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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속 이야기들은 모두 죽었습니다-58화 (58/62)

〈 58화 〉 외전. 박아름

* * *

유미 언니는 그 안으로 내 등을 슬쩍 밀었어. 나도 그 손길에 맞춰서 천천히 내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지.

밖에서 봤을 때 두께감을 전혀 알 수 없던 벽은 생각햇던 것 보다 훨씬 두꺼웠어. 한 세걸음쯤 걸었을까? 밖에서는 투명하게만 보였던 벽의 안쪽은 온통 갑갑한 하얀색 이었고, 그 정도 걸어 들어가니까, 등에서 느껴지던 유미 언니의 손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어. 대신 뒤에서 아무 소리도 없이 벽이 다시 생겨나는 게 느껴졌지.

이제 완벽히 둘이 되었어.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나는 그래도, 어디 면화실이나, 독방이나,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건…

사람을 미쳐버리게 만들 것 같은 새하얀 벽으로 사방이 꽉 막힌 사람 한명 간신히 누울 수 있을 만한 좁은 방.

그 방의 한 가운데서, 알몸 그대로, 무방비한 자세로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는 서혜진.

눈 앞에 보이는 건, 오직 하얀색과, 그 안의 살색 뿐이었어.

작은 등에서 송골송골 땀이 흘러 내려가는 게 한 눈에 들어왔어.

살짝 튀어나와서 바닥에 딱 붙어있는 가슴도, 목을 흐트러지게 가리는 머리카락도, 움찔움찔 거리는 엉덩이도,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도.

그리고 무엇보다 더.

냄새가.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이 독한 여자 냄새가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어, 제일 먼저 느껴지는 건 불쾌감 이었지. 마치, 마취를 시작한지 얼마 안된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침대 시트에서 이런 냄새를 맡은 것처럼.

알아서는 안될 무언가를 알아버린 것 같은 느낌.

한동안 압도되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어.

서혜진의 헐떡 거리는 숨소리만 좁은 방 안을 메꾸고 있었지.

우선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어떤 걸 해야 할까.

머리 속을 스멀스멀 타고 오르는 냄새 때문에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데, 일단은.

혹시나, 넘어지지 않게끔, 또 혹시나, 한걸음 걸을 때 마다 바닥에 딱 달라붙어 움찔거리는 서혜진의 몸에 닿지 않게끔. 한발자국. 한발자국. 푹신한 바닥 위를 조심스럽게 움직여서, 서혜진의 머리맡에 섰어.

그리고는.

“혜진씨, 일어나요. 일어나서 나 좀 봐요”

천천히 서혜진의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힘을 줘서 몸을 끌어 올려주려는데, 몸에 힘이 없는지, 움직일 기색이 없는거야.

그런데 그 사이에.

“읏… 으으으…. 흐읍….”

아래로 뚝 떨궈진 고개 그 밑에서 올라오는 열기 띈 목소리가 들렸어.

고개를 조금 들어보니,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도 보였지.

결정적으로, 지금 당장에, 바닥에 물이 튀는 소리가 같이 들리는거야.

서혜진은, 단지, 내가 손을 잡은 것 만으로도, 절정하고 있었어.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채자 마자 나도 힘이 빠져서 그만 서혜진을 놓아 버리고 말았지.

“으으으으… 아… 하아… 하아….”

서혜진은 바닥에 몸이 내팽겨쳐진 게 아팟는지, 아니면 또 다른 자극을 받은 건지, 열기 띈 숨을 몰아 쉬면서, 말랑한 바닥 위에 널부러져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

“저기. 저 기억하죠? 면담 때.”

내 목소리에 맞춰서, 서혜진의 눈동자가 움직여서 나를 바라 보았어. 땀으로 흠뻑 젖어서 빨개진 얼굴이 보였지.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있을만한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어.

“지금 저희가 하고 있는 대화는 아무한테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을거에요. 자. 이거 봐요.”

부러 서혜진의 뺨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면서 말했어, 유미 언니는 절대로 나한테 서혜진과 접촉하지 말라고 했었으니까, 만약 유미 언니가 지금 이걸 보고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날 말리려고 했겠지만, 아까 서혜진의 손을 잡았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건.

“원래 이렇게 당신과 제가 이야기 하는 것도, 이렇게 닿는 것도 규칙 위반이라는데, 지금 이러고 있는데도, 멀쩡한 게 그 증거에요.”

서혜진은 원래부터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는지, 내 말을 듣고도, 가만히 눈을 깜빡깜빡 거리다가 이내.

“끄으으… 하…. 흐으으으…”

조금 요란한 신음소리를 흘리면서, 몸을 거꾸로 뒤집어 누으면서.

“흐으으.. 쥬글 거 가타여… 으어어어…”

아픈 소리로 말했어.

