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50. 미안하다 깜빡했다.
“엘프입니까?”
“그래, 엘프.”
늦은 점심.
데려온 두 여성이 엘프라는 것에 놀라는 마로스는 포크에 찍힌 스테이크가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알렌을 보았다.
“아니, 엘프라고 하면... 그 기다란 귀를 가진 종족을 말하는...”
“맞아.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 아니. 너무 담담하게 말씀하셔서...”
수북한 접시 위에 깨끗이 비운 접시를 올려둔 알렌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놀래는 마로스를 보았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고민 좀 해봤는데. 그녀들을 아카데미에 입학시키려고 한다.”
“...아카데미에 입학시키신다고요? 가능합니까?”
“가능은 하지. 다른 아종족도 멀쩡히 다니는데.”
“어떻게 입학시킬 예정입니까?”
“그거야 당연히 돈이지, 돈. 거지 같은 세상이라고 해도 돈만 있다면 만사 오케이야.”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신분도 새롭게 만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아니. 괜히 뒷덜미 잡히면 안 되니까 만들지 않는 편이 좋아.”
알렌은 그윽한 향기를 자아내는 커피를 마셨다.
“계속 돈만 내달라고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알렌 형님. 누가 뭐라 해도 제가 어제 말하지 않았습니까. 죽기 전까지 은혜를 갚는다고.”
“맞아. 사춘기의 혈기왕성한 소년이 발기가 안 된다면 그건 참 큰일이지.”
“아, 그런데 알렌 형님.”
“왜?”
“침실에 계신 누님들 식사를 고기로 해서 보냈는데. 괜찮나요? 엘프라는 것을 알았다면 다른 식사를 준비했을 텐데.”
“단절된 마을에서 개방적인 사회의 분위기에 익숙해지려면 어쩔 수 없지. 혹시 누가 알아? 고기맛 보고 더 달라고 할지?”
****
“정말... 먹어도 될까요, 장로님?”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로자리아가 눈앞에 놓인 따스한 스테이크를 보며 에블린에게 묻는다.
“채소도 없는 극단적인 식단...”
에블린은 카트에 놓인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스테이크를 보며 굶주린 배를 무의식적으로 문질렀다.
“이, 일단 배고프니 먹어도 되지 않을까? 그, 그리고 먹지도 않고 돌려보낸다면 이 요리를 만든 요리사에게 굴욕을 주는 것과 같으니...”
“그, 그렇군요...! 제가 미처 그 생각은 못했네요.”
로자리아는 어설픈 연기와 함께 손뼉을 치며 에블린의 어설픈 변명에 맞장구친다.
“그, 그럼 먹어보자, 로자리아.”
“네... 장로님...!”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 스테이크를 써는 두 엘프.
“...하읍...”
썬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어 입안에 조심스럽게 털어내는 두 엘프는 천천히 부드러운 소스와 잘 어울려진 맛깔스러운 스테이크를 씹는다.
“흐흐으응... 꽤 마, 맛있구나.”
“그, 그러게요.”
한 평생 엘프로 살며, 비건으로 살아왔던 두 엘프는 처음 맛본 부드러운 스테이크의 파괴력에 말을 더듬으며 속으로 놀라워했다.
부드러운 육질 하며 씹으면 씹을수록 흐르는 육즙의 매료된그녀들은 혀와 위장은 어서 빨리 스테이크를 먹으라고 재촉했고.
두 엘프는 더 이상의 얘기는 사치인 듯 그저 스테이크에 열중하며 각자가 천상의 맛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흐흠...! 꽤 먹을만하구나. 요기를 채우기엔 조금 그렇지만, 뭐... 나쁘지 않구나.”
“네... 저, 저도뭐...”
두 엘프는 맛에 비해 적은 스테이크 양이 조금은 아쉬웠던 것인지. 어느덧 다 비운 접시를 흘깃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알렌이 무언가 필요하다면 이 종을 울리라고 했는데... 뭐, 필요한 게 있다면 부르도록 하렴, 로자리아.”
“아뇨... 저도 딱히 필요한 것은...”
로자리아에게 청아한 소리를 내는 종을 건네려고 하자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벼운 노크와 함께 어젯밤, 알렌 일행을 안내했던 아리아나가 공손한 인사를 내보이며 필요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
“어? 아... 그, 알렌은 어디 있는지...”
“알렌 님은 지금 주인님과 함께 식당에 계십니다.”
“아, 식당...! 그러면 그곳으로 안내해줄 수 있는가?”
