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5화 〉@39. 해변의 여인들 (295/377)



〈 295화 〉@39. 해변의 여인들

언니라고 하면 아마 은희를 말하는 모양이다.

요즘 들어 지연은 거의 매일 은희와 만나고 있는 것 같았다.


때로는 은희의 집으로 가기도 했지만, 은희의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때도 있는 모양이다.


나로서는 그걸 말릴 생각도, 딱히 나쁘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은희와 지연은 제법 잘 어울렸다.

"언니 말로는  나이야 말로 제일 큰 장점이래요. 남자들은 뭐니 뭐니 해도 어린 여자한테 약하대요."

"그건 사실이 아니야."


"진짜요?"
지연이 고개를 치켜들고 날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당연하지. 설마 내가 지연이가 제일 어리다고 해서 제일 이뻐할까."

"흐음? 진짜일려나?"
지연이 입술을 모으고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하긴 아저씨 은희 언니랑, 지아 언니한테 꼼짝 못하는  보면 맞는 것도 같고."

딱히 꼼짝 못하는 것은 아닌데...




"여하튼 그래도 어린 여자면 훨씬 더 위험한 건 사실이에요."
대체 은희는  아이에게 무슨 사상을 주입하려는 걸까?


불현듯 은희와 지연의 만남이 불러올 파장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 그 여자 한 번 보고 싶어요. 만날거예요."
지연이 이렇게까지 자기 주장을 확실하게 밝힌 적이 있었나?

"그렇게 하자. 언젠가는."


"좋아요. 오늘은 휴가 첫날이니까 더는 안 괴롭힐게요."
다행히 그녀는 휴가를 망치면서까지 그 여자에 대해 추궁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우리 빨리 나가요. 바닷가에 가고 싶어요."
지연이 옷을 벗으며 말했다.

"수영은 9시까지만  수 있다던데?"
비키니 수영복으로 갈아입으려는 지연을 보고 말했다.

"상관없어요. 아저씨도 빨리 이걸로 갈아입어요."
그녀가 가방에서 천쪼가리 하나를 꺼내 내게 건내주며 말했다.

지연이 입고 있는 비키니와 색과 무늬가 같은 것을 보니, 나름 커플 수영복인 모양이다.


난 군말 없이 그녀가 골라준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우리는 해변으로 나가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바닷가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호텔로 들어왔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 방을 나서는데 지연은 전날과는 달리 수영복을 입지 않고, 가방에 넣어 들고 나섰다.


"그건 왜?"

"그럴 일이 있어요. 흐흐."
지연이  무언가 엉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호텔에서 멀지 않은 식당으로 가서 전복죽을 먹고, 다시 해변으로 갔다.

"오빠 저기 탈의실 있다."
지연은 휴가 기간 동안에는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단다.


아무래도 그편이 나을 것 같아 그러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평소에도 그쪽이 나을 것 같았지만, 그걸 강요할 생각은 없다.

"오빠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지연이 선글라스를 끼고 해변의 탈의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제서야 난 그녀의 목적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쟤가 진짜!
솔직히 조금 겁이 났다.

아무리 카메라가 달린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고 해도, 만의 하나라는 것이 있는데.

그나마 내 스마트폰이 아무때라도 데이터를 삭제할 수 있다고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연은 생각보다 오래 머물다가 나왔다.


그런데 그다지 밝은 표정이 아니다.



"옷 갈아입으면서 무슨 일 있었어?"
혹시라도 잘못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어 물어보았다.

"생각보다 이쁜 여자가 없어요. 히잉! 그래도 여기가 젤 유명한 해수욕장이라 기대하고 왔는데."

뭘 기대했다는 거야?

얘가 점점 나쁜 짓에 재미가 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그런데 너무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게 낫지 않을까?"

"시끄러워요. 누가 나 좋자고 하는 거예요?"
지연이 도끼눈을 뜨며 말했다.


"딱히 나 그런 거 필요 없는데..."
심지어 내가 시킨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너무 시간이 일러서 그런가봐요. 이따가 다시 해봐야지."
지연은 내 말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해수욕장 탈의실에서의 도촬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금세 기운을 차렸다.

우리는 오전 내내 물놀이를 하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사람들 시선이 그렇게 신경쓰이지 않아?"

우리가 걸어갈 때면 주변 사람들의 눈이 대부분 지연을 향하기 마련이었다.


