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2화 〉53-3 그들의 반응. (92/116)



〈 92화 〉53-3 그들의 반응.

“이제 어쩔 건가?”
“모르겠다.”

뒤따라온 웰턴의 물음에 알렌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웰턴.”
“왜 그러지?”
“내가 잘한 거 맞나 모르겠다. 진정이 좀 되니까 괜히 내가 나서서 일을 크게 키운 건 아닌가 싶네.”

다시 깊은 한숨을 내뱉는 알렌이 땅을 보며 웰턴에게 묻는다.

“...내 의견을 말하자면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 솔직히 크리스틴의 훈련 방식은 웬만한 기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도가 높은 건 알렌도 알고 있지 않은가.”
“...맞는 말이지. 훈련 강도가 상당하지.”
“그에 비해 귀족 자제들. 우리와 소수를 제외하고도 그들은 크리스틴의 훈련에 따라오질 못하지. 매번 수업을 들을 때마다 대련 불참, 훈련 이탈하는 학원생이 대다수지.”

강도 높은 훈련 방식.

물론 크리스틴은 좋은 의미로, 자신의 학생들이 가르치는 중이었지만, 학생들은 그걸 다르게 받아들였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훈련 방식을.

웰턴의 말처럼 쟁쟁한 기사들도 혀를 내두를 강도에 학생들이 크리스틴에게 불만을 품은 건 사실이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불만이 모여 백병전한다는 크리스틴의 말이 방아쇠가 되어 이런 사달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훈련 강도가 높은  둘째치고. 출신에 딴죽을 거는 놈들도 많지. 또 평민인 크리스틴이 전쟁에서 공을 올려 작위를 받은 것이 불만인...”
“미친 새끼들. 그런 개 같은 생각을 한 애새끼들이 많다 이거지? 재밌네.”

한숨을  내쉬며 웰턴의 의견을 듣던 알렌이 코웃음을 치며 웃는다.

“병신 같은 것들이 자기들 등 따습고 배 안 굶게 해준 영웅을 저딴 식으로 음해하고 낮잡아 보는 것도 어찌 보면 재주야, 재주.”
“신경 필요는 없지 않은가?”
“뭐?”
“평민 출신 귀족 크리스틴이 학생 무리에게 무시당하는 건 앞으로도 계속되겠지. 하지만 계급에 민감한 귀족 자제인 만큼 너와 내가 아카데미 있는 동안 크리스틴을 무시하는 발언은 섣불리 할 수는 없겠지.”

맞는 말이다.

왕의 신임을 얻는 아르스나 공작 가의 삼남 웰턴.

전 학문을 통틀어 연구하는 대륙의 두뇌라고 불리는 메스티아 후작 가의 차남 알렌.

계급도 계급이지만, 그들이 이룬 업적은 정말인지 너무 놀랍고 옛 위인을 들먹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계급에 개의치 않는 강력한 발언을 지닌 가문이었으니 그 누구도 아가리를 놀릴 녀석은 없을 것이다.

“그래. 이 정도 경고까지 해뒀는데 무시하는 녀석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볼만하겠어. 돌아가자.”
“알겠다.”

****

“알렌 메스티아.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한테 오렴.”
“네.”

멋대로 탈주하고 돌아온 알렌을 향해 크리스틴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를 낸다.

“오늘은 선생님이 정리할 테니까, 다들 어서 가보렴!”

기가  죽은 목소리를 다수의 급식이 인사하며 자리를 허겁지겁 벗어났다.

“기다리지 않아도 돼. 그러니 먼저 가, 웰턴.”
“알겠다. 그럼 먼저 가보도록 하지.”

어수선한 급식들의 발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지며 이윽고 들리지 않을 때.

크리스틴은 대련장과 꽤 멀리 떨어진 나무 아래에 앉자며 걸음을 옮긴다.

“이쪽으로 와서 앉으렴.”
“네.”

그늘 아래 앉은  사람은 저 멀리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잠시나마 평온한 기분을 만끽한다.

“...죄송합니다. 수업하는 도중에 멋대로 나가서.”
“어? 뭐가 핀트가 안 맞는 거 아니니?”
“사실 크리스틴 선생님이 말하려는 바는 제가  알아요. 그렇지만 저도 처음에 말했듯이. 제 잘못을 인정하며 그때 가서 사과하도록 하죠. 이건 내가 죽기 직전까지 변함없어요.”
“고집하고는... 그래도 대신 화내줘서 고마워, 알렌.”
“설교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고맙다고 하시다니.”

뜻밖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이건 알렌, 너에게만 말하는 건데. 사실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났어. 아무래도 평민 출신 귀족이라도, 나라를 위해 무수한 전쟁에 참여해 영웅이 됐다고는 해도 여전히 사람들 시선이 아니꼽지 않은 건 내가 잘 알아.”

