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57-1 축제 준비, 그리고 무의식.
“하아아아아암....!”
늘어지는 긴 하품.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자 그날 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침대 위에서.
양옆에 누워, 각자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자는 그녀들을 무심히 보았다.
‘어제 얼마나 한 거지? 생각이 안 나네.’
분명히 이성을 잃고 욕망에 충실한 그녀들이 내게 달라붙으며 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대로 잤나?’
머리를 긁적이는 알렌은 곤히 자는 그녀들이 깨지 않도록 침대를 조심스럽게 나와 샤워실로 직행했다.
온도를 조절하고 물을 틀자 샤워기에서는 따스한 여러 물줄기가, 밤과 새벽의 잔재가 가득 묻어난 알렌의 몸을 하나둘 씻겨 내려가니 잠이 싹 달아나며 머릿속이맑아졌다.
‘운동이나 해야겠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알렌은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그녀들을 보았다.
‘또 하고 싶네.’
샤워실에서 결심했던 운동 욕구가 점차 옅어지면서 살짝 움직일 때마다 아슬한 부분을 가리는 이불을 걷어버리고 싶었다.
“됐어. 그냥 운동이나 해야지.”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을 입고는 알렌은 아직 꿈나라에 빠진 아네스를 흔들며 깨운다.
“흐으음... 안녕히 주무셨어요, 주이니이하아아음...”
잠에서 깬 아네스가 비몽사몽 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아침 인사를 건네지만, 상당히 피곤한 것일까.
잠에 덜 깬 채로 커다랗게 하품하며 인사하는 모습이 어째 귀여웠다.
“주인이 나가는데 그 꼴로 배웅하게?”
“네엣? 아, 아뇨?”
부드러운 목소리.
잠에 취했던 아네스가 알렌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선반에 놓인 안경을 집는다.
“다, 다녀오세요, 주인님... 어? 왜, 왜 그러세요...?”
삐뚤게 쓴 안경을 살짝 고쳐주자 당황한 아네스는 뺨을 붉히며 알렌을 바라보았다.
“가, 갑자기 왜 이렇게 다정히...?”
“왜? 내가 다정하게 해주니 어색해?”
“아, 아뇨! 오, 오히려...”
“그럼 됐네. 나중에 보자.”
“아, 네에...! 다, 다녀오세요...”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알렌이 사라진 것을 눈으로 직접 본 아네스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화끈거리는 얼굴을 진정시킨다.
****
비밀 공간을 나와 기숙사로 돌아온 알렌은 어제 입었던 옷을 벗어 체육복을 갈아입고는 수건과 물통을 챙겨 운동장으로 나왔다.
아침.
새벽이 도망가며 노랗게 타오르는 태양이 떠올랐다.
여기저기 등교하는 이들.
여기저기 운동하는 이들.
그리고.
운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청백색 소녀는 벤치에 앉아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는 알렌을 보며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
아무 말도, 생각도 없이.
그저 벤치에 앉아 몸을 풀고는 운동장을 열심히 뛰는 소년을 보는 비비안.
무엇을 위해 뛰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신경이 쓰였다.
한 바퀴, 두 바퀴... 열 바퀴.
지치지도 않는 것인지 점점 속도를 올리며 운동장을 뛰는 알렌의 모습은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어느새 비비안의 몸에 흐르던 땀도 다 식어버린 것을 알아챈 것인지 서둘러 샤워실로 향하려는 그때였다.
달려오는 발걸음과 헐떡이는 숨.
땀에 젖은 소년은 돌아가려는 청백색 소녀에게 다가가며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웃는다.
“좋은 아침이다?”
“알렌 메스티아.”
“그래. 내 이름 알렌 메스티아다. 왜 비비안 아락시스.”
“왜 뛰는 거야?”
뜬금없었다.
왜 뛰느냐는 비비안의 질문에 알렌은 당황하기보다는 오히려 궁금했다.
도대체 청백색 소녀가 왜 자신에게 질문하고 있는 걸까?
‘크리스틴을 음해한 새끼를 패서 호감도가 올랐나?’
비비안이 묻는 의도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운동하려고 뛰는 거지 이유가 있나?”
“알았어.”
“그거 들으려고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냐?”
“아니, 기다리지 않았어. 그저 보고만 있었을 뿐이야.”
