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30-2. 레드 드림
[그런데 인간치고는 체내 마나량이 높구나]
"높으면 좋죠."
[높다고 좋은 건 아니다. 방대한 마나를 품으려면 그릇이 완성되어야 하는 법인데... 네 녀석은]
"왜요?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릇이 점차 커진다고는 해도 내 반지와 체내 마나가 서서히 늘어나니 안정적이지 못하고 조금씩 그릇을 빠져나오고 있구나]
레드 드래곤 클로 세로는 헐벗은 몸으로 자신의 왕좌에 앉으며 알렌의 상태를, 체내에 잠든 마나의 흐름을 보며 혀를 찼다.
"위험하나요?"
[물론 성질이 바뀌기 전의 마나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 그러나 본좌의 반지 탓에 푸른 물결 같은 마나가 증발해버려 화만 남았으니]
"아, 거... 그래서 뭐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알렌은 자꾸 말을 이상하게 돌리는 클로 세로의 말투에 슬슬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금 화가 난 상태지? 아직 성질이 바뀐 마나가 네 몸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격 또한 불처럼 된 것이야. 이대로 놔두다가는 몸이 불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겠지]
"진짜요? 농담하시는 거 아니죠? 그쵸?"
[본좌가 너에게 농을 꺼낼 정도로 우스은 드래곤이라 생각하느냐?]
"그, 그럼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하느냐? 화를 참고 살아야지]
"이번에는 농담이죠?"
[...뭐, 네 마음대로 생각하거라. 굳이 죽겠다는 불나방을 본좌가 어찌 말리겠느냐]
클로 세로는 이번 기회에 위계를 정확히 구분하기 위해 요사스러운 손짓으로 고민에 빠진 알렌을 보며 웃는다.
평소에는 우위를 점하지만, 희한하게도 교미할 때면 이상하게도 몸은 쾌락만을 탐구한다.
주눅들어 자신에게 설설 기던 자그마한 인간 꼬마. 그러나 몸을 섞으며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그 순간.
작게 움츠리던 녀석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유로이 움직인다.
그렇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클로 세로는 자신이 주인이며 알렌은 하인이라는 것을 똑똑히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후우..."
[웬 한숨을 쉬는 것이냐? 설마 체념한 건 아니겠지]
"네? 갑자기 웬 체념?"
[뭐지? 왜 체내 마나가 진정이 된 것이냐?]
"그냥 명상하니 진정되던데요? 그리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로 세로 님이 아니었다면 진짜 죽었겠네요."
알렌은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클로 세로에게 인사한다.
그에 비해 클로 세로는 이 짧은 시간에, 도대체 어떻게 불타오르던 마나를 가라앉힌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인간과의 교류가 적기는 해도 수많은 세기에 걸쳐 다양한 인간들이 본좌를 토벌하러 왔거나, 혹은 지식을 얻기 위해, 각자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자신을 천재라 칭하는 대마법사라는 종족도 단시간 내에 마나를, 애초에 성질이 바뀐 마나를 능숙히 다룬다는 것은 보통 인간이 해낼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평생을 검에 종사하며 끝에 통달한 사내가 불의의 사고로 팔을 잃고 마법을 배운다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물론 가능은 하다. 그러나 인고의 시간을. 태어날 때부터 늙을 때까지 검을 든 자가 다른 지식을 배우기란 솔직히 어렵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천재라는 인간을 처음 보십니까?"
[놀랍구나. 그 어떤 마법사를 만나며 얘길 나눠보았지만, 너처럼 특출난 마법사는 없었다. 정말이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이런 거 가지고 뭘 놀라십니까. 당연한 겁니다, 당연한 거."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투와 행동. 그러나 클로 세로는 그만한 실력이 있다면 이까짓 말투와 행동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레드 드래곤 특유의 호승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강한 자와 붙어보고 싶은 그들의 태생.
[좋구나. 좋아. 본좌의 반지를 얻은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특이한 운용법으로 마나를 제어하다니. 좋구나. 아주 좋아]
드래곤 레어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여기저기서 먼지가 섞인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레어가 진동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위풍당당한 클로 세로의 마나가 담긴 웃음 때문이었다.
[본좌를 적대할 자. 그 누구도 없었지. 그러나 이번에 발견했구나]
"왜 그러세요?"
왕좌에 일어난 클로 세로의 등에서 날개가 튀어나왔다. 그 여린 몸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커다란 날개는 마치 푸른 하늘을 뒤덮으며 떠오른 태양마저 감추는 너무나도 큰 날개.
[지루한 영겁의 삶. 많은 이를 만나 얘기하고, 마시며, 싸워왔지만! 오늘과 같은 흥분은 처음이다!]
'뭐지? 시바 진짜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당당히 욕해도 좋다. 인간... 아니, 알렌 메스티아! 너는 자격이 있다. 본좌를 즐겁게 할 자격이!]
"추, 충분히 즐겁게 해준 것 같은데..."