“두 분께서 중요한 이야기 중이라 안내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혹시 전하실 말이 있다면 제가 대신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리아나로부터 알렌이 식당에 있다고 들은 에블린은 기지를 발휘해 식당으로 안내받는다면분명기름진 고기를 먹을 수 있다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아쉽게도 중요한 얘기를 나눈다는 사실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저, 혹시... 이 고기. 더 먹을 수 있을까요?”
“!?”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아리아나에게 스테이크 리필이 가능한지 물어보는 로자리아.
“그럼 다시 식사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로자리아의 부탁을 들은 아리아나는 빈 접시가 놓인 카트를 끌고 나가려는 순간.
“자, 잠깐! 나도... 그...”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식사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에블린의 더듬거리는 말의 의미를 알아챈 것인지 2인분 식사를 준비한다면 문을 닫고 나가는 아리아나.
아리아나가 나가고 카트 소리가 멀어지자 에블린은 진이 빠진 것인지 침대에 털썩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로, 로자리아.”
“네, 장로님.”
“그... 스테이크라는 요리는 참... 맛있구나.”
“네... 정말 맛있어요.”
에블린이 솔직히 말하자, 로자리아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두 엘프는 문밖 너머의 소리를 집중하며 스테이크가 오기를 기다렸다.
****
“그럼 갈게. 에블린이랑 로자리아를 잘 부탁한다.”
“네, 알렌 형님.”
“혹시라도...”
“제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님의 여자를 건드리겠습니까?”
“...흐음.”
“그, 그때는 형님으로 모시기 전이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미, 믿어주세요, 알렌 형님!”
“팩트를 말했는데 뭔... 사내새끼가 울라고 그러냐? 그럼 갈 테니까 입학하기 전까지 잘 부탁한다.”
“네. 그럼 약이 완성된다면 꼭 와주세요. 사흘... 아니, 다음 주 월요일이면 완성될 겁니다.”
“알았다. 고생해라.”
마로스에게 배웅받은 알렌은 가방을 들쳐 매며 아카데미로 향했다.
코델리아가 술병으로 친 뒤통수도 이제 다 아물었고.
발기부전인 마로스 녀석의 치료 약도 이틀 후면 완성이 되고.
엘프 두 명도 겟또다제 했으니 이제 남은 건 아카데미 쪽 일인가.
‘체육계 히로인을 공략해야하니까, 일단은 비비안을 중점으로 두고 공략해야겠네. 크리스틴 선생은 수업만 참가해도 호감을 알아서 사니 놔두고. 그리고... 아!’
“아! 파멜라. 약속했던 돈이랑 정보를 줘야 했는데 까먹고 있었네...?”
불현 듯 떠오르는 파멜라의 얼굴에 알렌은이 중요한 사실을 이제 생각해낸 것인지 속으로 자책하며 파멜라를 만났을 때의 변명을 생각했다.
‘아... 모르겠다. 그냥 입원해서 그럴 경황이 없다고 말하면 되겠지.’
잊어버린 것은 미안한 일이지만, 어쩌겠나. 나도 사람이고, 파멜라도 사람인데 다쳤다고 하면 분명...
‘아니야.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과연 그 미친년이, 정상에 범주에도 속하지 않은 그년이 나를 가만히 놔둘까?’
“어머나~”
소름이 돋았다.
익숙한, 늘어지는 톤이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
“후배가 여긴 어쩐 일이야~?”
“그간 무탈하셨어요?”
“너무 애늙은이처럼 말한다~ 헤헤~”
파멜라 쉴버나스.
소녀는 나를 보고 반갑다며 소악마적인 웃음과 함께 사탕을 물고 있었다.
“파멜라 선배. 제가 입원해서 돈이랑 아이템 위치를...”
“응~ 알아~ 설마 내가 입원한 후배를 찾아가서 빨리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는 몰상식한 여자는 아니랍니다~”
“하하, 제가 언제 파멜라 선배를 그렇게 생각...”
파멜라는 자신의 입안에 든 사탕으로 나를 가리키며 발랄하게 웃는다.
“후배야~ 카페나 갈까? 퇴원 기념으로 내가 한턱낼게~”
생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파멜라의 미소가 무서웠다.
‘거절하면 어떻게 되려나.’
“네, 그러죠. 카페 좋죠. 하하.”
‘묘하게 잘 풀린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불안하다, 불안해.’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달리, 알렌의 마음은 우중충한 먹구름이 가득 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