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36. 相互自慰 - 서로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며
토요일 오전 윤진과 단 둘이 만났다.
그녀가 뭔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였다.
"저. 주인님. 부탁이 있어요."
윤진이 내게 불안한 눈으로 무언가를 요구해왔다.
"응. 말해봐."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말하려고 둘이서만 보자고했고, 이렇게 힘겹게 말을 꺼내는 거지?
하 과장과의 관계 때문일까?
수빈과 함께 만나던 날, 하 과장의 비밀과 음모를 알고, 무자비하게 폭행을 행사한 뒤로, 윤진과 하 과장은 조금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하 과장으로서야 딱히 윤진을 꺼리지는 않았지만, 윤진이 하 과장을 보기를 거부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딱히 그녀들에게 어떤 요청도 받지 않았으니 그럴 이유가 없었다.
자고로 여자들 사이의 일에는 남자가 끼어드는 법이 아니다.
그런데 만약 윤진이 무언가를 요청한다면...
"저. 주인님이랑 쇼핑하러 가고 싶은데..."
"쇼핑?"
윤진의 요구가 내가 생각한 것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기에, 난 살짝 놀랐다.
"네. 주인님 옷 좀 골라드리고 싶어요. 어떨 때 보면 굉장히 잘 입고 계실 때도 있는데, 또 어떨 때 보면 영 이상한 옷을 막 걸치고 있기도 하고..."
한 마디로 내 평소 옷차림이 눈에 거슬린다는 의미인 듯 하다.
하긴. 잘 입고 있다는 것은 내가 기프트 카드로 받은 정장을 걸치고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고, 영 이상한은 내가 평소에 입는 옷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그럴까?"
딱히 어려운 요구는 아니라 그렇게 하기로 했다.
겨우 그걸 들어주었다고 기뻐하고 있는 윤진을 보니, 꽤나 흡족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성격은 개차반이지만, 나한테는 순한 양이나 다름없고, 빼어난 미녀인 윤진이 그렇게 아양을 떨고 있으니 즐거운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평소 윤진이 자주 다닌다는 백화점으로 갔다.
"이게 제일 잘 어울려요."
윤진이 고른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거울 앞에 서본다.
정말 내가 막 고른 옷을 입고 있을 때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이래서 안목 있는 여자들에게 골라달라 해야 하는 거로구나...
"이것도 입어보실래요? 이건 어때요? 음... 저것도요. 아! 귄찮은 거 아니에요?"
"괜찮아. 나도 옷을 좀 살 생각이었으니까."
"그럼 이것도요!"
윤진은 신이 나서 점점 더 많은 옷을 골랐다.
그녀의 안목은 정말 뛰어나서, 한 번 내게 입어보라고 한 옷은 어지간하면 잘 어울렸다.
아무래도 내 옷장이 제법 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동안을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옷을 구입했다.
신발도 사고, 속옷도 사고, 지갑도 샀다.
"다음은 시계에요."
윤진을 따라 들어간 곳은 명품 시계 계열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는 상표였다.
"주문해 놓으신 노틸러스 준비해 놓았습니다."
매니저가 윤진을 알아보고 바로 물건을 꺼내어 놓는 것을 보면, 그녀는 이미 내게 줄 선물을 준비하고 있던 모양이다.
"역시 잘 어울릴 줄 알았어요. 오빠는 키가 크고 몸이 좋으니까 페이스가 큰 쪽이 잘 맞아요."
사람들 앞에서까지 주인님 소리를 할 수 없으니, 밖에서는 오빠라 부르기로 했다.
윤진은 상관없다 했지만, 그런 소리 듣는 내가 불편하다.
사실 내가 시킨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나은이 윤진과 하 과장에게 날 주인님이라 부르라 지시했기에 두 여자는 그 호칭을 고수했다.
그런데 윤진이나 하 과장이나 날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시계줄을 맞춰 라운지로 올려보내겠습니다."
시계점의 매니저에게 시계를 맡기로 우리는 VIP라운지로 올라갔다.
당연하지만 윤진은 이 백화점의 최상위 등급 VIP인 모양이다.
일반 VIP들을 위한 라운지와 최상위 VIP 라운지가 별도로 구별되어 있다는 사실을 난 이날 처음 알았다.
겨우 몇 백 명 정도 밖에 안 되는 최상위 등급 VIP는이 백화점 매출의 절반이나 올려준다니 그런 대우가 이상치는 않다.
무슨 궁전이나 귀족 별장의 응접실 같이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장소에서 우리는 그동안 구매한 상품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잠깐 앉아계시겠어요?"
