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52. 축제가 기다려진다.
“즐거우셨죠?”
[즐겁기는 무슨. 본좌를 그리 대하는 종족은 대륙, 아니. 세상을 통틀어 너밖에 없을 것이다]
“더 해달라고 하셨으면서, 뭘 부끄러워하십니까? 어떻게 한 번 더 할까요?”
[시끄럽다. 하여튼, 오늘은 끝이다, 끝]
검은색 원피스로 갈아입은 클로 세로가 손가락을 교차하며 귀엽게 거부 의사를 표한다.
“내일도 더 빡세게 굴려주세요.”
[오호? 매번 장난만 치던 녀석이 이제는 진지하게 나오는 것이냐?]
“그냥. 강해지고 싶어서요.”
[강해지고 싶다고 하니 더는 묻지는 않으마. 그 대신에 혹독한 수련이 기다린다는 것만 알아두어라]
“좋습니다. 그러면 밥이라도 한 끼 하시죠. 배고픈데.”
[...밥?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무의식의 세계에서 배가 고플 리가 있겠느냐?]
“고통도 느끼는 마당에 배가 안 고플 이유가 있습니까? 빨리 차려오세요.”
[지금... 본좌가 너에게 요리를 대령하라, 이 말이더냐?]
“네. 제가 여기 집주인도 아닌데 함부로 주방을 들락거리면 쓰겠습니까? 저는 고기 요리를 좋아하니 빨리 준비해주세요. 아유~ 배고파~”
당황스러웠다.
곧 돌아갈 줄만 알았던 자신의 제자이자 인간 소년이 지금 대륙의 강자들도 혀를 내두를, 영웅이라 불리는 이도 내 앞에서는 벌벌 떨며 도망간 것들이 수두룩할 터인데...
‘이 녀석... 배짱이 아니라, 그냥 무례한 녀석이 아닌가...?’
“지금 그 눈빛. 저를 엄청 무례한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으신 거 아녜요?”
[...독심술이라도 배웠느냐. 정확하구나. 그걸 알면서도 본좌에게 요리를 내오란 이 말이더냐?]
“네. 배고프니까, 빨리 내오세요.”
[관계가 이상하지 않으냐? 본좌는 너의 스승. 너는 본좌의 제자이거늘. 원래라면...]
“그러면 제가 준비하죠. 주방은 저기죠?”
[어... 그래. 저기 있다. 헌데... 요리는 할 줄 아느냐? 곱게 자란 귀족 아이가 하기에는 조금 그렇지 않느냐?]
“스승은 원래 제자를 믿어주는 게 국룰 아닙니까? 그냥 앉아서 딱! 기다리고 있으면 요리가 나오니 걱정하지 마세요.”
유녀 모습의 클로 세로를 억지로 의자에 앉히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방으로 향하는 알렌.
[불안하구나... 뭔가 께름칙한 것이 매우 불안하구나...]
****
[잘 먹었다. 꽤 쓸만한 솜씨구나]
“쓸만했다는 칭찬치고는 접시가 너무 깨끗한데요.”
[제자가스승을 위해 올린 요리를 남기면 쓰나, 흠흠...!]
“그렇구나... 다음에는 실패한 요리를 상에 올려도 절대로 남기시지 않겠네요?”
[이 녀석이! 본좌를 농락하느냐!]
알렌이 실패한 요리를 내와도 남기지 않는다는 농에 쉽게 흥분하는 클로세로.
“농담입니다, 농담. 제가 설마 스승에게 맛이 없는, 실패한 요리를 내오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그건 그렇고. 요리는 더 없느냐...? 이상하게 배가 고프... 무, 무슨 눈빛이더냐?]
“아니. 무의식의 세계에서 배가 고플 리가 있겠느냐? 라고 말씀하셨던 분이 밥을 더 내오라 하니 신기하네요, 신기해.”
쾅!
갈라지는 소리.
클로 세로가 작은 주먹으로 대리석 테이블을 살짝 쳤는데 금이 가버렸다.
‘빡쳤나...?’
[고얀 놈 같으니라고. 본좌를 우롱하는 것이냐?]
자신이 했던 말을, 알렌이 그대로 하자 클로 세로는 부끄러운 것인지 이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이런 고약한지고...! 본좌를 도대체 뭐로 보는 것이냐!]
“지, 진정하시죠. 제가 주제넘었네요. 다음에는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스승님을 우롱한 죄를 달게 받아, 앞으로 요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저, 적당히! 적당히 하란 이 말이다.]
“아닙니다. 스승에게 모욕을 준 못난 제자가 어찌...”