기다렸다는 말에 비비안은 무덤덤하게 말하면 돌아서려는 하는 순간.
“샤워하기 전에 밥이나 먹자. 내가 쏠게.”
“알렌 메스티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너와 아침을 같이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이렇게 하자. 어제 내게 고맙다고 했지? 그러면 그 대가로 나랑 같이 아침이나 먹자.”
“어제는 내가 도와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도와달라고 했던가? 네가 멋대로 들어준 거잖아?”
“파렴치한 사람이구나, 알렌 메스티아.”
“나 원래 이런 놈이야. 그러니까 같이 아침이나 먹자, 비비안 아락시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내게 식사 권유하는 소년의 모습은 정말이지 파렴치하다.
막무가내로 어제의 일을, 도움은 원치 않았다면서 그 대가로 자신과 함께 식사하자는 억지가 다분한 소원에 말을 잇지 못했다.
“수건이랑 물통 가져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 말을 남기며 알렌은 서둘러 벤치에 놔둔 수건과 물통을 챙기러 갔고.
비비안은 그런 알렌의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입학할 당시. 크리스틴 언니와 약속한 것이 있었다.
적어도 좋으니 친구를 만들라는 약속을.
아무리 친애하는 크리스틴 언니의 약속이라고 한들 다른 사람과 결단코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내민 손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고, 감히 손을 잡을 수 있을까?
내가 봤던 사람은 모두가 거짓된진실을, 가면을 쓰고 있다.
그저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웃는 가면으로 감추며 나중에는 숨겨둔 진실을 드러내는, 그런 추악한 생물이었다.
알렌 메스티아도 별반 다를 것 없을것이다.
내게 다가와 다른 사람처럼 거짓된 웃음으로 나를 현혹한다 해도 나는 절대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수건과 물통을 챙기는 사이에 무심히 그의 존재를 무시하며 돌아갔으면 되는 것을.
나는 왜 떠나지 않는 것일까.
기대하고 있는 걸까?
저 소년에게 나는 기대를 하게 된 걸까?
“자, 밥 먹으러 가자.”
어느새 돌아온 알렌은 식당으로 가자며 당당히 말한다.
두려움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미소와 목소리.
두려웠다.
믿고 싶었지만, 믿을수가 없었다.
그 미소를 넘어 감춰진 욕망이.
굳게 믿는 내 목을 조르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뭐야? 속 안 좋냐? 안색이 영~ 아닌데?”
무릎을 굽혀 비비안의 안색을 살피는 알렌.
생각에 잠겼던 비비안의 눈동자에는 한껏 자신을 걱정하는 알렌의 모습을 보이자 뒷걸음질친다.
“몸이 안 좋으면 다음에 먹자. 괜히 아픈 사람 붙들고 밥 먹이는 취미는 없으니까.”
“그래... 다음. 다음을 기약하자...”
그렇게 비비안은 떠났으며 알렌은 홀로 그 자리에 서서 떠나가는 청백색 소녀의 뒷모습을 아련히 바라보았다.
청백색 소녀의 어릴 적 트라우마.
남자들에게 안 좋은 일을 당할 뻔한 그 일은 지금껏 그녀를 괴롭히며.
흡사 저주보다 더 추악하고 지독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청백색 소녀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다.
“맛있는 거 먹고, 재밌는 거 보고, 거리도 걸으면서 얘기하면 좋아하려나?”
****
시끌벅적한 식당 내.
알렌은 의자에 앉아 아침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저기 있다, 미라이. 여기 놈팽이 놈이 있어.’
‘응...!’
어색한 발걸음. 하지만 당찬 걸음이기도 했다.
복잡한 식당 내부를, 학생들과부딪치지 않게 조심히 지나가는 검푸른 소녀는 친구의 도움으로 무사히 소년이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아, 안녕... 콜록...! 콜록...!”
오랜만의 만남이라 들떴던 걸까?
검푸른 소녀는 힘을 주며 반가운, 사랑하는 소년에게 인사를 건네려다 그만 사레가 든 모양이다.
그리고 작게 기침하는 소리에 의자에 앉아있던 알렌은 옆을 돌아보았다.
“오, 미라이! 안 나오길래 걱정했는데. 몸은 괜찮아?”
