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6화 〉@44. 남극의 파라다이스
이미 휴가는 전부 사용했으니, 아침이 되면 출근하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내가 없어도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큰 문제야 없겠지만, 그래도 얼굴은 비춰야 했다.
"음... 전 여기 있을게요. 전파가 잡히지 않아서 갑갑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용히 생각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수빈은 이 낙원 섬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그럼 그렇게 할래?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말 해."
"없어요. 나 여기 있는 것만 잊지 말아 주세요."
수빈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불루 라군을 나와 회사에 출근해서 업무를 보고 오후 시간이 되어 다시 수빈에게도 돌아갔다.
"응? 왜 이렇게 빨리 와요? 마음이 바꼈어요?"
수빈이 살짝 놀라며 물어왔다.
"마음이 바껴? 무슨 소리야? 나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일을 하고 돌아온 건데?"
"네에? 나 여기서 아저씨 나가는 거 보고, 바로 다시 들어오신 건데요?"
수빈의 대답은 날 깜짝 놀라게 했다.
맙소사!
대체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일이람?
"진짜로 하루 종일 일하고 온 거란 말이에요?"
수빈도 이번엔 무척 놀란 모양이다.
"그래. 참. 나..."
"흐음... 그러니까 이곳은 시간도 왜곡을 하는 장소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여기는 진짜로 세상에 존재하는 장소가 아닌 모양이에요."
수빈은 금세 사태를 파악한 모양이다.
"그리고 아마도 아저씨가 이곳에 있을 때만 시간이 흐르나봐요. 아저씨가 이곳에 없으면 시간이 멈춰있고..."
"아! 그래."
난 지난 번에 가재, 게 따위와 함께 받은 아이스박스를 기억해내었다.
그 물건도 마찬가지였다.
뚜껑을 닫아놓으면 내부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아항! 그렇군요. 그런데... 억울하네."
"뭐가?"
"아저씨가 밖에 계신 동안 사라져버린 내 시간 말이에요."
"하하..."
그러겠다.
"아. 참. 그런데 나 다시 나가야 하거든."
"무슨 일 있어요?"
"윤진이하고 정미가 오늘 보자고 해서. 아마 한두 시간이면 될 거 같은데. 어쩔래? 같이 갈까?"
윤진이 오늘은 할 말이 있다며 시간을 내달라 했다.
"네! 좋아요. 지금이요?"
"아니. 한두 시간 정도 있다가 가면 돼."
"그럼 우리 해요."
수빈이 내 옷을 벗기며 달려들었다.
윤수는 우울했다.
최근 두어 달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생겼다.
누나의 결혼식 날 아버지가 쓰러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마저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쓰러진 거야 그러려니 해도, 자신을 끔찍히 아껴주시던 엄마의 사고는 너무나 커다란 충격이었다.
특히 엄마가 아버지 보다 먼저 그렇게 가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부친이 병원에서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엄마는 윤수에게 회사를 물려받게 할 거라고 장담을 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친에게 큰 정을 느끼지 못하던 윤수는 차라리 빨리... 하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교통 사고로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윤수를 다독거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도 아옹다옹하던 누나 윤진은 어째서인지 모친의 죽음 이후로 윤수를 더욱 차갑게 대했다.
부친은 여전히 일어나지 못한 채, 병원에 누워만 있었다.
"너 아직도 대양 그룹이 네 손에 넘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니?"
어느날 누나가 윤수에게 놀리듯 물었다.
"뭔 소리를 하고 싶은 건데?"
불끈한 윤수가 누이를 노려보며 물었다.
"아니. 이제 그 헛된 꿈은 내려놓을 때가 된 거 같아서."
윤진은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윤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누나가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앞서간다기보다는 그냥 현실을 알려줄 때가 된 거 같아서 말이야. 네가 쓸데 없는 미련을 가지는 게 안타까워서 말이지. 누나니까 하는 말이야."
"웃기지 마."
그리 사이 좋은 오누이는 아니었다.
윤수도 윤진도 부친이 일구어 놓은 회사에 탐욕을 가지고 있었고, 서로가 남매로서가 아니라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은지도 오래였다.
