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외전. 박아름
* * *
유미 언니는 오늘은 이제 퇴근할거라서, 너무 힘들어서 오늘은 안되고, 내일은 조금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어쩌면 내일 모레 아침이면 괜찮을지도? 하면서 말 끝을 늘리면서 말했어. 몇 번이나 뜸을 들이면서, 될지 안될지는 자기도 모르겠다고 덧붙이면서 말이야.
그래서 나도 그냥, 안되면 다른 날짜라도 괜찮다고 했지. 자세한 건 밤에 또 이야기하자고 하면서, 우리는 따로 폰 번호를 교환했어. 이번 기회에 좀 친해지자면서 유미 언니는 싱글생글 거렸지.
구내 식당에서 저녁 먹고 오니까, 또 정유미가 이틀 후 아침에 괜찮을 것 같다고 해서, 우리는 그 때 216번을 만나러 가기로 했어. 유미 언니 그 때가 아니면 아예 안된다고 말했거든.
그런데 유미 언니의 아침은 내가 생각하는 아침이랑 달랐어.
해도 안 떠있을 시간에 보자는거야.
그래도 어쩌겠어. 이만큼까지 해 주는데… 잠자코 그 때 만나자고 했지.
유미 언니는 꼭두 새벽 부터 관사 앞까지 나를 데리러 왔어. 아침에 일어나서, 씼고 머리 말리고 있으니까 벌써 띵동 하고 와 있더라. 그런데 인터폰 너머로 본 유미 언니는 여태껏 봐온 언니랑 조금 달라보였어. 평소랑 똑같은 정복에, 똑같은 구두를 신고 있는데도. 전에 봤던 때랑 달리 조금 날카로워 보였어. 나도 지금까지 유미 언니를 기껏해야 이걸로 4번쨰 만나는 거긴 한데. 나는 여태껏 유미 언니를 반마다 꼭 한명씩 있는 장난 좋아하는 친구들이랑 닮았다고 생각했었단 말야. 그 특유의 말랑말랑한 분위기라던가, 장난칠 때 웃는 모습 이라던가. 그런데 반나절만에 분위기가 변해버린 유미 언니를 보고 있잖아. 순둥순둥 사람 좋아하는 귀여운 찹쌀떡 골든 리트리버가 귀를 세모나게 쫑긋 세우고 주변을 경계하는 까만색 도베르만이 되버린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 결론은. 어느쪽이든 다 귀엽단거지!
현관 앞에 멀찍이 서있던 유미 언니를 안으로 들이면서 가벼운 인사를 나눴어. 언니는 나랑 다르게 아침에도 쌩쌩한지 아직 아무 것도 없는 거실을 둘러보면서 여기에는 뭐가 들어가면 좋겠다. 자기 집에는 어떤 게 있다. 같은 잡다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나는 유미 언니한테 정간호사님께 선물로 받은 피로 회복에 좋다던 엄청엄청 쓴 칡즙을 한팩 주면서,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고, 후다닥 나갈 준비를 다 끝마치고 나니까, 유미 언니는 어지간히 썼는지 표정을 찌푸리면서도, 칡즙 팩을 쭈욱쭈욱 빨아 먹고 있었어.
“자. 가요.”
“네.”
그 말을 시작으로 관사에서 나와 서혜진을 보러 어디론가 걷기 시작한 우리 둘은 거짓말처럼 말이 뚝 없어졌어.
앞에서 먼저 걷는 유미 언니의 모습이 딱 봐도 긴장한 것 같아 보였거든. 조금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이따금 주변을 이리 저리 둘러보면서, 맞은 편에서 사람이 지나가면 벽에 딱 붙어서 조용히. 무엇보다 그리 넓지도 않은 복도를 구두를 신고 지나가는데도 발소리가 나지 않았어. 그래서 나도 덩달아 발 끝으로 걷게 되어 버렸지.
대체 어디를 어떻게 가고 있는 건지 모를 무섭도록 똑같은 살풍경한 복도들을 쭉 지나서, 아무런 장식도 표시도 없는 우리는 새하얀 출입구 앞에서 멈췄어.
“자. 여기서부터 수감동이에요. 이 안에 들어가서부터 진짜로 조심해야 해요. 뒤에 꼭 붙어서 알겠죠?”