“괜찮아요? 제 말 알아듣겠어요? 도우러 왔어요. 당신한테 묻고 싶은 것도 있고요,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러니까.”

서혜진은 바닥에 엎어진 채 눈을 깜빡이면서 가만히 나를 쳐다봤어. 얼핏 보기에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쪽 손이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서는.

“괜찮으세요? 서혜진씨 맞죠? 여기서 무슨 일을 당하신 거에요? 말씀 해 주세요”

내가 질문하고 있는데도, 내가 눈 앞에 있는데도, 자기 손을 자신의 그곳으로 가져다 대서는,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손에다가 비비는데…

“으으… 으으으… 아…”

틀림없이 서혜진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풀린 눈으로, 얼굴이 빨개 진 채, 침을 질질 흘리면서, 나를 앞에 두고 자위를 하기 시작했어.

게다가, 손가락을 넣거나, 손을 움직여서 비비는 게 아니라, 직접 엉덩이를 움직여서, 손에다가 비비는 모습이 마치.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저기요 서혜진씨, 괜찮으세요? 네? 시간없어요 대답 해주세요.”

유미 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어.

사실 이러고 있는 게 서혜진한테 더 행복한 거라면.

서혜진이 사회에 나가서 범죄를 저지르는 거랑,

여기서 이렇게 자위에 미쳐 있는 거랑.

어느 쪽이, 서혜진 자신에게 더 좋은걸까?

사실 유미 언니가 했던 모든 말이 맞는걸까?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광경. 복잡한 머리 속. 서혜진의 한쪽 손이 더듬더듬 바닥을 짚고 움직여서는 약한 악력으로 내 손을 붙잡았어.

“괜찮으세요? 어디 아파요?”

물어보는 말에 대답은 안하고, 내 손을 약하게 끌어서는…

지금 한참 꿈적꿈적 거리고 있는 그곳에 갖다 대면서 한다는 말이.

“흐읏… 흐으으… 만져…. 만져 주세여… 으…. 제발… 만져…”

혀가 다 풀린 발음으로 나를 보면서 서혜진은 그렇게 말했어.

그래서 나는….

나는….

그 자리에서 서혜진. 아니 216번의 손을 뿌리 치고 뒤쪽으로 도망쳤어. 등 뒤에 말랑한 벽이 느껴졌지. 그런데 216번은. 그래도 계속.

마치 벌레처럼 엉덩이를 꿈틀 거리며, 온 몸의 피부가 새빨갛게 되서, 온 몸에서 땀을 흘리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살짝 다리를 벌린 자세로.

자위를 멈추지 않았어.

초점이 풀린 눈이 마주치고 있는데도 지금도.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에 숨을 참았어.

어떻게 저걸 같은 인간으로 볼 수 있지?

어떻게 저걸 같은 여자로 볼 수 있을까?

도무지 지성이란 게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

그리고 마치, 발정난 원숭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틀림없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사람이지만.

어딘가가 나랑은 확실하게 다르다. 라는 생각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오는 게 느껴졌어.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생각했던 거랑 너무 다른거야.

맞아.

드라마에서 봤던, 불량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도.

나쁜 죄수들을 갱생시키는 의사도 없었어.

난 내가 그래도 정의롭다거나, 원칙대로 한다거나,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대체 정의가 뭐고, 원칙이 무엇인지 이제는 정말 모르겠는거야.

애초에 같은 사람이란 게 뭐야?

지금 저게 같은 사람이라고?

이제서야 유미 언니가 나한테 해줬던 그 꼼꼼한 경고들이 진짜로 이해가 되었어.

마치 짐승 다루듯이 쓰여져 있었던 그 매뉴얼들도.

모두 다.

같은 사람을 다루는 방법이 아닌 것처럼 쓰여져 있었던 건.

저게. 216번이. 도저히 나랑 같은 사람이 아니여서 였던거야.

내가 생각했던 학대나, 고문이나, 성폭행도.

난 그냥. 지레짐작하고 착각을 한 걸지도 몰라.

그리고 그제서야 생각났어.

그럼 유미 언니는…

이런 것들을 전부다 알고 있었는데도, 나를.

자기가 징계까지 받아가면서…

사람이 좋아도, 적당히 좋아야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이제 유미 언니를 위해서라도,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뒤에 꽉 막혀있던 벽이, 마침내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

내가 뒤로 넘어질 뻔한 걸 언니가 바로 뒤에서 잡아 줬지.

그리고 유미 언니는 내 얼굴을 쓱 보더니, 재빨리 나를 뒤로 빼내서, 다시 벽을 만들더니.

그대로 내 손을 꾸욱 잡고, 강한 힘으로 나를 끌고 앞서서 걷기 시작했어.