그건 아마도 모친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 둘이 어려서부터 모친은 아들인 윤수를 끔찍히 아껴왔고, 딸인 윤진은 알게 모르게 차갑게 대해왔었다.
"아버지가 병원에 계시다고 알랑거리는 모양인데, 어디 전부 네 뜻대로 될까봐?"
"알랑거리든 뭐든. 이미 결정은 났으니까 그렇게 알라고."
윤진은 어느때보다 여유있었다.
아무래도 엄마가 그렇게 사고로 죽고 난 뒤로, 병원을 들락거리더니 정신이 혼미해진 부친을 어떻게든 구워 삶은 모양이다.
윤수는 누이와의 말싸움은 포기했다.
대신 다음날부터 병원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진짜로 그 노인네가 무슨 일을 저지르기 전에 마음을 돌려놓아야 했다.
하지만 윤수는 부친을 만나지 못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면회를 거절한 것이다.
병원에서 막는 거 아니냐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피워보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의 변호사까지 나와서 윤수에게 지금은 잠자코 있으라 소리만 했을 뿐이다.
정말로 누이가 무슨 짓인가 저지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부친은 물론이고, 변호사까지 구슬른 모양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윤수는 회사로 찾아가 부친의 심복인 함 이사를 면담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네. 자네 부친... 회장님께서 지금 회복중이시니, 다 나으시고 난 뒤에 이야기를 해 보세."
함 이사의 태도도 무척이나 냉랭했다.
아무래도 그 사람까지도 누이에게 넘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이미 회사에 자리를 잡고 있는 누이 윤진과는 달리, 아직 학생 신분에 불과한 윤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분노에 사로잡힌 윤수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버렸다.
어차피 돈은 넘치게 있었다.
슈퍼카를 몰고 나이트에 가서 이쁜 여자를 꼬셔 밤을 보내거나, 혹은 술을 먹여 호텔로 데려가 욕심을 채우고 나면 버리고 나오기도 했다.
폭주하는 윤수를 막아줄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어느날 오랜만에 집에 들어오니 거실에 윤진이 인상을 쓰며 앉아있다가, 그를 보고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너 지난 달에 카드를 얼마나 긁었는 지 알아?"
"알 게 뭐야?"
"알 게 뭐야? 네 나이에 5,000만 원이 말이 되니? 한 달에 5,000만 원? 너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아 넵둬. 그깟 돈 몇 푼 썼다고 난리야? 우리 집이 그깟 푼돈 때문에 "
"뭐어? 우리집?"
"그래. 우리집이지, 그럼 아니야?"
윤수의 말에 윤진이 씩 웃었다.
윤수는 누나의 표정이 무척이나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저런 얼굴은 누군가를 잔뜩 괴롭히는 것을 성공했을 때에나 짓던 표정인데...
살짝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 아니야. 너희집은 아니야."
윤진이 아주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가 날 쫓아내기라도 한데?"
"후후!"
윤진은 다시 그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아버지도 너희 아버지 아니거든."
"뭐라고? 지금 무슨 장난이 치고 싶은 건데?"
윤수는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비록 대양 그룹의 상속을 놓고 신경전을 펼치는 사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나올 것 까지는 없지 않은가?
"글자 그대로야. 너희 아버지 아니거든."
윤진은 수수께끼 놀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시끄러워. 나 지금 피곤하거든. 놀고 싶으면 딴 사람 찾아봐."
귀찮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불편하기도 했다.
누이에게 저런 표정이 떠올랐을 때에는 누군가가 아주 지독한 일을 당하고는 했었다.
그리고 윤수는 지금 윤진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래. 피곤하면 들어가서 자. 어차피 오늘 밤이 너한테 이 집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 될 테니까."
다시 윤진이 비아냥거렸다.
"진짜. 뭘 하자는 건데? 그새 아빠한테 달라붙어 아양을 부리더니, 날 쫓아내자고 작정이라도 한 거야?"
"비슷해."
윤진은 동생의 추측을 부인하지 않았다.
"뭐라고?"
순간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윤수가 벌떡 일어났다.
"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눈이 뒤집힌 윤서는 더이상 누나라 부르지도 않았다.