“콜록...! 네, 네...! 괘, 괜찬... 콜록...!”
“잠깐 여기 앉아 있어. 물 가져올게.”
“아, 아니에요...! 괘, 괜찮아졌어요 이젠...!”
손사레치며 괜찮다는 미라이를 보며 알렌은 옆에 있던 의자를 빼내 미라이를 자리에 앉혀 등을 살짝 토닥인다.
“이제 좀 괜찮아?”
“가, 감사합니다, 알렌 님...!”
진정이 된 건지 미라이는 숨을 고르며 알렌에게 인사한다.
“몸은 이제 괜찮아졌어?”
“아, 네에. 오늘부터 나올 수 있어요...”
“다행이네. 이번에 축제가 열리거든. 알고 있어?”
“아, 네에... 친구들이랑 또 선생님들이 알려주셨어요...”
“그러면 다른 반이랑 합동하는 건 알고 있어?”
“다, 다른 반이요?”
알렌은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미라이와 그간 있었던 일은 즐겁게 이야기한다.
“그, 그런데 알렌 님...”
“어, 왜 그래?”
“키가...”
“아, 요 며칠 사이 잘 먹고 잘 자니까 키가 자랐어. 미라이도 나처럼 생활하면 금방 자랄 거야. 아, 아직 아침 안 시켰지? 나랑 같이 먹을까?”
“그, 그래도 되나요...? 제가 괜히 알렌 님 식사를...”
“방금 말했잖아. 나처럼 생활하면 미라이도 금방 자란다고. 아,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가져올게.”
“네...”
식사가 나왔다는소리에 알렌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미라이.’
‘어, 어? 왜, 왜 불러...?’
‘오랜만에 만나니까 좋지?’
'으, 응... 좋아.'
'그러니까 앞으로 수업 빼먹지 말고 잘 들어. 그리고 괴롭히는 녀석이 있으면 말만 해. 아주 지옥 끝까지 보내버릴 거니까.'
'고, 고마워 르카네. 나, 열심히 다닐게...!'
르카네는 즐거워하는 미라이를 보며 내심 안심했다.
방안에만 있다면 더 우울하니까.
기껏 미라이가 스스로 아카데미를 다니는, 그 의도는 불손하면서도 순수했지만, 그런 미라이를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놈팽이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지... 하아.'
'어? 뭐, 뭐가 감사하다는 거야, 르카네?'
'놈팽이 말처럼 잘 먹고 잘 자야 쑥쑥 크는 거야. 알았지?'
'아, 알았어 르카네...! 나, 나 엄청 많이 먹고 커서...! 당당한 모습을... 알렌 님이 나를 부끄러운 여자로 의식하지 않도록 열심히 할게...!'
익숙한 카트를 끌며 하나둘 테이블을 가득 메우는 접시를 보고 놀라는 미라이와 르카네.
“이, 이렇게많이 드시는 거에요...?”
“오늘은 조금 적은 편이야. 자, 미라이도 많이 먹어.”
“네, 네에...”
'미쳤군. 저 녀석을 데리고 산다면 일 년 치 식비가 한 달 치 식비가 되겠어.'
돼지 같은 식성에 놀란 르카네는 미라이와 알렌이 이어진다 해도 저 끝이 없는 식탐에 행여라도 미라이가 고생하는 미래가 절로 그려졌다.
'저렇게 많이 먹는데 체형이 변하지가 않다니. 아니, 애초에 저렇게 먹어서 체격이 커진 건가?'
의문.
르카네는 끊임없이 먹는 알렌을 보며 과거 그녀가떠올랐다.
'호전적인 마나... 역시 불도마뱀 계집이 놈팽이와 계약한 건가? 그렇지만 인간을 심심풀이 여기던 계집이 이렇게 오래 살려둔 인간은 처음 보는데?'
알렌의 몸 깊숙이 느껴지는 활화산의 기운.
'몰래 알아보는 편이 좋겠어. 그러면...'
알렌과 미라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르카네는 자신의 일부를 떼어 알렌의 몸에 심어두었다.
몰래 심어둔 일부가 천천히 녹아들어 알렌의 몸에 흡수되자 르카네는 재빨리 미라이의 안으로 되돌아간다.
'미라이를 위해서라면, 만약 놈팽이가 위험이 된다면 그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