“네”
문 앞에 선 유미 언니가 나를 보면서, 그렇게까지 위험한 상황이 생길까? 싶을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계속 주의 사항을 말해주고, 나는 계속 네. 네. 하고 대답했어. 꼭 선생님이랑 학생처럼 말이야. 분위기는 더 살벌했지만.
한참동안이나 나한테서 위험해지면 일단 디바이스를 사용하라는 설명과 다짐을 받아낸 정유미는 그제서야 출입구 앞에 서서 옆에 달린 인터폰 같은 걸 이리 저리 조작하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id카드를 삑 찍고는, 다음에는 척봐도 4자리 숫자는 아닌 제법 긴 비밀번호를 한번에 우다다다 치고, 그것도 모자라서 손가락 지문도 찍고, 홍채 인식에, 또 마지막으로는.
“음성 인식을 시작합니다. 삐 소리가 난 이후에 인증을 시작해 주세요.”
하는 목소리와 함께. 삐 소리가 나더니. 유미 언니는 인터폰의 마이크 부분에 딱 붙어서.
“교도관 정유미”
하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니까.
“음성 인증이 완료 되었습니다.”
라는 소리와 함께, 삐빅 하는 소리가 나더니.
조금 있다가 문이 지이잉 하고 좌우로 열렸어.
그런데 놀라운 점은 유미 언니가 그 모든 과정을 다 거치는데 든 시간이 1분이 넘지 않았다는 거야. 그제서야 알 수 있었어. 지금의 이 바짝 날이 선 유미 언니의 모습은, 교도관으로서 일을 할 때의 모습 인거구나. 하고.
그래도.
“휴우… 열렸네요… 자 가요. 거기 발 조심하고.”
먼저 가면서도, 출입문의 조금 깊은 발 틈에 내 발이 낄까봐 앞에서 봐주는 유미 언니의 사람 좋음은 어디 가지 않았지만.
유미 언니의 등을 쫓아 들어간 수감동은 여태껏 지나왔던 거주동이랑 분위기부터가 달랐어.
우선 무서울 정도로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고, 밤에도 낮에도 쨍쩅하다 못해 눈이 부시게 밝았던 다른 거주구의 복도랑 달리, 약간은 어두침침한 조명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서 붙어있는 단단해 보이는 문들, 그리고 그 위에 새겨져 있는 숫자들, 무엇보다 가장 살벌했던 건, 커다란 오피스텔 건물처럼 주루룩 이어진 복도의 사이 사이 마다, 방화문 같은 장치가 설치되어 있던거야. 유사시에 셔터를 내려서 불길을 차단할 수 있는 그 장치 말이야. 아마 죄수가 방에서 탈출했을 때를 위한 장치겠지.
그제서야 나는 실감했어. 여기가 이렇게나 위험한 곳이구나 하는 걸 말이야. 또 저 멀리서 옅은 피냄새랑, 뚝뚝 떨어지는 수돗물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아서, 앞에서 조심조심 걸어가던 유미 언니의 상의 밑단을 한손으로 꾹 잡고 바짝 붙어서 걷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유미언니는 귀신같이 뒤를 돌아보고는, 손을 잡아줬어. 앞에서 걷는 모습은 이렇게나 딱딱한데, 내 손을 잡고 있는 유미 언니의 손만큼은 말랑말랑해서. 그래서 조금 안심이 됐어.
같이 걷는 중간중간 왜 인지 모르지만, 걸음이 갑자기 빨라지거나, 또 멈췄다 가거나 했지만, 이번에는 얼마 걷지 않고 금방 216 이라고 쓰여진 방 앞에 설 수 있었어.
딱 봐도 엄청 튼튼해보이고 번쩍번쩍 거리는 문 옆에 아까 전에 보았던 인터폰 같은 장치 앞에서 유미 언니는 줄곧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 여태동안 봤던 얼굴 중에 가장 진지한 얼굴로 말했어.
“자… 여기가 216번 방… 그러니까 서혜진씨의 방이에요. 잘들어요 아름씨”
유미 언니는 나에게 불안과 걱정 섞인 눈을 맞대면서 설명해줬어.