빛이 있다면 그림자가 있듯이.

크리스틴을 좋아하는 이가 있다면 반대로 싫어하는 이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자신들이 최고라 생각하는 다수의 귀족이었다.

“기사단에 속해있어도 때때로는 속해있지 않는 기분이었거든. 그래서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기사단을 나와 아카데미에 들어온 거야.”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담담히 말하는 크리스틴.

크리스틴은 아카데미에 들어온 천천히 알렌에게 설명했다.

“처음에 기사단을 나오고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까지 몇 년 동안은 그냥 대륙을 돌아다녔단다.”

추억에 젖은 얼굴을 보이며 크리스틴은 알렌을 보며 기사단을 나와 홀로 떠난 여행을 즐겁게 떠들었다.

누군가를 도왔다는 이야기.

마을에 피해를 주는 해수나 몬스터를 처치했다는이야기.

대부분 많은 이를 도와줬다는 이야기였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착하네. 바보같이 너무 착해. 하나같이 다 도와준 이야기네.’

“많은 사람을 만났지. 사람뿐만이 아니라, 아인들도 만났고. 또 커다란 레드 드래곤이 하늘을 누비며날아가는 모습에 넋을 놓기도 했지.”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어주던 알렌은 레드 드래곤이라는 단어에 짧게 놀라 눈을 반짝이는 크리스틴을 보았다.

“그, 그렇군요. 레드드래곤... 저도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
“그렇지?사람들을 무섭다고 난리지만 나는 태양을가린 커다란 그림자 안에 있으면 내가 느꼈던 고민이 먼지처럼 느껴지는,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싹 날아가는 느낌이더라.”

무심히 푸른 하늘을 올려보는 크리스틴은 방금 말한 것처럼 레드 드래곤 클로 세로가 활공하는 모습을 그리워하며 조용히 손을 뻗어 하늘을 잡는 듯이 손가락을 움직인다.

그러나 하늘에 닿지 못하는 손은, 마지막 구원의 밧줄을 놓친 듯한 손은 서서히 내려가며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아 머리를 살짝 기대며 알렌을 쳐다보았다.

“언젠가는 만날  있을까?”
“글쎄요?”
“이럴 때는 거짓말이라도 ‘만날 수 있어요’라고 하는 거 아니니?”
“에이. 선의로 하는 거짓말을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요.”
“너무하네. 냉혈한 사람이었구나.”
“냉정하다고 해주실래요?”

가벼운 농담과 함께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알렌은 말이지,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묘하게 어른스럽구나.”
“학자 가문의 차남이니 다른 애들보다야 어른스럽죠.”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과격하던데?”
“크리스틴 선생님께 욕을 했으니 당연한 거죠.”

담담히 내뱉는 알렌의 말투에 크리스틴은 멍하니 쳐다보며 서서히 달아오르는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건지 황급히 무르팍에 고개를 떨궜다.

“그, 그렇구나. 머, 멋진 소년이구나. 나, 나중에 인기 엄청 많겠다...!”
“지금도 저 좋다고 말 거는 애들이 산더미 같은데요 뭘.”
“그, 그렇구나...”

여전히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크리스틴은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진정하자... 진정...! 알렌은 제자. 제자... 제자...!’

마음 속으로 진정한다고 해도 달아오른 열기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이러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듣지는 않을까 홀로 걱정하는 크리스틴.

“나머지는 제가 다 정리할게요. 크리스틴 선생님은 먼저 들어가 계세요.”
“내, 내가 정리할 테니까, 알렌은 어서 다음 수업 준비하렴...!”
“싫은데요. 제가 정리할게요. 아까 수업 빼먹은 벌로.”
“그, 그러렴. 그러면 선생님은 먼저 갈게... 수, 수고하렴...!”

수고하라는 말과 함께 쏜살같이 달려가는 크리스틴은 저 멀리 사라진다.

“귀엽네.”

크리스틴이 사라진 방향을 한동안 지켜보는 알렌은 조용히 웃으며 대련장에 놓인 상자를 치우러 일어났다.

“뭐야? 도와주러 왔어?”

대련장을 도착하니 청백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소녀가 단검이 든 상자를 옮기고 있었다.

“...왜 그랬어?”
“어? 뭘? 내가 뭘 했나?”
“수업 시간에 했던 일. 금세 잊었니?”
“아, 그거. 그런데 내가 그걸 너한테 말해야  의무라도 있는 건가?”
“말하기 싫으면 됐어. 상자나 옮겨.”

쿨한 목소리와 함께 단검이  상자를 들고 도도한 발걸음으로 창고로 가는 비비안의 뒷모습.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비비안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알렌은 머리를 열심히 굴러보았지만, 마땅히 떠오른  없었다.

“모르겠다. 일단 옮기고 나서 생각하자.”

****

‘미라이. 오늘도 안 나갈 거야?’
“오, 오늘은 배, 배가 아파서어...”

