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외전. 광애 (??)
* * *
잠들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죽은 것인지.
손가락이 움찔거리는 모습도, 눈을 깜빡이는 모습도, 숨을 쉬며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모습도 없는.
그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듯한, 나체의 여성.
여자 치고도 작은 신장.
갈비뼈가 드러나 보이는 마른 몸.
딱 보기 좋을 정도로 적당히 발달된 가슴.
쑥 들어간 허리와, 살짝 살집이 붙어있는 골반.
애기 같이 고운 손과 발.
말랑해 보이는 허벅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
목 덜미 쪽에 있는 작은 점 하나.
전체적으로 또렷한 이목구비에,
골든 리트리버 같은 강아지 같이 축 내려간 눈매의 귀여운 얼굴.
비록 조금은 아이 같은 어린 외모지만, 만약 평범한 남성을 이 안에 들여서, 선배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 사랑스러움에 침을 질질 흘릴거야…
절대로 안보여 줄테지만.
아…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정말로 사랑스러워… 이뻐…
역시 선배는, 얼마를 봐도 절대 질리지가 않는다니까…
항상 이 시설의 직원 안전을 위한 시스템을 볼 때 마다 윗대가리들 욕하기 바쁘지만…
역시 이 일은 내 천직이야.
아차차… 우선은 갔다 왔으니까 인사부터 해야지.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서, 투명한 벽에다가 손을 얹고 반가움과, 애정을 듬뿍듬뿍 담아 인사했다.
“안녕… 다녀왔어요, 선배”
선배한테는 절대 들리지 않겠지만…
의자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오늘도 사랑스러운 선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선배를 처음으로 만났었던 게 언제 였더라?...
그건 틀림없이, 내가 처음으로 이 연구소에 부임한 날 이었을 것이다.
의대를 졸업하고, 무난하게 국시에 합격한 후, 치열했던 대학 생활의 반동으로, 취업도 안하고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던 나는,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당시 고위 공무원 이었던 아버지의 연줄을 통해 어떤 국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참동안 차를 타고 이동해서, 배까지 타고, 도착한 작은 섬에 있는 시설.
처음에는… 그렇네… 꽤나 당황했었던 것 같다.
부임지가 무슨 이름도 못들어 본 섬 이었으니까, 틀림없이 그냥 시골 보건소 프로젝트 같은 건줄 알았는데…
들어가는 것에만, 보안이니 뭐니 하면서 한참이 걸리더니, 어버버 어버버 지문이랑, 홍채, 목소리 등록을 마치니, 무뚝뚝한 직원이 절대 잃어버리면 안된다고 몇번을 강조하며 목에 ID카드를 직접 걸어주고 연구소 안까지 안내해 줬었지.
국가 특급 기밀 시설 이란 사실은 그때서야 알았다.
어쩐지… 벽지 부임 치고는 조건이 너무 좋더라니까…
새로 지어진 건물 특유의 텁텁한 공기를 맡으며 도착한 연구소 에서는…
“야… 재야?... 여기 낙하산으로 들어왔다는 사람?”
“뭐야?... 우와… 낮짝도 두꺼워라… 이게 얼마짜리 프로젝튼데…”
“쉿! 조용히 해… 누구 끈인지도 모르잖아, 어쩜 몰라? 잘 보이면 위쪽에 잘 말해줄지?...”
나를 향해 쏟아진 얼굴 없는 사람들의, 쑥덕거리는 입들과 불쾌한 시선.
사실 어느정도 예상은 했었는데, 대놓고 저렇게 쳐다볼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서 놀 걸 그랬나?...
하지만 그런 불쾌한 생각들은, 1분도 지나지 않아서, 한 여름에 빙수가 녹듯, 순식간에 사르르르 녹아버렸다.
왜냐하면…
“안녕하세요 서유라씨. 연구소 소장인 박하나입니다.”
이때 선배를 처음으로 만났으니까.
믿겨져? 20년 이상이나 지난 오늘도 말이야, 아직도 이 생생하게 기억나.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그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그 조금 피곤해 보이는 목소리가.
백열 조명에 비춰서 반짝이는 긴 머리가.
하얀색 가운의 소매 너머로 삐져나온 자그마한 손이.
말할 때 마다 움직이는 얇고 앙증맞은 입술이.
남색 계열의 꽃무늬 원피스 위에 품이 넉넉한 실험 가운 이라는 괴상한 패션 센스에,
사무실 안을 맴돌던 건조한 공기까지……
“음?.. 왜그래요?..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두근
“어머?... 어디 아픈가?...”
두근 두근.
“살짝 열 있는 거 같은데?”
