전, 제 무례한 행동에 상처받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물론 위대한 르카네 님은 아랫것이 멋도 모르고 설친 언행은 신경도 안 쓰시겠지만요, 하하!”
[말재간이 뛰어나구나. 그래서 여자들이... 뺀질이를 좋아하는 건가...?]
“네? 방금 뭐라고?”
[누구와는다르게 아주 착하거든, 나는]
클로 세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는 르카네.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구나. 그리고 알렌. 본좌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서슴없이 행동하지 마라]
“클로 세로 님. 아시다시피, 아니,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학자 가문의 차남입니다. 그런데 기록되지 않은 전쟁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는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게임 상에서 전혀 들은 적 없는 두 소녀의 전쟁을.
혹시나 알아두면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알렌은 이빨을 털기 시작했다.
“대륙의 강자인 클로 세로 님께서 탐구열이 넘치는 저를 내치시진 않으시겠죠? 지식을 갈구하는 저는...”
[알았다. 알았으니 그만... 떨어져라... 너무 가깝지 않으냐...!]
한쪽무릎을 꿇은 채로 클로 세로의작은 손을 기도하듯 잡으며 부탁하는 알렌.
그리고 그 모습을 본 클로 세로는 얼굴을 돌리며 부끄럽다는 듯이 화를 내고는 가녀린 발로 알렌을 밀어내며 알겠다고 답한다.
‘불도마뱀 계집 얼굴을 저리 벌겋게 물들이다니. 설마... 무의식에서도 한 건가? 저 자존심 높은 년이? 인간과? 아니겠지?’
그들의 모습을 본 르카네는 내심 불안했다.
‘하필 바람둥이 녀석을 왜 좋아해서는...!’
마치... 딸이 처음으로 좋아한 남자가 사실은 여러 여자나 후리고 다니는 바람둥이라는 걸 안 엄마의 마음이랄까.
‘처음 좋아한 녀석이 저런 녀석이었더라면 극구 반대했을 건데. 이미 늦었나. 하아...’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미라이는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눈에 띌 정도로 밝아졌으니.
그것도 저 녀석 덕... 아니, 때문에.
‘클로 세로는 몰라도 나머지 애들은 미라이 몰래 정리해야 하나?’
[칙칙한 계집. 따라오도록. 그리고 허튼소리로 나를 농락한다면 그때는 잘 알고 있겠지?]
[물론. 누가 영롱한 금색 눈에 거짓을 고할 수 있을까? 제대로 믿어줘, 불도마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