윤진이 뭔가 생각이 난 듯 라운지를 나가버렸다.
난 벽에 걸린 그림과 사진 따위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부자들만을 위한 장소여서인지, 벽에 걸려있는 그림이나 사진들도 무척 신경을 써서 배치해놓았다.
그림이야 전부 진품인지 모르겠지만, 걸려있는 사진들은 전부 대가들의 사진들이다.
여기 들어와서 사진을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호사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사진을 감상하고 있는데 VIP라운지로 한 여자가 들어왔다.
언뜻 보니 20대 초반의 늘씬한 미녀였다.
걸치고 있는 옷이나, 들고 있는 가방 따위로 보아서는 여기 직원은 아닌 모양이다.
그녀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들어와 라운지 가운데의 소파에 앉았다.
난 사진을 구경하며, 마스터 카드 < 매의 눈 >으로 향상된 눈으로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그럴만한 여자였다.
얼굴이 조그마하고 눈이 큰 미녀였다.
키는 작은 편은 아니고 날씬한 몸매가 인상적이다.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가슴이 그다지 봉긋하지 않아보이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주 사소한 단점으로 치부될만큼, 그녀는 이뻤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도 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날 주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녀는 한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미녀의 따가운 시선을 짐짓 모른척하고 사진을 구경하고 있는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각또각.
그녀는 곧장 내게로 다가왔다.
발소리가 가까워오자, 더이상 모르는 채 할 수 없어 난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내게 인사를 해왔다.
"예. 안녕하세요."
"여기 회원이신가요? 처음 뵙는데."
"아뇨. 아는 사람 따라 와봤어요."
"그러셨구나. 그런데 옷을 굉장히 세련되게 입으셨네요. 안목이 있으시네요."
"아. 이것도 그 사람이 골라준 거예요. 내가 워낙 옷을 생각 없이 입고 다니니까 맘에 안 들었나 봐요."
"아항!"
왠지 그녀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무슨 사진을 그렇게 열심히 보고 계셨어요?"
아무래도 이 여자가 내게 관심을 가진 것 같다.
이상하다. 보통 여자들은 내게 관심을 갖기 보다는 우선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은데...
"만 레이의 작품인데요. 전부터 좋아하던 거라 눈을 뗄 수 없었네요."
"만 레이? 전위주의 화가 만 레이요? 아... 그랬구나. 벌거벗은 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 아니었네. 사진 정말 좋아하시나봐요. 혹시 사진 찍어요?"
"예. 사진..."
내가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윤진이 들어왔다.
"심심하지..."
윤진은 밝은 얼굴로 내게 말을 건내려다가, 내 옆에 서 있는 여인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언니!"
그리고 그 미녀가 윤진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어? 예지야."
윤진은 살짝 애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반겼다.
"그날 병원에서 보고 처음 보네. 요즘 많이 힘들지?"
아마도 윤진 모친의 장례식을 말하는 모양이다.
그정도라면 꽤 친한 사이 같다.
"이젠 조금 괜찮아졌어."
"다행이다. 그런데 저사람이랑 아는 사이야?"
"응. 나랑 함께 온 거 맞아."
"아! 기억 났다. 어디서 본 것 같다 했더니. 언니 결혼식날 봤었구나. 잠깐 스치듯 본 거라 기억을 못 했어. 그런데 사진 찍는 사람이라 신부 대기실로 들어갔었구나."
눈썰미가 좋은 여자였다.
스쳐지나가며 내가 신부 대기실로 들어가는 것을 한 번 보고 기억을 해내다니.
"근데. 언니 보니까 정말 반갑다. 오늘 시간 있어요? 나랑 밥먹자!"
조금전의 고혹적인 태도와 달리, 윤진에게 메달리는 그녀는 딱 그 나이 대의 발랄한 여자로 보였다.
그런데 그녀는 윤진과 대화를 하면서도 날 흘낏 흘낏 보고 있었다.
"어쩌지? 오늘은 힘들 거 같아."
그리고 윤진은 평소의 그 어린 태도를 감쪽 같이 숨기고, 어른스러운 태도로 일관했다.
역시 사람의 나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같았다.
"히잉... 얼굴 보기도 힘든데."
"미안. 대신 오늘 말고 다시 약속 잡기로 해. 아무때나."
"진짜? 그럼 언제가 좋을까?"
"잠깐만."
윤진이 그 미인을 두고 내게 다가왔다. 얼굴에 무언가 할 말이 있다고 쓰여있었다.
"저 병원에서 아버지가 보시자고 하셔서요."
얼굴에 스민 표정은 꽤나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그럼 먼저 가봐. 난 괜찮으니까."