유미 언니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고, 한번도 나를 뒤돌아보지 않았고, 단지 내 앞에서 내 손을 잡고 걸어갔어.

걸음은 빠른데도, 나를 당기는 힘도 강한데도, 어쩐지 꽉 잡고 있는 손은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그렇게 가고 있는 도중에도, 유미 언니는 여전히 나를 배려해주고 있구나. 라는 사실이 느껴졌어.

그렇게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216번 방 안의 오르막을 올라서.

수감구의 구불구불한 오피스텔 같은 복도를 쭈욱 가로질러서 출구로 나가서는, 다시 거주구로 돌아왔지.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다니는 복도에 도착하고 나서야, 언니는 내 손을 놓아줬어.

그러고는 제일 먼저 하는 말이.

“괜찮아요 아름씨?”

나를 걱정해주는 말이었어서.

아까 전에 나도 지금 유미 언니랑 같은 말을 서혜진한테 했었는데…

이상하게, 유미 언니의 목소리를 들으니까. 눈물이 나왔어.

“미안해요 유미 언니… 어떻게 하죠?... 나 때문에… 징계… 어떻게 해요? 미안해요…”

너무 미안하고 또 너무 고마워서.

똑바로 사과해야 하는데.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목이 잠겨서 말이 안나오는거야.

그런데 유미 언니는.

“전 괜찮아요. 어디 안다쳤어요?”

내 몸 여기 저기를 살펴보면서 여전히 내 걱정만 해서.

그게 더 서러워져서.

“미안해요… 저 사실… 유미 언니… 의심했었어요… 다 짜고… 그러는 거 아닌가 하고….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요? 징계는 뭐에요? 차라리 제가…”

미안한 마음에 거기까지 말하니까 유미 언니가 내 말을 뚝 잘라먹고는 이렇게 말했어.

“흠… 아름씨… 전 이제 바로 가봐야 하거든요? 징계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 너무 그러면… 다음에…”

평소의 그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저번에는 저런 표정을 하고는.

자기를 언니라고 불러 달라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다음에?”

“술이나 사줘요 알겠죠?”

술이나 사달라고.

거기까지 말한 유미 언니는 정말로 급했는지, 내 대답도 안듣고, 아까 왔을 때 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슝 하고 가버렸고, 나는 혼자 남겨져 버렸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아직도 울고 있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지나갔어.

그리고 혼자 남겨진 그제서야. 그제부터 몸을 잠식하던 알 수 없던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 같았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내가 여태동안 쌓아 온 상식이 부정되는 것 같았던 그 느낌이 말이야.

아마 오늘 잠들면 악몽을 볼거야.

꿈에서 216번이 나와서 내 다리를 붙잡겠지.

한 손으로는 자위를 하면서 말이야.

나는 흰색 벽 안에 갇혀서 그 짓을 하고 있던 216번의 모습이 평생동안 잊혀지지 않을거야.

그래. 세상엔 그런 것도 있는거겠지.

그리고 뭐 나도, 한번쯤은 틀릴 수 있지.

하지만 그래서 뭐 어쩌겠어.

사람이 틀릴 수도 있잖아.

엄청엄청 미안하고, 엄청엄청 고맙고 그러지만.

맞아.

유미 언니는 어떤 술을 좋아할까?

띵동 띵동.

늦은 시간. 인터폰의 벨이 울렸어.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인 유미 언니.

“아 언니! 기다리고 있었어요 빨리 와요.”

유미 언니는 신고 온 슬리퍼를 툭툭 벗어 던지고는 거실을 둘러보더니 곧바로 소파에 몸을 던지면서 말했어.

“실례합니다… 오… 가구 다 들였어? 와 예쁘게 해놨네… 소파도 있고.”

하는 행동은 얄미운데, 도무지 미워지지가 않는다니까.

우리는 이렇게 종종 같이 술을 마셨어.

유미 언니가 조금 일찍 퇴근하는 날에는 특히 더.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는 자기 나이 또래 사람이 없다면서 투덜거렸지.

어느 날 또 한번 더.

과자를 먹으면서, 아주 독한 양주를 홀짝이며, 재미없는 드라마를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물어봤어.

나도 취해 있었고.

언니도 취해 있었거든.

“언니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에요?”

라고.

그러니까.

유미 언니는 잠깐도 생각 안하고 그냥.

“그냥 잘해주는거지…. 뭐 이유가 있어?”

라고만 대답하더라.

그러고는 내가 밖에서 사온 과자를 봉지 채로 털털 털어서 다 먹는거야.

그걸 보고는 한 소리 했지 또.

하 정말…

아무래도… 착한 내가 참아야겠지?

하여간에 사람이 너무 착하게 살면 손해 본다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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