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8화 〉 @45. 모험도. 몬스터 아일랜드
* * *
"음란왕이라니. 잘 어울린다."
수빈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도깨비 말이야?"
나은이 물었다.
"아니. 아저씨 말이에요."
"음... 그러네. 저 도깨비보다는 오빠한테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말 같아. 음란왕."
나은은 그 말에 무척 좋아했다.
"하기는..."
윤진이 조그마하게 한 마디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여자들의 표정도 대개는 비슷했다.
아무래도 그녀들은 앞으로 나를 볼 때마다 음란왕이라는 저 흉측한 단어를 떠올리고는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건 뭘까요?"
나은이 새로운 것을 발견한 모양이다.
모두들 나은이 서있는 황금용의 앞발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몇 송이의 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꽃이잖아요?"
윤진이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누가 몰라? 어째서 꽃이 여기에 있냐는 거지."
나은이 대답했다.
"꽃이야... 꺾여있네... 누가 가져다 놓은 건가?"
그제서야 윤진은 나은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여기 우리 말고는 사람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은이 다시 내게 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래."
음... 생각해보니 내가 읽은 설명서에 사람이 없다는 말은 없었다.
단지 고립된 섬이라는 것, 그리고 섬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위험은 배우에게 실질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보장이었다.
어라?
그렇다면 뭔가 위험이 있기는 하다는 말일까?
"틀림없이 누군가가 일부러 꺾어다 놓은 게 맞는 거 같아요."
보라가 꽃을 들어보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누가 있는 모양이에요. 어쩌죠?"
불현듯 민망해지는지 윤진이 팔로 가슴과 아래를 가리며 말했다.
"그러게...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이러고 있었는데..."
나은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몸을 가리지는 않았다.
나머지 여자들은 딱히 발가벗은 것에는 신경을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신경쓰이는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윤진처럼 알몸인 것을 보이기 싫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낙원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불편한 모양이다.
"이제 어떻게 하죠?"
다시 나은이 물었다.
"우선은 돌아가자."
여자들이 걱정하는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 여기 머무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번에 나 혼자 와서 이 섬을 탐험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꽃을 여기에 둔 것은 아무래도 이 황금용에게 바치는 거겠죠?"
갑자기 보라가 한 마디 했다.
"그러게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째서 패자에게 꽃을 바친 걸까요?"
정미도 그걸 궁금해했다.
하지만 그녀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방법은 없었다.
우리는 왔던 길로 거슬러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들 아까 올 때와는 달리 주변을 둘러보며 근처에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가 보고 있지 않는지를 살폈다.
"저쪽으로 가면 어디가 나올지 궁금했어요. 하지만 기다릴 거 같아서 그냥 돌아갔었죠."
얼마 안가 우리는 다시 그 갈림길에 도착했을 때, 수빈이 아직 우리가 가보지 않은 세번째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궁금하면 지금이라도 가볼까?"
보라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음... 그러고 싶기는 한데..."
수빈은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있는 윤진을 바라보았다.
다섯 명의 여자들 중 오직 그녀만이 겁을 먹고 있었다.
보라는 딱히 궁금하지도, 두렵지도 않은 모양이었고, 나은과 수빈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다.
그리고 정미는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기 어려웠다.
물론 그녀라면 쉽게 겁을 먹지 않을 것은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가보고 싶어?"
수빈의 의사를 물어보았다.
수빈은 다시 한 번 윤진의 얼굴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진에게 안쓰러워하는 마음과 자신의 호기심 사이에서 호기심이 이긴 모양이다.
역시 수빈 다운 결정이다.
"그러면 한 번 가보자. 괜찮지?"
난 살짝 몸을 떨고 있는 윤진의 손을 잡아주고 물어보았다.
"네에..."
두려워하면서도 다소곳하게 대답을 하고 있는 그녀의 표정에서, 그렇게나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던 부잣집 망나니 딸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만일 누군가가 지금의 윤진을 보았다면 무척이나 순수하고 성품 좋은 미인으로 착각하고 말 것이다.
역시 사람은 외모가 전부인 모양이다.
"걱정할 거 없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넌 내가 지켜줄테니까."
