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3화 〉54. 감사, 그리고 숨겨진 그늘. (93/116)



〈 93화 〉54. 감사, 그리고 숨겨진 그늘.

“알렌 메스티아.”

처음이었다.

비비안 아락시스가  이름을 부른 건.

“너는  검을 고른 거지?”
“그냥 검이 배우고 싶어서 골랐어.”

조금 무거운 상자를 놓자 잠든먼지가 풀풀 일어났다.

“어우, 먼지 봐라. 그나저나 왜 혼자 치우고 있었어?”
“내가 너의 물음에 대답해 줄 의무가 있던가.”
“아까 했던 말을 그대로 써먹네. 그래.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되는 거지. 그럼 난 간다.”

먼지 가득한 창고를 서둘러 나간 알렌은 아직 창고 안에 있는 비비안을 보며 빨리 나오라고 손짓한다.

“빨리 나와. 다음 수업 늦어서 빨리 들어가야 해.”
“알렌 메스티아.”
“그래,  이름 알렌 메스티아니까 빨리 나와. 문 닫게.”
“고마워.”
“뭐?”

창고 바깥에서 빨리 나오라는 손짓하던 알렌은 순간 영문 모를 소리.

이제껏 별 접점 없던 비비안이 자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 수상했다.

“뭐야? 너 갑자기 왜 고맙다고 그래? 어디 죽을 병이라도 걸렸나?”
“크리스틴... 언니를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을 뿐이야.”
“언니?”

‘이게 당최 무슨 소린지?’

비비안 아락시스의 언니가 크리스틴 네드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다.

내가 알기로 비비안은 외동딸인데 언니가 있다니? 설마 이게 그 막장 그건가?

비비안의 아빠가 그러니까, 그... 크리스틴의 어머니를... 오우야.

“예전에. 내가  좋은 일을 당했을 때. 크리스틴 선생님께서 나를 구해주셨어. 그 뒤로 나는 크리스틴 선생님을, 둘만 있을 때는 크리스틴 언니라고 불러.”
“아, 그렇구나.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지금 매우 불쾌한 상상을 펼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안 좋은 일을 당할 뻔했다면서? 그걸 크리스틴 선생님이 구해주셨다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한 거야.”
“아무튼, 오늘 크리스틴 언니를 욕한 녀석을 때려줘서 고마웠어. 그뿐이야.”

‘그러면  혼자서 나를 기다렸는지 이해가 되네.’

비비안의 트라우마는 알고는 있다.

과거에 납치를 당해 몹쓸 짓을 당할 뻔한 일을 계기로 남자를 싫어하게 된다는 것을.

그렇지만 비비안의 과거 어릴 적에 크리스틴이 등장한 것은 처음 알았다.

이곳은 게임이자 현실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내가 아는 스토리로 존재하는 것이 맞을 터인데.

‘달라. 내가 아는 거라고는 비비안은 스스로 탈출했어. 그런데 크리스틴이 등장해서 구해줬다고?’

자신이 아는 비비안의 과거 스토리와 전혀 달랐다. 그러나 비비안 본인이 저리 말하는데 이걸 믿어야 하는 걸까.

알렌이 모르는 비비안의 스토리를 자세히 알아보자면.

비비안 아락시스의 어릴 적, 청백색 소녀는 활발했다.

지금처럼 얼음 같은 차가운 눈빛이 아니라, 얼음을 녹이는 순수한 눈을 지닌 소녀였다.

비비안은 호기심이 많았다.

소녀는 어릴  예절 교육이 너무 재미없어 몰래 저택을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의 눈에 어린 소녀가 홀로 거리를 거닐고 있는 것을 보고 만 것이다.

윤이 나는 푸른 머리카락 위에 놓인 장신구와 누가 보아도 고급이라는 것을  수 있는 드레스와 함께 귀티가 흘렀다.

비싼 장신구. 어느 가문의 영애. 그리고 호위도 없이 거리를 혼자 걷는다?

이건 나를 잡아가 달라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온실 속의 화초는 바깥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다.

새로운 거리. 다양한 사람과 아인.

6살 소녀의 눈에 익숙한 저택이 아닌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마을 거리.

신기했을 것이다.

처음 보는 것들이 잔뜩 늘어지며 활발한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매우 신이 나는 일이니.

그러나 해맑게 웃던 청백색의 소녀는 아직 어려도 너무 어렸다.

소녀가 생각한 것처럼 세상은 착한 이가 많지 않았다.

순수한 악의를 지닌 채 접근한 사람이 재미있는  보여주겠다는 말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믿을 정도로 청백색의 소녀는 너무나도 순수했고 어리석었다.