남녀 노소를 할 것 없이 그녀의 가슴에 눈이 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해변에는 비키니 수영복 차림의 여자들로 가득했고, 그중에는 가슴이 큰 여자도 무척 많았지만, 대개 가슴의 크기는 몸의 지방 함량과 정비례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연은 슬림한 체형에 말도 안 되는 크기의 가슴을 지니고 있었고, 더군다나 선글라스로도 그녀의 미모는 가려지지 않았다.

지연이 해변을 걸어가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출렁이는 가슴에 눈이갔다가,  가슴의 소유자가 앳된 얼굴의 미녀라는 것에 모두들 놀라고는 했다.



"뭐. 어때요. "


"배고파요. 밥먹으러 가요. 우리."
지연이 내 손을 잡아끌며 해변을 벗어났다.


"샤워하고 옷갈아입고 나올게요."
하지만 지연의 목적은 이번에도 탈의실이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낮이 되니까 이쁜 여자들이 있어요."
이번에는 밝은 얼굴로 나와 히히덕거리며 좋아한다.

그렇게 위험한 행동은 자제하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냥 포기해버렸다.

어차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뭐 먹으러 갈까?"


"국밥이요. 돼지 국밥 한 번 먹어보고 싶었어요."

"여자들은 보통 그런 거 싫어하던데?"


"왜요?  좋기만 한데."
우리는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물어 유명한 돼지 국밥집으로 향했다.



"아저씨말대로 유명한 집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진짜 많아요."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간 식당에서 그녀는 열심히 주위를 살폈다.

"전국에서 이쁜 여자들은 요즘 다 이 동네로 왔다고 하던데..."


"그래서 지연이도 여기 왔잖아."
 가볍게 지연을 띄워주려 해보았다.

"시덥지 않은 소리 하지 말구요. 오빠도 이쁜 여자 없는지 찾아봐요."

"이쁜 여자를 찾아서 뭐하게."

"헌팅이요."
지연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가?"


"그럼요."

"왜에?"
때때로 그녀의 생각은 좀처럼 읽기 어려울 때가 있다.


"재미있잖아요. 바캉스 오는 여자들은 사실 헌팅 당하고 싶어서 온다구요."

"헌팅을 당하고 싶다고는 해도, 여자한테 당하고 싶지는 않을 텐데?"

"오빤  몰라요. 허접한 남자한테 헌팅당하는 것보다 여자한테 헌팅당하는 쪽이 훨씬 낫다구요."
지연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쳤다.


"그렇다고 쳐도 헌팅에 성공하면 뭘 하게?"


"같이 놀지요."
지연이 손가락으로 나와 자신을 차례로 가리켰다.


"셋이서?"

"음. 보통 여자들이 혼자 오는 경우는 드무니까 넷이서요."
그녀가 하는 말이 진심인지 장난인지 도통 구별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지연은 진심일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근데 좀처럼 맘에 드는 여자가 없다. 흐음..."
지연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눈이 너무 높아졌나 보다."

"그런가? 어떤 여자를 찾는데?"
지연의 행동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말고, 그냥 맞춰주기로 했다.


어차피 이번 여름 휴가는 온전히 그녀를 위해 보낼 생각이었다.

"수빈 언니나 지아 언니 수준은 아니라도, 적어도 은희 언니 정도는 되야해요."

솔직히 은희는 굉장한 미인이라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니까 그 수준이라면 해수욕장에서도 여럿  것 같은데, 지연의 눈이 생각보다 까다로운 것 같았다.

"꼭 이뻐야해? 착한 사람이거나, 재미있는 사람이면 안 돼?"


"어차피 사람은 사귀어보기 전에는 마음속을  수 없잖아요? 그니까 차라리 겉 모습이 나은 쪽을 두드려보는 게 현명해요."

"뭐. 연애라도 할 거야?"

"못  건 또 뭐래요? 어차피 오빠 이쁜 여자면 다 사귀면서."
음...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밥은 맛있었으니 됐다. 나가요. 우리."
국밥집에서 이쁜 여자를 헌팅하려던 지연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오빠! 여기로 들어가요!"
내 손을 붙잡고 걸어가던 지연이 갑자기 길가의 커피숍으로  끌고 들어갔다.

"오빠 여기 앉아있어요."
지연은 카운터에 가서 무언가를 주문하고 나서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고 저쪽 창가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한 여자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이쁜 여자였다.


이십 대 중반 정도  되어보이는 단발 머리가  어울리는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지연이 발랄하게 인사를 했다.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마스터 카드 < 초청각 > 덕분에 지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 네에?"
느닷없이 인사를 해오는 지연에게 조금 놀랐는지, 여자는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저 잠깐 여기 앉아도 되죠?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종교 같은 것도 아니고,  파는 것도 아니에요."