"... 죄송해요. 참 그러면 주소 알려주시면 그리로 배송시켜놓을게요. 여기요. 이리와봐요."
윤진이 직원을 불러 주문한 물건들을 배송할 장소를 알려주었다.
"참. 시간 되시면 시계만 받고 가세요."
윤진의 오늘 목적은 그 시계를 선물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할테니 빨리 가봐."
"미안. 나 급한 일이 좀 있어서. 나중에 연락할게."
윤진은 나와 대화를 하는 동안 라운지 반대편에서 스마트폰을 가지고 뭔가 하고 있던 그 미녀에게 다가가 다음을 약속하고 나가버렸다.
"진짜. 뭐가 그리 바빠요? 알았어요. 그럼 연락 꼭 해요!"
우리의 대화는 듣지 못한 모양이다.
"윤진 언니랑 아는 사이였는지 몰랐네."
윤진이 사라지자, 그녀가 다시 내게 다가왔다.
"그러게요. 세상이 참 좁네요."
그보다는 이 VIP라운지를 이용할 정도의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으니, 서로 한두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겠지.
여기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 나라에서도 최상류층일 것이다.
"반가워요. 전 예지에요."
여자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해왔다.
"예. 반가워요. 영웅입니다."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내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혹시 아르바이트 해볼 생각 없어요?"
"아르바이트?"
"네. 모델 아르바이트요."
모델이라니? 살다 별소리를 다 듣는다.
"나 그림 그려요. 그쪽 비주얼이 마음에 들어서 그래요. 꼭 좀 부탁하고 싶거든요."
흐음...
그런 모델이란 말이지?
화가라면 이쁘고 잘생긴 사람보다는 뭔가 눈에 띄는 사람을 모델로 선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처럼 무섭게 생긴 남자라거나...
"알죠? 그쪽 굉장히 야성적이잖아요. 그리고 비율도 참 좋구요. 놓치기 아쉬워서 그래요. 꼭 좀 부탁할게요. 음. 모델료는 넉넉히 드릴게요."
어쩐지 이 여자의 성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윤진과 비슷한 종류이다.
자신이 맘에 드는 것이 있으면, 절대 참지 못하는 성격.
그러니까 지금까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손에 넣어온 것이다.
"그래서 모델료는요?"
일부러 돈에 관심이 있는 척 해보았다.
"하루에 30... 아니다. 50만 원. 어때요?"
역시 부잣집 딸이 맞는 모양이다.
처음부터 아주 통이 크다.
"글쎄요. 그런데 시간은 얼마나 써야 하죠?"
"하루에 3시간만 해요. 그리고... 한 열 번 정도면 될 거 같아요. 어때요?"
"흐음..."
난 다시 시간과 돈을 계산하는 척 해본다.
"아 진짜. 너무 그렇게 빼지 말고요. 인심이다. 천만 원! 천만 원에 작품 끝날 때까지요. 열흘 일하고 천만 원이면 작은 거 아니잖아요."
아무래도 흥정에는 재주가 없는 모양이다.
아주 잠깐 시간을 끈 것 만으로 벌써 두 배로 올랐다.
"그렇게 맘에 들어요?"
"그럼요. 뭔가 짐승 같은 냄새가 풀풀 풍겨요. 틀림없이 좋은 그림 그릴 수 있을 거 같아요."
뭐라고 할까?
거침이 없다고 해야하나?
상대방의 감정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태도가 몸에 배어있다.
"빨리요. 어때요? 돈이 모자라요?"
거기에다 성격도 급하다.
만약 내가 좀 더 끌면 더 큰 돈을 지불할 의향도 아주 충분해보였다.
그러니까 돈을 쓰는 것에 대해 조금도 거부감이 없는 여자이다.
아마도 자기 돈은 아니겠지.
나이로 보아서는 정식 화가는 아닐테고.
기껏해야 미대를 다니고 있을 나이였다.
"돈은 그정도면 되요.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
"뭔데요? 나랑 데이트 하자는 소리만 아니면 다 들어줄게요."
역시 날 남자로 보는 것은 아니다.
"그쪽도 모델이 되어주면 좋겠어요. 나도 멋진 모델과 사진을 찍는 걸 좋아하니까."
"흐음... 그래요? 그럼 사진 보여줘요."
그녀는 선뜻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내 사진이 마음에 들어야 허락을 하겠다는 표정으로 보였다.
스마트폰을 켜고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준다.
"흐음... 흐응? 나쁘지 않네. 괜찮은 거 같아. 근데 왠지 색기가 흐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