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화 〉@41. 심야 온천 요바이 - 잘 알지 못하는 남자가 밤에 몰래 이불속으로 들어와서
응? 뭐라고?
난 잠시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귀를 의심해야 했다.
"잠깐만요."
레이나가 나무 위로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여기요. 망원경은 여기 숨겨놓는 거예요."
그녀가 망원경을 꺼내 내게 건내주었다.
"이걸로 훔쳐보라고?"
"네!"
레이나의 목소리가 너무 밝고 명랑해서, 그녀의 의도가 무언지 잠시 이해하기 어려웠다.
"뭐해요? 저기 제일 끝에 단발 머리 여성분. 그분이 이번에 오신 손님 중에 제일 미인이거든요. 빨리 봐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레이나가 재촉을 해서 난 어쩔 수 없이 망원경을 눈에 대었다.
물론 그 거리는 마스터 카드 < 매의 눈 > 덕분에 망원경이 없어도 바로 앞에서처럼 상대를 볼 수 있었지만, 이 소녀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차피 수건으로 몸을 가려서 딱히 볼 건 없는데?"
"그렇기는 한데요 밤에 다른 사람이 없을 때면 그냥 발가벗고 있는 사람도 종종 있어요."
레이나는 아주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는 것처럼 은밀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왼쪽 건물은 여자 욕실이거든요. 유리창을 열어놔서 안이 환히 들여다보이죠?"
"으응..."
"거기서 여자들 목욕하는 거 볼 수 있어요. 어때요. 멋지죠?"
"그렇구나."
"그럼 이리로 오세요. 너무 빨리 움직이면 안 되요. 나무가 많아도 빨리 움직이면 눈에 띄거든요."
레이나는 다시 내 손을 잡고 언덕을 따라 걸어갔다.
"저쪽은 객실이에요."
그녀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언덕 아래로 객실들을 바로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안쪽이 아주 환히 들여보여요. 밤이면 객실마다 불을 켜놓아서 더 잘보이거든요. 대개 커플끼리 온 거라서, 여기 오면 아주 생생한 장면들을 구경할 수 있다구요. 크크."
레이나는 신이 나서 내게 설명해주었다.
난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러니까 제일 좋은 장소라는 것이 이렇게 손님들을 훔쳐보기 좋은 곳을 말한 거였나?
"각 객실에 딸린 욕실도 여기서는 그대로 보여요."
여관의 객실들은 모두 숲과 정원을 관람하기 좋게 창을 크게 내놓았고, 욕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숲을 향한 쪽은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이 아니라, 굳이 창문을 가릴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객실에서 볼 때는 그랬다.
"섹스하는 거라든지, 샤워하는 모습이라든지, 여기서는 맘대로 볼 수 있어요."
이제 레이나는 굉장히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 딱히 그녀에게서 변태 성욕에 빠진 여자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그보다는 둘도 없는 친구에게 비밀스러운 훔쳐보기 장소를 알려주고 있는 중학생 남자 아이가 그런 표정이 아닐까 싶었다.
"어때요? 굉장하죠?"
레이나는 빨리 칭찬해달라고 채근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굉장하구나. 밤에 꼭 와 봐야겠다."
"그러니까요. 여기서 볼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녀는 여전히 내 손을 꼭 잡고 있었고, 내게 더 많은 칭찬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꼬리가 달렸다면, 지금쯤 아주 정신없이 좌우로 흔들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뭐. 뭐에요. 내가 무슨 아이도 아니고..."
레이나의 얼굴이 빨개졌다.
"고마워서. 이런 선물을 줘서."
아! 그러고보니 지난번 그녀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아마도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준다고 했었지?
설마 이 장소가 그녀에게 소중한 것인가?
만약 레이나가 열다섯 살 소년이라면 소중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나라도 이런 멋진 비밀 장소를 알고 있다면 결코 남에게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긴 너만 알고 있는 곳이니?"
"네. 정원을 돌아다니다가 찾아냈어요. 우리가 온 길로 오지 않으면,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거든요."
"아하! 진짜 비밀 장소로구나."
"그죠?"
그런데 왜 그녀의 눈이 이렇게 초롱초롱 빛이 나고 있는 걸까?
레이나는 한참 동안 내 눈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점점 더 홍조를 띠어가고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이 귀여운 여자 아이는 부끄러워하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내게서 눈을 돌리려하지 않았다.
나도 그녀의 맑은 눈을 기쁜 마음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밤에도 반짝일 것 같은 맑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기분이 좋았다.