“여기 교도소의 수감방은 외방이랑, 내방으로 나눠져있어요. 지금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서부터 외방이에요. 216번은 내방 안에 있어요, 저희가 외방에 들어가면, 내방에 있는 216번을 보고 들을 수 있을거에요. 저쪽은 외방을 볼 수는 없지만, 소리는 들을 수는 있으니까, 조심해요. 저는 혹시 모르니까 외방에서 대기할거에요. 1:1이라고 했는데, 절대 이것만큼은 양보 못해요.”
“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죠 제가 어떻게…”
아무리 안보인다고 해도, 바로 밖에서 듣는 건 너무 그렇지 않아요?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유미 언니가 검지 손가락을 들고 조용히 하라고 나를 타이르면서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을 이었어.
“제 눈치가 보여서 그런거죠 아름씨?”
기분 나빠 하는 기색도 없이, 그저 약간 긴장한 얼굴로.
“대신에, 이쪽에서 감시 장치는 다 꺼둘거고, 아름씨가 내방 안으로 들어가면, 외방이랑도 차단시켜 놓을게요. 그럼 저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게 돼요. 그러니까…”
“조심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216번 가까이에 다가가지 마세요. 그리고 무슨 일 있으면 디바이스… 알죠?....”
유미 언니는 여기까지 오면서 여태동안 열 번 가까이 들은 말을 이 앞에서 한번 더 해줬어. 이 앞까지 오니까, 지금 유미 언니가 하는 말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었지. 그래서 주머니 속에 넣어온 디바이스를 꺼내서 꽉 쥐고. 고개를 끄덕 했어.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어. 어쩌면 유미 언니의 뒤를 걷기 시작했을 때 부터였는지 몰라.
제가 벌어드릴 수 있는 시간은 2분 정도가 최대니까 이야기는 그 안에 다 끝내주세요.”
그렇게 말한 유미 언니는 아까 출입구에서 했던 것과 똑같이. 엄청난 속도로, 우다다 비밀번호에, 지문에, 홍채 인식에, 음성 인식까지 모두 마치고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문 앞에 섰어. 그래서 나도 이번에는 유미 언니의 뒤가 아니라, 나란히 옆에 섰어.
그런데.
음?...
인증들이 다 끝나고 나서 삐빅 거리는 소리는 났는데…
왜 문이 바로 열리지 않는거지?
의문스러움에 슬쩍 옆에 있던 유미 언니의 얼굴을 쳐다봤는데.
유미 언니는 나보다 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딱딱하게 굳어서는.
일이 뭔가 잘못된건가?
뭐지? 어떻게 된거지?
점점 더 불안해지는 느낌에, 무심코 유미 언니의 어깨를 잡으려고 하던 그 때.
아무것도 없는 조용한 복도에 단 둘이 있었는데.
발 소리도, 말 소리도 하나 없이 깜깜하게 조용했는데.
갑자기 소리가 들렸어.
바로 옆에서.
폰 벨소리였어.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긴장했었는지, 깜짝 튀어 오를 뻔했어.
보니까 내 껀 아니고, 유미 언니 디바이스에 나는 소리였어, 유미 언니도 깜짝 놀랐는지, 어깨를 흠칫 거리더니 재빨리 전화를 받았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여보세요?”
하니까 곧바로 들려오는 화난 여자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옆에 있는 나한테까지 들려오더라.
“야! 정유미! 너 미쳤어? 혼자라며! 옆에 개는 누군데?”
그러니까 유미 언니는 아까 전까지 긴장해 있었으면서, 또 금방 흐믈흐믈한 목소리로 능청스럽게 대답했어.
“아 언니… 상관없잖아… 그냥 문이나 열어줘요 네? 책임은 내가 다 질 테니까? 아니면 남소 안시켜준다?”
나는 그 대화를 옆에 멍하니 서서 고스란히 듣고 있었어. 아직까진 상황이 이해가 안됐거든.
“남소고 뭐고 너 진짜아?... 너 진짜 이럴래 정유미?... 하아… 난 너 징계받아도 모른다?”
그런데.
“응응 당연히 언니는 모르는거지, 자자 문이나 열어줘.”
“아 몰라!”
하고 전화가 뚝 끊기더라.
아무래도 남소 시켜준다고 다른 사람한테 문 열어달라고 했구나, 뭔가 유미 언니 답네. 하면서 조금 긴장한 채로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그리고 뒤늦게 머리가 조금 돌아가서는.