물론 윤진 뿐 아니라, 내 여자들 중 누구라도 위험에 처하게 놔둘 생각은 없지만, 지금은 이 여자에게 하는 것이 가장 어울릴 것 같았다.
내침김에 난 윤진의 몸을 들어올려 공주 안기로 안았다.
그녀는 수줍은 표정을 하며 팔을 올려 내 목을 감싸안았다.
이제 윤진에게서 두려움을 밀어내어주었으니, 우리의 모험을 두려워할 사람은 남지 않았다.
그렇게 윤진을 안은 채로 일행의 앞에 서서 수빈이 가리킨 길로 성큼 발을 내딛었다.
나머지 여자들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여기도 꽤 으슥하네요."
갑자기 나은이 내 옆으로 다가와서는 한마디 했다.
갈림길에서부터는 나무가 꽤나 우거져서 햇빛도 많이 들어오지 않아 여자들에게는 꽤 무서울만했다.
하지만 나은의 표정은 두렵다기보다는 장난기가 서려있었다.
아마도 어떤 의도를 지닌 말인 듯 했다.
"정말로 야만인이라도 살고 있을 것 같은 곳이에요."
정미도 합을 맞춰 대꾸를 한다.
그리고 내 품에 안겨있던 윤진의 얼굴에 다시 그늘이 생겼다.
나은이나 정미나 윤진을 놀리려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이러다가 위험한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하죠?"
나은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윤진이 두려워할만한 말을 꺼내놓았다.
"주인님이 지켜주신다고 했잖아요!"
잔뜩 겁이 나버린 윤진이 조금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윤진이는 주인님이 위험한 사람들이랑 싸우다가 다치기라도 해도 괜찮다는 거야?"
정미가 다시 윤진의 말을 반박했다.
"아니! 그런 거 아니고..."
윤진은 억울함과 죄책감이 반씩 섞인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런 거 아니에요."
"나도 알아."
나은과 정미의 장난에 당황하는 윤진을 보는 것은 즐거웠지만, 구태여 나까지 그녀들과 한패거리가 되어 윤진을 괴롭힐 필요는 없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기면, 노예인 네가 먼저 주인님을 지켜드리는 게 맞지 않아?"
나은이 다시 한 마디 했다.
"맞아요. 충성스러운 노예라면 당연히 그래야죠."
정미가 다시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윤진의 얼굴이 굉장히 야릇하게 변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다 못해 주인님이 피하실 수 있게 나쁜 놈을 잡고 있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생각해? 윤진아?"
정미와 나은은 그렇게 윤진을 괴롭히는 것이 꽤나 즐거운 모양이다.
"맞아요..."
윤진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할게요."
그녀는 이제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만약에 진짜 무서운 사람들 나타나면... 제가 미끼가 될게요."
정미와 나은의 협박에 가까운 장난을 이기지 못한 윤진은 자신의 희생을 자청했다.
그런데 미끼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윤진의 얼굴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아마도 감동과 희열에 가까운 표정이 아닐까 싶었다.
어쩐지 그녀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자극을 받았나 보다.
난 그녀를 안고 있던 손을 조금 움직여 윤진의 음부를 살짝 만져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조금씩 젖어들고 있었다.
지금은 그녀를 캐스팅한 상태가 아님에도 그랬다는 것은, 윤진이 이미 완벽하게 스스로를 노예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증명이었다.
"좋은 자세야. 먼저 윤진이가 미끼가 되고, 다음은 나. 그리고 마지막은 나은 씨야. 알지요?"
정미가 덧붙였다.
"알아요."
나은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쩐지 두 여자는 단순히 장난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들은 은연중에 나름의 서열을 정해놓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자신들끼리 생각하기에 내가 더 아끼는 여자의 순서였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그녀들에게 최선의 사랑을 보여주려 노력한다해도, 감출 수는 없던 모양이다.
역시 그녀들의 장난에 끼어들지 않기를 잘했다.
"쓸데없는 생각들 하지마. 설마하니 날 자기 여자를 방패로 삼아 도망칠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야?"
남의 여자라면 모르겠다.