"하하. 예. 앉으세요."
여자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용캐 웃으며 지연을 받아주었다.


"전 지연이에요."


"예."
여자는 지연의 소개에도 여전히 의구심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그런데요?"


"저기 지나가고 있는데, 여기 앉아있는 언니를 보니까 너무 이쁘더라고요. 분위기가 너무 멋있어요. 꼭 영화 배우 같았거든요.그래서 인사하고 싶었어요."

"정말요? 고마워요."
칭찬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 여자도 조금은 웃음을 지으며 받아들였다.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요.  이쁜 여자 좋아하거든요."


"흐응? 혹시? 이거 헌팅이에요?"
여자는 다시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네. 같이 놀면 재미있을 거 같아서요."
지연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낼름 대답했다.


"저기... 혹시 여자를 좋아한다면... 나. 그런 쪽은 조금..."
그녀는 정상적인 사람이었고, 아주 평범한 반응을 보였다.

"아뇨. 나 남자 친구 있어요. 저기."
지연이 손을 뻗어 카운터에서 음료를 받고 있는 날 가리켰다.


"아! 하하... 그렇구나. 그런데 보통은 이렇게  하잖아요?"


"뭐. 안 될 건 뭐 있어요. 불법도 아닌데."


"그죠. 하하. 진짜 재미있는 사람이네. 반가워요. 난 이사에요."
지연의 천방지축인 태도에 그녀는 오히려 호감을 느끼는 듯 했다.


시아라는 여자가 손을 내밀었고, 둘은 악수를 했다.

"반가워요. 시아 언니. 언니라고 해도 돼죠?"


"그래요. 내가 언니 맞는 거 같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무살이요."

"그럼 내가 언니 맞네. 그런데 이런 거 자주 해봤어요?"

"아뇨. 처음이에요. 아까 오빠랑 밥을 먹다가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내가 여자들은 못난 남자한테 헌팅 당하는 것보다, 이쁜 여자한테 헌팅 당하는 쪽이 차라리 낫다고 했거든요. 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그렇겠다. 나도 길을 가다가 남자들한테 말을 걸려올 때가 종종 있는데, 좀 부담스러울 때가 많거든. 지연씨도 이쁘니까 그런 일 많죠?"

"그니까요. 귀찮기만 하고, 괜히 신경쓰이고 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이쁜 지연 씨한테 헌팅 당하니까 훨씬 기분이 좋다. 지연 씨 말이 맞아."

"그죠?"

"그러니까 남자 친구한테 가서 말해줘요. 남자 친구분이 헌팅했으면 난 좀 무서웠을 텐데, 지연 씨니까 헌팅 당하는 거 좋았다고."

"그럼 언니 우리랑 놀지 않을래요? 우리 해변으로 갈 건데."


"어쩌지? 나 여기서 약속 있는데."


"히잉. 그러면 연락처 알려주세요."

"연락처?"


"네. 헌팅인데 연락처도  받는 게 어디있어요?"


"하긴. 그렇다. 전화번호 알려줘요."
지연이 자기 번호를 이야기하자 그녀는 전화를 걸어 벨 소리가 울리는 걸 듣고 전화를 끊었다.



"근데 어디서 왔어요? 서울?"

"네. 언니는요?"


"나도 서울. 지금은 일 때문에 내려온 거예요. 그니까 서울에 올라가면 전화해요. 음. 남자 친구 없을 때, 둘이서만."


"알았어요. 그럼 나중에 연락할게요. 언니. 서울에서 우리 데이트 해요."

"하하. 그래요. 데이트 해요. 우리."


지연은 아주 당당하게 내 곁으로 돌아왔다.

"보셨죠?"

"응? 그래 갔던 일은  됐어?"

"그럼요. 전화 번도호 땄다구요. 히히."


"그래. 그걸로 뭘 하려고."

"원래는 바닷가에서 함께 놀려구 했는데, 저 언니 일하는 중이래요."

"안타깝게 됐구나."


"그래도 서울 가면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대단하다. 나였다면 실패했을 텐데."

"맞아요. 아저씨는  무섭게 생겨서 헌팅용은 아니에요."
지연은 언제나처럼 솔직했다.


"그래. 우리 마시고 나가자."

"근데 아저씨는 마음에 드는 여자 없어요? 있으면 내가 또 헌팅해줄게요."
지연이 아주 자신 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