[됐다! 불초 제자를 용서하는 것도 스승의...! 뭐, 뭘 웃는 것이냐? 보, 본좌의 말이 우습더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음에 맛있는 거 만들어 드릴 테니, 불초 제자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 그리고 육체를 더욱 키우도록 해라! 체내에 품은 마나가 모자랄 정도로 키우도록!]
“알겠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 그래...! 조심히 들어가도록 하고, 내일 꼭 들려야 한다! 알겠느냐?]
“감히 누구의 명인데요.”
그렇게 알렌은 속으로 웃으며 눈을 감는다.
****
‘귀여운 양반이야.’
무의식에서, 잠에서 깨어난 알렌은 조금 전까지 어설픈 변명을 내뱉는 클로 세로의 모습을 떠올리며 살짝 웃었다.
‘벌써 밤이야? 배고픈데...’
무의식의 세계에서 밥은 먹었지만, 어디 까지나 무의식.
꿈에서 번 돈을 현실에서 가져올 수 없는 것처럼, 알렌의 배는 밥을 빨리 달라며 요동쳤다.
‘아니지. 벌써 밤이 아니라 새벽이네? 그렇게 오래 있었나?’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
별을 품은 밤하늘을 몰아내며 찬란히 빛나는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좋아. 나가볼까.’
아주 느릿하게 올라오는 태양을 보며 교복을 입는 알렌.
“컸나? 어깨도 그렇고, 바지도 짧아졌네.”
한껏 끼는 마이와 바지 밑단이 짧아진 교복이 불편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놀라웠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빨리 자라나?’
끼고 짧아진 교복을 벗으며 알렌은 검술 수업을 받을 때 입는 체육복을 입는다.
‘이건 또 딱 맞네. 조금 크게 맞췄던 것 같은데. 클로 세로의 수련 덕분에 조금은 큰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되는데...?’
놀라움도 잠시. 알렌은 자신의 성장에 기뻐할 틈도 없이 의아함을 느꼈다.
급성장은 아니었지만, 벌써 교복이 맞지 않는 것이, 헐렁한 체육복이 자신의 몸에 딱 맞는 것이 이상했다.
‘...클로 세로에게 물어봐야겠네. 일단 나가자.’
교복은 가지런히 옷걸이 걸고 기숙사를 나오는 알렌.
그리고는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가 운동장으로 나왔다.
“새벽 공기 좋네. 그런데 아직 안 왔나?”
운동장으로 나온 알렌이 새벽 공기에 심취하며 아직 나오지 않은 비비안을 찾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호감도 작이나 하려고 했는데, 안 나오면 어쩔 수 없지.’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던 알렌이 가볍게 마나를 끌어 올려 그대로 운동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나를 두른 채로 뛴다면 마나를 다루는 것도 능숙해지겠지.’
가벼운 숨소리.
알렌은 운동장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몸에 두른 마나를 끌어 올리며 한계에 부딪힐 때까지 계속 달렸다.
물론 마나를 두른 채로 운동하는 건 정말 쉽다. 그렇지만,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다.
엘프의 숲에서도 알렌은 몸에 마나를 두른 채로 코렛트를 되찾기 위해 폭발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때는 겨우 15분 정도 됐었나... 아, 개힘드네...’
마나를끌어 올린 알렌의 다리는 점차 빨라짐과 동시에 폭포와도 같은 땀이 온몸을 끈적하게 적셨다.
“후우... 다음에는 물이나 한 통 가져와야지, 목말라 죽겠네.”
헐떡이는 숨과 함께 이마를 타고 눈에 들어가려는 땀을 팔로 닦으며 벤치에 앉은 알렌.
“후.. 몇 바퀴를 뛰었더라... 생각이 안 나네.”
자신이 뛴 운동장을 보며 알렌은 체육복 지퍼를 열어 더위를 식혔지만, 아직 완전히 가시진 않았던 건지 아예 체육복 상의를 완전히 벗어 벤치에 놔두고는 땀에 젖은 티셔츠를 펄럭인다.
몸에 둘러붙은 찜찜한 땀을 빨리 씻어내고 싶은 알렌은 벤치에서 일어나 샤워실로 가려는 도중이었다.
"에이, 빨리 좀 나오지."
허리에 찬 목검과 청백색을 띤 머리카락을 아름답게 묶으며 홀로 연습하러 가는 비비안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공략을 위해서 다가가는 편이 좋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뒤늦게 다가가는 것은 탐탁지는 않았다.
'내가 가봤자 혀를 찰 것이 분명하고. 섣불리 나서지 않는 편이 좋겠지.‘
알렌은 땀에 젖은 체육복을 들고 샤워실로 향한다.
’지금은 눈에 익히기만 해야지. 축제 때 보자, 비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