난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인간은 아니다.
하지만 내 여자라면?
솔직히 모르겠다. 인간이란 극한 상황에 처한다면 어떤 일을 할 지 모르니, 섯불리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그래도 남자가 가오가 있지...
더군다나 이 섬에서 만나게 될 무엇이든 정말로 위험하지는 않을 터이니 지금은 이렇게 허풍을 떨어도 될 것이다.
"알아요. 당신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는."
정미의 말이었다.
"그래도 우리 마음은 이렇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물론 난 그녀의 진심을 믿는다.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여자들의 마음도.
결국 여기서 믿을 수 없는 것은 오직 나 자신 뿐인 모양이다.
정미의 고백에 기쁘기보다는 살짝 씁쓸해졌다.
난 묵묵히 윤진을 안고 걸어갔다.
울창한 숲은 계속 이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정말로 이 섬의 다른 주민들을 마주하고 말았다.
"Bn là ai!"
"Nó là con ngi"
"vô lý"
우리 일행은 낯선 언어로 우리를 바라보며 놀라고 있는 무리를 보고 깜짝 놀라 그자리에 멈춰서버렸다.
"뭐에요! 저게?"
윤진이 깜짝 놀라 내 품을 파고들며 소리쳤다.
"사람이 아냐!"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던 나은도 한 마디를 하고는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래도... 위험해질 것 같네요."
정미가 나은의 옆에 섰다.
그리고 수빈과 보라도 각각 내 양쪽에 서서 아무말 없이 그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làm th nào con ngi có th đn đây?"
"Git cht!"
"Con ngi là k thù ca chúng ta!"
"Ch đi"
각기 손에 투박한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있는 그자들은 서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에게 적의를 보이는 것은 틀림없었지만, 섯불리 달려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면은 아니겠지요?"
나은이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가면을 쓰고 저렇게 주둥이를 움직이며 말할 수 있겠어요?"
정미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괴물들이야..."
여전히 바들바들 떨고 있는 윤진이 내뱉었던 말처럼 명백하게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뭐야? 늑대 인간이라도 되는 거야?"
나은이 어이없다는 듯 내뱉었다.
"늑대치고는 너무 이상해."
정미도 한 마디 했다.
그 괴물들의 몸뚱아리는 인간의 것이었지만, 대가리는 인간의 것이 아니다.
나은이 말했듯 개나 늑대와 비슷한 무언가였다.
"하이에나에요."
수빈이 침착하게 말했다.
"하이에나? 아프리카에 사는 그거?"
"네. 틀림없어요."
아는 게 많은 수빈은 그 짐승 인간들의 정체를 금세 알아차렸다.
물론 그게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다른 여자들은 수빈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대치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하이에나 수인들은 각기 들고 있던 몽둥이를 앞으로 내밀며 우리를 위협하고 있었지만, 덤벼들지는 않았다.
대신 서로 무언가를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어쩐지 그들도 겁을 먹은 모양이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나은이 작게 물었다.
"사람이 들어오면 안 되는 장소라는 것 같아. 그리고 우릴 잡을 생각인 모양이야."
"네? 알아들을 수 있어요?"
윤진이 물었다.
"어. 대충은."
대충이 아니라 전부 다 였다.
낯선 언어였지만 난 그들이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하고 있었다.
"잡아야 해!"
세 마리의 하이에나 중 가장 키가 작은 놈이 계속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저 가운데 있는 남자 덩치가 너무 커."
"숫자도 우리보다 두 배나 많아. 아무래도 어려울 거 같아."
"테루! 가서 누나들을 불러와! 그동안 우리가 지키고 있을게."
개중 가장 덩치가 좋은 녀석이 가장 작은 놈에게 말했다.
아마도 녀석이 우두머리 격인 모양이다.
"귈샤. 너랑 엔긴 둘이서는 안 돼."
하지만 키가 작은 녀석은 동료를 두고 달아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싸우려는 거 맞죠?"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수빈이 물었다.
"응. 그럴 모양이야. 한 명이 가서 동료를 불러오라고 말하고 있어."
난 내가 들은 것들을 여자들에게 말해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