잠깐 징계를 받는다고?...
그러고 보니 어제도 이것도 저것도 다 규칙 위반이라면서, 그럼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규칙 위반인거고, 그럼 유미 언니는.
체온이 확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어.
아침도 안먹었는데 무언가가 목구멍에 탁 들어 앉아서 체한 것 같은 느낌이.
이제와서 생각해보니까 너무 당연한 거였어.
굳이 왜 메신저로 말을 안하고, 나한테 직접 찾아와서 말을 한건지, 지금 이 시간이 아니면 안되는건지, 왜 오면서 그렇게나 불안해 한건지. 조금만 생각해봐도, 당연한 거였는데, 나는 지금 있는 이 상황 자체에 먹여 삼켜져서, 나만 생각해버리는 바람에…
여태동안 최악의 경우 나 혼자만 어떻게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면 유미 언니가 나 때문에…
옆에 있는 유미언니는 아까 전화를 때문인지 긴장이 조금 풀린 모양인지 여전히 작은 목소리지만, 그래도 나를 안심시켜주는 목소리로 말하는데.
“이제 좀 있으면 문 열릴거에요, 원래 이게 보안에서 사람이 직접 열어주는 거라…”
발 밑에서 올라오는 싸한 감각, 유미 언니의 팔을 더듬더듬 붙잡고, 물었어.
“잠깐… 유미 언니… 징계라니요? 그게 무슨…”
그러니까 유미 언니는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문을 바라보면서
“음… 규칙 위반이니까…. 징계는 받겠죠…”
담담하게 말했어.
오히려 그 태도가 나를 더 이상하게 만드는 거 같은거야.
왜 나를 보고 말해주지 않는거지?
왜 나한테 말을 안해준거야?
다 내가 억지로…. 그러니까…
“아니 왜…”
가뜩이나 서혜진 때문에 가득 차 있던 머리 속이 더 복잡해지는데
“쉿…”
두꺼운 문이 천천히 좌우로 열리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다시 진지한 얼굴이 된 유미 언니는 나를 조용히 시켰어.
216 이라는 숫자가 박힌 문이 좌우로 열려서 그 안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내 말은 삼켜져버렸어.
한눈에 들어오는 내부 모습.
아래로 살짝 이어지는 회색바닥의 짧은 내리막과 그 앞에 놓인 사각진 방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서혜진이 서 있었어.
유미 언니는 그 모습이 익숙한지 조금씩 조금씩 신중하지만 멈춤 없는 걸음으로 내리막을 내려가더니, 슬쩍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봐서. 그래서, 나도 그 뒤를 따라 내려갔어.
마냥 딱딱할 것만 같았던 바닥의 감촉은 생각과 다르게 조금 푹신했어, 테니스 코트나, 달리기 트랙 같은 느낌이랄까, 예상하지 못했던 감촉에 살짝 당황하면서도, 한칸한칸 유미 언니의 뒤를 따라갔지. 두 발자국 정도 내려오니까 등 뒤에서 들어오던 빛이 한번에 사라져서 휙 뒤돌아보니까, 어느새인가 두껍던 문이 닫혀 있었어. 그대로 한 여섯발자국쯤 걸으니까 평평한 바닥에 도착할 수 있었지.
방 안은 생각보다 넓었어, 주변이 온통 회색에, 아무런 무늬도 아무런 특징도 없는 꽉 막힌 벽 그 자체였어. 그리고 거기까지 내려 오니까 공기가 달라져 있었어.
더 무겁다던가, 어둡다던가 그런 느낌이 아니라.
방 안 전체를 가득 채우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냄새가 머리를 무언가를 때리는 것처럼 쏟아부어지는데, 엄청나게 비리고, 시고, 텁텁하고, 마치 여름철 잘못 세탁한 빨래 냄새랑, 지독한 땀냄새랑, 또 해산물 비린내를 합친 것 같은 그런 냄새로 가득했어.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런데 어디선가 비슷한 냄새를 맡아본 듯한.