"맞다. 참. 나 아저씨한테 줄 거 있어요."
갑자기 그녀가 얼굴을 돌리며 말을 꺼냈다.
"응? 선물?"
"지난번에 말했잖아요. 다음에 오시면..."
"나한테 아주 소중한 것을 준다고 했었지."
"기억하고 있으셨네요?"
레이나가 환하게 웃으며 날 다시 바라보았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다시 레이나를 만날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피! 거짓말쟁이!"
왜 여자들은 날보면 그렇게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걸까?
"거짓말 아닌데. 레이나가 말한 소중한 게 뭔지 너무 궁금해 참을 수 없었거든."
"좋아요. 믿어드릴게요."
"그런데 이 장소를 말한 거 아니었어? 소중한 게?"
"진짜. 그게 말이 되... 음... 그렇다. 여기도 굉장히 소중한 장소 맞는구나. 여하튼 아니라구요."
레이나는 말을 하면서 기모노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다시 꺼내는 그녀의 손에는 무언가 작은 물건이 하나 들려있었다.
"이거에요."
레이나가 내게 그걸 건내주었다.
받아보니 레이나의 손바닥 반절만한 천으로 된 사각형의 주머니 같은 물건이다. 윗쪽에는 금색 줄이 달려있고, 태극 문양의 한쪽 처럼 생긴 굽어있는 작은 구슬 같은 것도 하나 메달려있다.
아마도 여자들의 노리개 같은 것이나, 부적 같은 것을 담아 놓는 악세사리 따위로 보였다.
사각형 주머니 위에는 아주 섬세한 자수로 도깨비가 그려져있다.
"멋진 물건이네. 그런데 여기 그려진 건 도깨비인가?"
"슈텐도지에요."
"슈텐도지?"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그러고보니 어제 여주인 스즈메가 했던 말 중에 그런 단어가 있었던 것도 같았다.
"귀신들의 대장이에요. 한때 세상을 어지럽게 했던 백귀의 왕이었죠. 하지만 미나모토 가문의 시조이신 라이코우(賴光)에게 토벌당했죠."
"굉장한 도깨비로구나."
"맞아요. 어쩐지 아저씨가 슈텐도지랑 비슷한 거 같아서 직접 수를 놓았어요. 마음에 드세요?"
어?
그러니까 너희 선조에게 토벌당한 도깨비랑 나랑 비슷하다는 거지?
"멋있구나..."
"맘에 들어하실 줄 알았어요."
레이나는 내 마음도 모르고 너무나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오마모리 위쪽에 달린 곡옥(曲玉)은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주신 거예요. 언젠가 꼭 주고 싶은 남자가 생기면 주라고 하셨었죠."
아! 그러니까 소중한 것은 도깨비 그림이 그려진 주머니가 아니라 그 곡옥인 모양이다.
"그렇게 소중한 걸 나한테 줘도 돼?"
솔직히 얼떨떨했다.
마치 무슨 정인에게나 줘야할 보물 같은데...
"괜찮아요. 비싼 거 아니에요. 같이 교토에 갔을 때 기념품 가게에서 산거거든요."
아... 그럼 무슨 대단한 증표는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엄마가..."
"그땐 학교에 내가 좋아하던 남자애가 있었거든요. 원래는 걔한테 주려고 했던 거예요. 엄마도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안 줬어?"
"주려고 하던 날, 걔가 자꾸 날 놀리잖아요. 그래서 그걸 손에 꼭 쥐고 그애 코에 주먹을 날렸거든요. 그랬더니 코피가 나서 막 울잖아요. 뭐... 그날로 정이 떨어지더라구요. 난 사내다운 남자한테 주고 싶었는데 말이죠."
"하하. 그렇구나."
여전히 난 그녀의 선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고 있었다.
크게 대단한 의미는 아닌 것도 같고, 그렇지만 소중한 것이라고 했으니까 의미가 있는 거 같기도 하다.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 굉장히 마음에 들어. 적어도 내가 사내답다는 말이잖아? 이 도깨비처럼."
"맞아요. 아저씨 굉장히 사내다워요. 여기서 훔쳐보다가 느꼈어요."
레이나는 손을 들어 저 아래의 객실을 가리켰다.
"응?"
"그날 아저씨 네 쌍이 함께 왔었잖아요."
"으응..."
난 어쩐지 이 여자가 할 다음 이야기가 두려웠다.
"그리고 아저씨 같이 온 여자들을 전부 해치웠죠?"
"으응... 그것도 봤어?"