두근 두근 두근
작은 얼굴을 숨결이 닿을 만한 거리까지, 무방비하게 다가와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마에 손을 얹으며 열을 재는 선배.
마치 달리기를 한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니 그저 손이 이마에 닿기만 했을 뿐인데…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들고.
호흡이 가팔라지고,
얼굴에 열이 오르고…
틀림없는 사랑.
사랑 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 도망치는 게 좋지 않았을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걸…
첫눈에 반해 버렸으니까…
첫눈에 반한다는 말 같은 거, 믿은 적 없었는데…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아… 아니에요… 자 잠깐 긴장해서…”
“저… 저 사실 하나 박사님 좋아해요!”
태어나서 처음 겪는 감각.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말이 헛나와 버렸다… 이 이게 아닌데… 무슨 초면에 고백을… 으아아아아…
“뭐어어? 아하… 유라씨 내 팬이구나?... 아 혹시 사인 해 줄까요?”
잔뜩 당황해서, 빨갛게 굳어버린 나를 보며, 잠깐 놀라더니, 금세 능글맞는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선배.
틀림없이 이상한 사람으로 찍혔을거야…
“나… 나중에요… 나중에… 꼭 해주세요…”
그 와중에 사인은 받고 싶어서… 아니 선배에 관한 작은 것 하나라도 가지고 싶어서, 바보처럼 말까지 더듬어 가면서 사인을 요구하는 나에게
“푸흐흣… 아하하하… 사인은 농담이었는데… 아… 죄송해요 유라씨가 너무 귀여워서… 나중에 꼭 해드릴게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음을 참다가, 결국 못 참고 허리까지 접어 가며 웃어 대는 선배.
그 앞에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나.
멀쩡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사랑. 나쁜 자식…
“일단 일 애기로 넘어가서 그럼 일단 연구소 소개부터…”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선배의 팀에 배속되었고, 매일매일 선배와 같이 얼굴을 부비며 일을 할 수 있었고, 금방 사그러들 줄 알았던 이 마음은, 정말 불행이도,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낙하산이라고 업무 이외에는 은근한 따돌림을 받고 있던 나를 대놓고 유난히 더 챙겨주는 그 상냥함에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은 부풀어 오르기만 할 뿐.
“아! 유라씨! 여기에요 여기! 일루 와서 같이 먹어요!”
직원들이 가득한 구내 식당에서 일부로 내 자리를 비워 두고는 다른 직원들이 뒤에서 숙덕거리든 말든 손을 흔들며 나를 부르는 선배.
다가오는 프로젝트의 마감 기간에, 어쩔 수 없이 야근을 하게 되었을 때, 두 손을 머리 위로 뻗어서 크게 기지게를 펴더니, 정말로 무방비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흐아아아아암… 피곤해~~ 벌써 4시네요… 전 잠 좀 깰 겸 샤워할건데… 혹시 같이 씻을래요?”
내 마음 속에 폭탄을 던져오는 선배.
일이 조금 비는 날에는 잠깐 시간을 내서, 같이 작은 섬을 한바퀴 돌며 산책하다가 발견한, 바다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단 둘이.
통유리창 너머,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넓고 잔잔한 눈이 시릴 정도의 푸른색 배경에, 옅은 햇살이 쏟아져서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를 등 뒤로, 평소와는 다른 사복 차림으로, 나랑 마주 앉아서 카푸치노를 홀짝이면서
“진짜 어촌이라도 있을 건 다 있네요… 카페도 있고… 여기 바닷가 바로 앞이라서 전망도 좋네요.”
은은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는 선배.
어느 날 뜬금없이 선배의 사무실로 호출당해서 가보니까,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애기들이 좋아할법한 엄청 귀여운 디자인의 캘린더를 들여다보며
“음… 유라씨, 다음 휴가 이번 주 주말 이죠?”
“네?... 네! 왜 그러세요?”
“나두 유라씨 휴가 맞춰서 휴가 쓰려구요… 우리 같이 옷 사러 갈래요?”
절대로 거절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는 듯한, 격하게 꼬리를 흔드는 놀아달라고 보채는 귀여운 강아지 같은 얼굴로, 싱글생글 데이트를 신청하는 선배.
“아야!... 아으….. 아파랏!...
“어머! 괜찮으세요 선배?...”
“으으… 아파아… 발목 삔 거 같은데?...”
“자 제 손잡아요, 제 자리에 응급 상자 있으니까, 잠깐 보고 가요 선배.”
퇴근 길, 피곤에 절여져서, 딱 보기에도 불안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거닐다가, 그만 발목을 접지르고 눈물이 글썽글썽 울 것 같은 얼굴의 선배.