맞아. 여자 냄새랑, 땀냄새랑 각종 배설물 냄새를 섞어서 아주아주 오랫동안 방치해두면 날 법한 냄새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까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어.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방은 다 먼지 한 툴 없이 깨끗해 보이니까, 그러니까, 아마 아니겠지. 설마…
서혜진은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가슴을 펴고, 허리 뒤에 양 손을 교차 시킨 채, 다리를 어깨 보다 조금 더 벌린 채, 멍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멍하니 서 있었어.
전에 봤던 모습과 마찬가지인 알몸으로.
나도 모르게 숨을 참으면서 한발자국 더 가까이서 보니까.
서혜진 주변을 조금 넓게 둘러싸고 있는 아예 없는 것처럼 보였던 투명한 벽이 눈에 들어와 깜짝 놀랐어. 서혜진의 얼굴이 다 보일 정도로 가까이 가야지만 빛이 묘하게 굴절되는 게 보여서 그 벽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투명한 벽 안에, 서혜진은 갇혀 있었어. 아마 저게 유미 언니가 말했던 내방이겠지. 하고 보자마자 알 수 있었지.
거기서 한발자국 더 가까이 가니까, 서혜진의 살색이 눈에 가득 차게 보였어.
온 몸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얼굴을 지나, 무겁게 솟아 있는 가슴을 쓸어내려서, 옴폭 들어가있는 허리랑, 허벅지를 타고 주르륵 내려가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
손을 허리 뒤에 딱 붙이고, 불편할 정도로 가슴을 내민 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다리를 벌리고,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아무런 생각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고, 딱딱하게 굳어 있는 무방비한 모습.
그리고 그 다리 사이에서 흐르는 엄연히 땀과 다른 허연색 끈적한 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모습까지.
바로 앞에, 벽 하나를 두고 틀림없이 서혜진은 그곳에 있는데, 마치 눈 앞에 보이는 게 하나도 현실처럼 보이지 않는 느낌이 들었어. 정말 이 사람이 내가 그제 봤던 그 사람이 맞는건가? 싶은거야.
분위기에 압도되서 발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서혜진이 눈을 깜빡이는 걸 바라보고 있는데, 유미 언니가 그런 내 손을 잡고 서혜진의 뒤쪽으로 빙그르르 데려 갔어.
유미 언니는 전화하는 것처럼 디바이스에 대고 딱딱한 얼굴로 명령했어.
“216번 대기 자세 1번을 취하세요”
그러니까, 꽉막힌 방 안에서 유미 언니의 목소리가 가득 울려서, 그걸 들은 서혜진은 몸을 움찔거리면서 놀래더니 곧바로
“네 교도관님.”
서혜진은 대답하는 거랑 동시에, 꼼지락 꼼지락 몸을 움직였어.
무릎 꿇은 채로, 몸을 바짝 바닥에 엎드려서, 이마를 땅에 바싹 붙이고, 손을 머리 위에 올려 꽉지를 끼는 모습이, 천천히 눈 앞에서 펼쳐졌지.
별 것 아닌 행동이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환히 들여다 보이는 저 등의 살색이, 살짝 벌려진 엉덩이 사이랑, 그 사이에서 뚝뚝 흐르고 있는 물이, 무언가 야릇해 보였어.
그렇게 서혜진이 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이상한 자세를 취하는 걸 천천히 다 지켜본 후, 유미 언니는 내 어깨를 잡고 내 눈을 마주 봤어. 말은 없어도, 준비는 됐냐고 물어보는 눈에, 나도 고개를 끄덕했지. 그러니까 유미 언니가 나를 투명한 벽 바로 앞에 세우고 디바이스를 꾹 누르니까, 뒤에 있던 벽 하나가 순식간에 마법처럼 사라졌어. 마치 원래 그곳에는 벽이 없었다는 듯이 말이야.
유미 언니는 그 안으로 내 등을 슬쩍 밀었어. 나도 그 손길에 맞춰서 천천히 내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지.
밖에서 봤을 때 두께감을 전혀 알 수 없던 벽은 생각햇던 것 보다 훨씬 두꺼웠어. 한 세걸음쯤 걸었을까? 밖에서는 투명하게만 보였던 벽의 안쪽은 온통 갑갑한 하얀색 이었고, 그 정도 걸어 들어가니까, 등에서 느껴지던 유미 언니의 손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어. 대신 뒤에서 아무 소리도 없이 벽이 다시 생겨나는 게 느껴졌지.
이제 완벽히 둘이 되었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