"다른 남자들한테서 여자들을 전부 빼앗아버린 거잖아요?"
"하하..."
"진짜 슈텐도지 같았어요. 원래 슈텐도지는 굉장한 미남이었데요. 온 도시의 여자들이 상사병에 걸릴만큼이요."
레이나는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갔다.
"그랬구나... 하지만 난 그렇게 미남은 아닌데..."
"괜찮아요. 나중에 슈텐도지도 저주를 받아 굉장히 무서운 얼굴이 되었으니까요."
그건 칭찬이 아니잖아...
슈텐도지도...라니...
"여기서 아저씨가 다른 남자의 여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안는 모습을 보면서 아저씨가 진짜로 슈텐도지의 환생은 아닌가 싶었어요.
더군다나 아저씨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생긴 것도 무시무시하고 말이죠."
"고맙다... 고 해야겠지?"
"여하튼 처음엔 그냥 인상이 무서운 남자로구나 했는데, 그걸 보니까 어쩐지 진짜 이케멘 같더라고요."
"이케멘이라는 게... 잘생긴 남자를 말하는 거지?"
설마 내가?
그정도로 콩깍지가?
"음... 그런 의미도 있는데. 그보다는 훨씬 더 범주가 넓어요. 한국말로 한다면... 여하튼 멋있는 사내를 말하는 거예요. 얼굴이랑 상관없이 분위기가 멋진 남자라면 다 이케멘이에요."
쪼금 좋다 말았다.
절대로 내가 잘생겨보인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굉장한 선물이네. 이거. 내가 이 도깨비처럼 무섭고 사내다운 이케멘이라는 거지?"
"맞아요! 이케멘 슈텐도지."
레이나가 기뻐하며 내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이렇게 소중한 선물을 받아도 되나 모르겠다."
"싫어요? 그럼?"
레이나가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럴리가. 그게 아니라 너한테 정말 좋은 선물을 받았다는 거지."
"그럼 됐어요. 선물은 주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기뻐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 이거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게."
"자. 이제 한 군데 남았어요."
레이나는 내손을 잡아끌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객실 북쪽의 수영장이 내려보이는 곳이었다.
"일반 객실용 수영장은 아저씨가 다녀가신 다음에 개장했어요. 아직 안 가보셨죠?"
온천장 여관 조화에는 모두 두 개의 수영장이 있었다.
하나는 특실에 딸린 개인용 수영장,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일반 객실용 수영장이다.
아직은 한여름이라 어디에선가 논다면 수영장이 제격이다.
지금도 수영장에는 열 명 쯤 되는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저쪽에 보이는 곳이 여자 탈의실이에요."
레이나가 말하지 않아도 난 금세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아쉽지만 저기는 반사유리로 되어 있어서 안을 볼 수 없어요. 하지만 저녁이면 안에서 불을 밝혀 들여다보여요."
"그런데 네가 아쉬울 건 없잖아? 정말 보고 싶다면 당당하게 여자 탈의실로 들어가서 보면 되잖아?"
"아저씨는 노조키... 훔쳐보기의 묘미를 모르시나 봐요."
레이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보며 말했다.
"아! 그래... 역시 훔쳐보는 쪽이 재미있겠지. 그지만 넌 여자니까 차라리 남자를 훔쳐보는 쪽이 낫지 않아?"
"전엔 그랬는데, 이젠 딱히 그런 거 없어요. 뭐랄까 감흥이 없어졌다고 해야하나요. 아저씨를 보고 난 뒤에는 말이죠."
레이나는 씩 웃었다.
도통 감을 잡기 어려운 여자이다.
나한테 호감이 있다는 걸까? 아니면 그저 훔쳐보기의 대상으로 제일 좋다는 걸까?
"그러니까 이제부터 여기는 아저씨의 비밀장소에요."
그녀는 마치 자신의 비밀스러운 곳을 내게 넘기겠다는 것처럼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 시간에는 온천이 제일 볼거리가 많아요. 가요. 우리."
"으응..."
아무래도 그녀의 기세에 눌렸는지, 난 레이나에게 계속 끌려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에 왔었던 온천이 내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침 욕실에서 한 여자가 막 옷을 벗고 있었다.
난 레이나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잠시 망원경으로 그여자가 옷을 벗고, 욕탕에서 몸을 씻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외모가 그리 빠지지는 않는 젊은 여자라 정말로 훔쳐보는 맛은 있었다.
난 다시 레이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동안 레이나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무언가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레이나는 꽤 흥이 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