점차 어두워지는 거리. 빛이 멀어져만 가고, 남자의 발걸음은 더욱 다급해졌으며,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뿌리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아팠다.

그렇게 청백색 소녀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웬 낡은 창고였다.

비루한 이들이 잔뜩 모여 호시탐탐 청백색 소녀의 얼굴과 몸을 눈길로 탐하며 그들은 저항하는 비비안을 억지로 묶었다.

앞이 보이질 않았다.
손발이 묶여 움직일  없었다.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악의를 가진 남자들의 음흉한 목소리가 청백색 소녀의 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두 눈을 가린 안대가 눈물에 젖어갔으며, 남자들의 더러운 숨결이 얼굴에 닿자 비비안은 몸부림쳤지만, 남자는 그 모습이 흥분된 것인지 비열하게 웃었다.

무서웠다.

바깥은 재미있는 것이 많다고 들었는데.
바깥은 신기한 것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바깥은 새로운 친구들이 있다 들었는데.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낼 수도 없는 공포에 휩싸인 청백색 소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아버지한테 혼나는 것보다, 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보다  무서웠다.

그들의 추악한 숨이 코에 맴돌자 점심으로 먹었던 요리는 푸른 드레스를 더럽혔다.

푸른 드레스에 쏟아지는 묵직한 구토.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지만, 이보다 더한, 남자의 추악한 숨이 구토보다 더 지독하고 역겨웠다.

앞이 보이진않았지만, 소리는 들을  있었다.

더러워진 내 드레스를 벗기려는 그들의 비열한 웃음이.

나를 부드럽게 만지는 그 손길은 소름이 돋아 이대로 혀를 깨물고 죽으면 차라리 편해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게 했다.

천천히 그들은 내 드레스를, 두꺼운 손으로 어깨를 만지자 옷이 스르륵 내려간 그때였다.

문이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남자들이 놀라며 문이 부서진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와 동시에 내 어깨를 만지던 두꺼운 손가락도 사라졌다.

그리고는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남자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연달아 울리는비명과 함께 천천히 내게 걸어오는 발걸음.

나는 두려웠다. 다시 내 어깨를 만지며 그다음은 무슨 짓을 할지 너무 무서워 흐느끼는 목소리로.

공포로 잠긴 목소리를 겨우 내며 나는 살려달라고 빌었다.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었다.

‘괜찮아.’

가녀린 목소리.

남자가 아니었다.

두려움에 숙이던 고개가 절로 올라가며 곧이어 따스한 손길로 내 눈을 봉한 안대를 벗겨지자 희미한 윤곽이 보였다.

‘얼른 집에 가자.’

그녀는 비비안이 쏟아낸 구토를 개의치 않고 부드럽게 안아주며 등을 토닥인다.

그러자 쏟아지는 눈물이. 이제는말라버릴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서러움과 안도가 한 번에몰려오자 비비안은 그녀의 품에 안겨 영애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로, 그저 한없이 울었다.

그 뒤로는 무사히 비비안을 구출한 크리스틴은 납치한 무리의 손목과 발목을, 힘줄을 모조리 잘라버렸고.

무사히 저택에 데려다 주고는 떠나려는 크리스틴은 비비안 아버지에게 감사와 함께 한동안 저택에서 머물러 달라는 말을 흔쾌히 승낙하며 상처받은 비비안을 위해 성심성의껏 돌봐주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크리스틴이 떠날 때. 비비안은 아물던 마음이 살짝 금이 가기 시작했다.

상처는 쉽게 아물어지지 않는다. 그것도 마음의 상처라면 더더욱.

크리스틴이 떠나고 홀로 남은 비비안은 무서웠다.

상냥했던 빛이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저 멀리서 다가오는 질척한 어둠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달라붙었다.

남자.

요리를 잘하는 주방장도.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도.
말을 이끄는 마부도.
처음으로 좋아한 하인도.

심지어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가 두려웠다.

자칫 그들이 자신에게 가까이 온다면 그날의 기억이 서슴없이 펼쳐져 숨이 턱 막히며 눈앞이 어두워지기도 했었다.

손이 가까워진다면 기겁하며 놀라기도 했고, 두껍고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머리와 속이 괴로웠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 아픔에 갇힌 채 살아갈 수는 없었다.

나아가야 했다.

“...알렌 메스티아.”
“왜 또?”
“너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먼저 가볼게.”

청백색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비비안은 그대로 떠났다.

“존나 싱겁게. 말을 하다 말아?”

홀로 남은 알렌은 떠나가는 비비안을 보다가 수업 종이 울리는 소리에 허겁지겁 교실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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