알렌은 지금 당황, 아니, 도대체 레드 드래곤 클로 세로가 급발진을 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유가 궁금하느냐? 보여주지 않았느냐! 그 어떤 마법사도 못해내는! 바뀐 마나를 길들이며 자유로이 운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더냐!]
"아, 아니... 이건 그냥..."
게임 지식이 여기서 발목을 잡힐 줄은 몰랐다.
[게임 지식? 흥미롭구나. 어떠한 게임인지는 몰라도 어린 나이에 이리 뛰어난! 대마법사의 자질을 지닌 것이냐!]
"이, 일단 날개는 거두시고... 지, 진정하세요."
[진정.. 좋은 말이지.... 좋은 명안이 떠올랐구나]
알렌의 말에 잠시 진정한 클로 세로가 꺼낸 날개를 도로 거두니 드래곤 레어의 모습이 보이며 작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본좌가 아는 모든 걸 네게 가르친다면... 나중에는...]
"그, 그만! 말씀의 의도는 알겠지만, 어찌 한낱 인간이 영겁을 살아온 드래곤과 싸우겠습니까? 잘 생각하시..."
[아니. 고심해서 내린 결론이다. 앞으로 과제가 하나 추가되었구나]
큰일이다. 잠을 자는 건 쌓여있는 피로를 풀기 위해 자면서 기분 좋게 꿈을 꾸거나 거지 같은 꿈을 꾸는 건데... 이제는...!
"시, 싫습니다! 현실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는데! 꿈에서도 공부를 해야 합니까!?"
[현실과 꿈은 다르지 않으냐. 그러니 괜찮다]
"꿈에서 만큼은 편히 쉬도록 해주십쇼! 이러다가 몸도 정신도 버티질 못해 죽기라도 하면...!"
[아니. 인간이라는 족속들은 그리 쉽게 죽지 않지. 하물며 방대한 마나와 내 마나를 빌려 쓰며 다스리는 녀석이 엄살은]
말이 안 통한다. 이 여자... 분명히 내 몸도 쥐어짜고 지식도 억지로 주입 시킬 생각으로 가득한 표정이다.
[벗어나고 싶으면 본좌보다 더욱 강해지면 되는 것을. 뭘 그리 깊게 고민하느냐?]
"이, 이런 씨아아아...앙!! 너무하잖아요!"
[괜찮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너에게 전수해주마]
왕좌에서 일어나 유녀의 모습으로 변한 클로 세로는 어울리지 않는 긴 코트를 어깨에 걸치며 당황과 분노로 물든 알렌을 향해 코트를 질질 바닥에 끌리는 채로 걸어갔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 중에서도 제일 독보적인 마법사로 만들 터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새로운 장난감. 아니, 클로 세로는 지금껏 이리 기뻤던 적이 없었다.
장차 10년... 아니, 5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잘 가르치기만 한다면 필시 자신의 뒤를 쫓아올 정도의 힘을 가진 알렌을 이대로 놓아주고 싶지는 않았다.
"배, 배우기 싫다면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배우게 하도록 하마. 아니면 네가 가장 원하는 것을 들어주도록 하마. 예시를 들자면 이런 유녀의 몸이든, 엇비슷한 나이의 몸이든, 아니면 풍만한 여인의 몸이든. 네가 원하는 형태로 교미하도록 허락하마]
클로 세로는 유녀의 모습에서 동급생의 나잇대로, 또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의 모습이 되자 땅에 질질 끌리던 코트는 허리까지 오며 풍만한 가슴과 아래로 드러나는 얼핏 보이는 야한 모습을 본 알렌은 또다시 서버리고 말았다.
[혈기왕성해서 좋구나. 어찌 수락하겠느냐?]
귓가에는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하니 정신이 아찔해진 알렌.
"우, 원하는 플레이도 해주는 겁니까?"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본좌의 가르침을 사사 받겠느냐?]
"무리한 플레이도 가능합니까?"
[너만 한 녀석을 가르치려면 그 정도야 뭐]
"그럼 배우겠습니다. 그 대신에 어떠한 플레이를 하더라도 화를 낸다면..."
[그럴 일은 없다. 그리 걱정이라면 맹약의 술식을 바꾸어 계약하면 되지 않겠느냐?]
클로 세로의 아름다운 손가락이 알렌의 가슴을 만지다가 이내 자연스럽게 심장에 새긴 맹약의 술식을 바꾸었다.
[긍지 높은 본좌가 직접 새겼으니 무엇이든 원하는 걸 들어주도록 하마]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어떤 플레이를..."
[괜찮다. 너와 같이 똑똑한 자들은 얻을 수만 있다면 무엇을 못할까. 오늘부터 시작하고는 싶다만, 특별히 돌려보내도록 하마. 그럼 내일 보자꾸나]
"이게 누구 마음대로 내일 보자고 하래?"
[응? 지, 지금 무슨?]
순간 등을 돌리며 왕좌로 향하던 클로 세로가 얼빠진 목소리로 답한다.
"씨팔 한 발은 빼줘야지. 어딜 그냥 토낄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