선배를 부축해서 내 자리의 책상에 앉힌 뒤 바지를 종아리 까지 걷어 올리고, 호들갑스럽게 파스에 붕대까지 돌돌 감아버린 후, 아직까지 울먹이는 선배의 입에 달달한 초콜릿을 넣어주며
“선배는 그런데 손발이 엄청 쪼그맣네요?”
“으… 맞아요 신발 235 신어요… 아! 그러고 보니까 나 여기 점 있는 거 알아요?”
입 안에 들어간 초콜릿을 혀로 굴리면서, 입고 있던 하얀색 블라우스의 윗단추를 풀더니 무방비하게 목카라를 내리며, 뽀얀 속살을 드러낸 후 목덜미에 나 있는 작은 점을 보여주는 선배.
“음… 그러니까 극도로 폐쇄적인 환경 안에서, 외부 요소를 전부다 컨트롤 하면서, 자극을 아예 없애는 게 중요한 거에요, 청각, 촉각, 미각, 시각 같은 것들은 당연하고, 체온에 맞는 외부 환경, 몸의 신진대사, 같은 변수들을 조정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한 거죠.”
진지한 얼굴로, 다리를 꼰 채, 일 애기를 하는 선배.
침대 위.
“유라씨… 사실… 저 유라씨 많이 좋아해요….”
달달한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하며, 누워있는 나를 덮치듯 내 몸 위로 자신의 몸을 포개면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손길로 꽉지를 잡고,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입술을 부딪혀 오는 선배…
빠빠빠빠 빠빠빠빠 굳모닝! 빠빠빠빠빠 빠빠빠빠 굳모닝!
“으으… 으으으으으…”
이제는 꿈에서까지… 선배를...
어딜 봐도, 어딜 가도, 무엇을 먹어도, 무엇을 마셔도, 무슨 생각을 해도, 모든 것의 끝에는 선배가 있었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를 이렇게 까지 좋아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앗… 으읏… 선배… 선배에…. 흐으… 좋아… 거기.. 좋아… 더 만져주세요… 흐으읏…”
심지어 혼자서 욕구를 풀 때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선배를 상상 하면서…
끝나고 나면 항상 자괴감에 시달리지만…
중등도 이런 중증이 없어.
차라리 내일 죽는 게 더 나을 정도야…
마치 하루가 가면 갈수록, 심장이 뛰면 뛸수록 더더욱 바보가 되어 버리는 중병에 걸려버린 것 마냥.
매일매일 숨을 쉴 때 마다.
심장이 뛸 때 마다.
밥을 먹을 때 마다.
물을 마실 때 마다.
걸을 때 마다.
생각을 할 때 마다.
보고 싶고,
말이라도 걸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느끼고 싶고,
가지고 싶어 진다.
유난히 어린 애 같은 취향도.
조그마한 손발도.
항상 메말라 있는 작은 입술도.
괴상한 패션 센스도.
목덜미에 나 있는 작은 점도.
항상 몸에서 풍기는 달달한 사탕 냄새도.
착실한 것 같으면서도 꽤나 덜렁이는 성격도.
일에 집중하면 입술이 꾸욱 닫히는 것도.
정말로 피곤하면 잘 걷다가도 꾸벅꾸벅 조는 것도.
밥을 먹고 나면 꼬박꼬박 잊지 않고 양치질을 하는 것도.
무서운 영화를 생각보다 잘 본다는 것도.
은근히 입이 짧다는 것도.
보기엔 차분해 보여도 생각보다 다혈질인 것도.
좋아하는 점을 꼽으라면 밤을 새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자고 있어도, 눈에 눈꼽이 끼어 있어도, 목소리가 다 갈라져도, 그 어떠한 모습도 사랑스럽게만 보이는 것이.
사랑 이란 것은 틀림없는 중병이었다.
아주아주 커다란 화산이 폭발해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어느 먼 나라의 신화 속 이야기처럼.
좋아하는 마음이 꾹꾹 쌓이고 쌓여서, 스멀스멀 터져 나오며, 자신의 모든 것이 새로 만들어지는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신기한 감각.
처음에는 이렇게나 빠져들 수 있는 것인가 두렵기까지 했지만, 이젠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걸.
마음이 자기 멋대로 넘어선 안될 강을 건너버린 것을, 눈이 마주치자 마자, 쿵쾅거리는 심장이, “너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어” 라는 걸 알려 준다.
혹시나 이 두근거림이 선배한테 들킨다면…
혹시나 이 마음이 들킨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디 이 화산이 주변에 모든 것을 집어 삼키지 않기를.
부디 이 화산이, 내가 사랑하는 선배를 집어 삼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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