어두컴컴한 기숙사.

르카네의 물음에 미라이는 배가 아프다며 손을 얹어 거짓된 아픔을, 너무나도 어설픈 연기력에 그만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께도 배가 아프고, 어제고 배가 아프고, 오늘도 배가 아프네?’
“어? 어, 으응... 배, 배가 너무 아파아아... 으아아...”

침대에 털썩 누우며 아프다고, 배를 움켜쥐며 고통에  어설픈 비명을 들은 르카네는 미라이를 보았다.

‘이렇게 있을 바에는 차라리 아카데미를 나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 그건...! 시, 싫어...”
‘이것 봐. 배가 아프다는 것도 거짓말이지?’
“아, 아니야...! 자, 잠깐 통증이 멈춰서... 아... 배,  아파아...”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미라이를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 르카네는 강수를 쓰기로 했다.

며칠 째 교실은커녕 오로지 기숙사에서 나가지 않는 미라이를 더는 두고  수가 없었다.

‘알렌이었던가? 오늘 교실에 등교했더라?’
“어!? 저, 정말이야? 아, 알렌 님이 등교하셨어?”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봤어? 그런데 엄청 커졌어.’
“무, 무슨 소리야 르카네? 커졌다니?”

두려움에 떨고 있던 미라이가 눈을 반짝이며 르카네를 쳐다보았다.

‘저번 주에 왜 안 나오나했는데, 이번 주에는 나왔더라? 그것도...’
“그, 그것도...?”
‘비밀.’
“치, 치사해...! 르카네랑 나랑 비밀이 어디 있어...! 빠, 빨리 알려줘...!”

앙증맞은 두 주먹에  베개를 내려치는 미라이가 살짝 눈을 치켜뜨며 르카네를 노려보았다.

‘안돼. 미라이가 나갈 때까지, 직접 눈으로 볼 때까지 안 알려줄 거야.’
“그러면 비밀이 아니잖아...”
‘미라이. 내가 극구 반대했는데도 너는 아카데미에 스스로 왔잖아? 그러니 용기를 내.’
“저, 정말로 나가도 될까...? 스스로 용기 내서 교실에 들어가도 될까...?”
‘그럼. 아카데미 선생들도 미라이를 보고 싶어서 매일 찾아오잖아. 그러니 괜찮아. 아주 살짝. 침대를 벗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빗고, 단정한 교복을 입고, 문을 열면 돼. 그리고 무서운 게 뭐가 있어? 나도 있고. 또 그 놈팽이도 있잖아?’
“아, 알았어... 오,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 내일 등교할게...”
‘꼭 하는 거다?’
“으... 응! 꼬, 꼭 할게!”

이제껏 미라이의 등교를 위해 궂은소리를 해왔던 르카네였지만, 오늘 처음으로 알렌의 이름을 거론하자 힘을 내는 모습이 아쉬우면서도 화가 났다.

내가 그렇게 죽어라, 죽어라 설득했는데도 놈팽이 이름 하나나왔다고 미라이가 힘을 내는  보면 정말로 기뻐해야 하는 건지, 화가 나는 건지  모르겠네.

복잡한 감정이 교차한 르카네.

그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르카네는 그저 미라이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르, 르카네...”
‘응? 왜 그래 미라이? 설마 또...’
“저주받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항상 지켜줘서 고마워. 헤헤...”

천진난만한 웃음. 그러나...

아프다.

심장은 없지만, 만약 내게 심장이 존재했다면 분명 죄악감에 이기지 못해 심장이 터졌을 거다.

해맑은 소녀의 미소는 너무나도 아름다워 만일 내게  눈이 존재한다면 벌겋게 달군 칼날로 내 눈을 스스로 도려낼 것이다.

‘미라이. 나는 언제나 너를 위해서 살아갈 거고, 죽을 때까지도 너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다가오지 못하도록 할 거야. 그러니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미라이.’
“아, 아니야...! 르카네는 언제나 나한테,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고마운 친구야...!”

나는 비겁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를, 기어코 내가 살기 위해 미라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아니, 사실은 저 말을, 친구라는 말을,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사악한  입이 멋대로 지껄이고 있는 건 아닐까?

무섭다.

간악한 마음이 나를 발끝부터 머리까지 옭아매며 귓가에 애절하게 달라붙어 괜찮다고, 너는 나쁘지 않다며 합리하는 나약한 마음을 떨쳐내고 싶다.

하지만 떨쳐내면 떨쳐낼수록 더욱 정신을 파고드는 생존이 이를 방해한다.

‘나는... 언제나 너를 위해서 살 거야. 그러니 고맙다고 하지 않아도 돼, 미라이.’

나는 여전히 비겁하다.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더욱 살고 싶다는 욕구가 내 결심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

나는 너무나도 비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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