사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두 남매는 꽤 자주 다투었고, 그럴 때마다, 윤수는 윤진을 누나라 부르지도 않았다.
"진짜... 어쩌면 그렇게 철이 안 드는 거니? 하긴 그 씨가 어디 가겠어?"
"뭐? 씨? 무슨 씨?"
"하아... 진짜로 널 위해서는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하지만 윤진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이야기 하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너. 아버지 자식 아니야. 엄마가 다른 남자 씨를 받아서 낳은 놈이야. 크크크."
그리고 그날 윤수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뭐라고? 씨발! 그게 말이라고 하는 거야?"
"뭐. 충격이 크겠지. 그래도 어쩌겠니? 그게 사실인데?"
"지금 장난해? 어떻게 엄마를... 엄마를 그렇게 모욕할 수 있어? 엄마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윤수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쳐 소리를 내고 누나에게 소리쳤다.
"하아... 정말로 말귀를 못알아 듣는구나."
윤진은 갑자기 자기 가방에서 무슨 서류를 꺼내 윤수에게 던져주었다.
"이게 뭔데?"
삐딱한 표정으로 누나가 건내준 서류를 읽어본 윤수는 깜짝 놀랐다.
"뭐야? 이따위 질 나쁜 장난?"
서류에 적혀있는 유전자 확인 검사서라는 제목을 보고 윤수의 분노가 다시 불처럼 타올랐다.
"거기 뒤에 보면 변호사님 확인서까지 있는 거 보이지?"
윤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너도 알고 있었지? 너랑 아빠랑 닮은 데가 별로 없는 거?"
그녀는 계속해서 동생을 자극했다.
"씨발... 이런 종이 쪼가리 한 장 내놓으면 누가 믿을 거 같아?"
너무 갑작스러운 사건이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지금 누이가 즐기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내놓은 종이가 진실이건 아니건, 윤진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윤수는 충분히 분노하고 있었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마. 네가 믿건 안 믿건 사실은 사실이니까."
"야! 정윤진!"
쾅!
다시 한 번 윤수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미친년아!"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참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너무 그렇게 흥분하지마. 때로 진실은 쓰라린 법이니까."
윤진은 끝까지 이죽거리고 있었다.
"씨발!"
그리고 윤수는 머리 끝까지 올라온 분노를 발산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딩동!
누군가 찾아왔는지 벨이 울렸다.
어? 그러고보니 오늘따라 집에 아무도 없다.
그 많던 일하던 사람들은 어디에 간 거지?
평소에도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안하무인이던 윤수는 그때까지도 그들이 집에 없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윤진이 문을 열어주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윤수는 그녀가 건내주었던 그 종이 쪼가리를 다시 읽어보았다.
친자 확률 0.015%
서류의 가장 아랫단에 쓰여진 글씨에는 그렇게 쓰여있었다.
빌어먹을...
이게 진짜라는 증거는 없다.
무엇보다 자신의 유전자를 어떻게 체취했다는 말이야?
윤수는 태어나서 지금처럼 열심히 머리를 굴려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윤진이 인터폰으로 대문을 열어주고, 누군가가 집안으로 돌아올 때까지 윤수는 이 황당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어쩌지?'
그도 어렵풋이 그 서류가 진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윤수와 윤진의 모친은 부친과 사이가 무척 좋지 않았다.
그리고 어쩐지 그녀는 유독 윤수만을 아꼈다.
"언제고 이 대양 그룹은 네 손에 들리게 될 거야. 그때까지만 참아."
"그 계집애는 내 배에서 나왔는데 정이 하나도 안가. 그 남자 피를 이어서 그런 거겠지?"
"윤수야. 엄마는 세상에서 너밖에 없어."
생전의 모친이 했던 말들이 머리 속을 떠돌았다.
확실히 지금 생각하니 그녀는 자신과 부친 사이가 좋아지는 것도 그다지 탐탁치 않아 했었다.
"씨발..."
"이제와? 언니?"
윤진이 현관문을 들어오는 여인을 보고 인사를 했다.
"응. 뭐하고 있었어? 어? 윤수 씨도 있었네?"
그녀가 윤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정미 씨..."
그리고 윤수도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째서 그녀가 온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