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화 〉@35. 라인업 - 당신이 거느린 여자가 얼마나 많은 거예요?
"전혀 무서운 사람 같지 않은데... 아니. 진짜 무서운 사람은 오히려 온화해보이는 법이니까."
"힘들지는 않아?"
그녀를 메달아 놓은지 벌써 30분 가까이 흘렀다.
꽤 힘들었을 거라 생각하며 물었다.
물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어. 당신이 원하면 이대로 평생 메달려도 괜찮아."
그녀는 나와 함께 들어온 낯선 여자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쪽은 보라. 그리고 이쪽은 수빈. 서로 인사들 나눠."
"안녕하세요. 수빈이에요. 처음뵙겠습니다."
"반가워요. 보라에요. 이런 꼴이라 제대로 인사를 못해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런데 아프지는 않아요?"
"음. 조금 욱씬거리기는 하지만, 즐거우니 상관 없어요."
"흐음..."
수빈은 아직은 그녀에 대해 판단을 내리지 못한 모양이다.
날 바라보며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보라는 내 옆집에 사는 굉장히 우아한 여인이었지."
"우아하신 분인 것은 잘 알겠어요."
"고마워요."
보라는 싱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굉장히 화목한 가족이었어. 남편은 좋은 직업을 가진 성실한 사람이었고 가족들을 사랑했지. 보라씨는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했고, 딸에게는 무한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어."
그 남자가 잠시나마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나만의 비밀이다.
지금에 와서야 보라가 알게되어도 우리의 관계에 하등의 영향도 미칠리야 없지만, 난 그녀의 추억을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보라에게 그 남자는 언제까지고 훌륭한 남편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이 보라씨를 탐낸거로군요."
"응. 너무나도 화목한 가정을 파탄내어버렸지."
물론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렇게 멋진 여자를 손에 넣었다.
"처음엔 협박으로 시작했지."
그리고 난 내가 보라를 손에 넣기까지의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진짜 저열하네요."
수빈이 원색적인 비난을 했다.
"그때는 어땠어요?"
그리고 보라에게 심경을 물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었어요. 하루 하루가 정말로 지옥 같았으니까."
보라는 여전히 온화한 얼굴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이 남자의 정액을 몸안에 넣은 채로 집으로 들어가면 너무 비참하고 미안한 생각에 욕실에 들어가 한 시간도 넘게 쪼그리고 앉아 그게 전부 흘러나오기를 바라기도 했었죠."
보라의 말을 듣고 있으니, 내가 얼마나 잔인한 인간이었는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보라는 계속해서 자신이 겪은 심리적인 고통을 털어놓았다.
"보라와는 꽤 오랫동안 그런 관계를 유지했지."
수빈은 날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은 모양이다.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로군요."
"응. 맞아."
보라에게는 단 한 번도 액티브 카드 < 호감 >을 사용하지 않았다.
은희도 마찬가지인데, 그녀와 섹스를 한 것은 아직 내가 액티브 카드 < 호감 >을 손에 넣기 전의 일이었고, 그 뒤로 다시는 은희를 캐스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기회도 이유도 없었다.
지아에게는 딱 한 번, 우리가 재회하던 날만 그랬었다.
그리고 지연과 수빈에게도 그리 오래 사용하지는 않았다.
내가 그녀들에게 충분한 애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난 지연과 수빈에게 액티브 카드 < 호감 >을 비활성화했다.
"그렇게 증오스러운 사람이었지만 그가 내게 자유를 돌려준 순간 난 알게되었어요."
보라가 수빈에게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말해주었다.
"다시는 이 못된 남자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무너져버렸어요. 알아요. 난 이 잔인한 사람에게 완전히 중독되어 버린 거죠. 아마도 처음부터 그랬을 거예요. 이 사람에게 범해지는 순간부터 난 이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던 거야."
나도 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녀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힘겹게 싸워왔다.
보라에게는 자신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 학교 다닐 때, 굉장히 힘든 시절을 보냈어요. 어떤 이유에선가 친구들 사이에서 고립되었고, 괴로운 일들을 많이 겪어야 했었죠."
보라는 묻지 않은 아주 오래전의 일을 꺼내놓았다.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리고 어쩌다보니, 나 도둑질을 하고 있더군요. 마트에서... 화장품 가게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그런 것으로 풀어버리려는 거였죠."
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비밀을 밝혔다.
"그러다가 그 사람을 만났어요. 막 우리 학교에 부임한 선생님이었죠. 그 사람이 날 다독여주고, 날 위해 싸워주었어요. 학교를 떠나면서까지... 덕분에 난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살아갈 수 있었어요. 만일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내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모르겠어요."
보라의 남편은 생각보다 훨씬 더 훌륭한 남자였다.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면서까지 그녀를 위해 싸우고, 다시 새로운 삶을 일궈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재회했고, 보라가 먼저 애정을 고백했다.
"그 뒤로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았었는데... 마가 끼었었나봐요. 하필 그 짓을 다시 하게 될 줄은... 아마 그게 운명이겠죠?"
보라에게는 남편과 가족을 지켜야할 너무도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우와! 쓰레기."
수빈이 날 보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깨달았어요. 운명은 훨씬 더 가혹한 거였죠. 난 이 못된 사람에게 나 스스로를 바칠 수밖에 없었어요."
"조금이라도 후회하지는 않는 건가요?"
"수빈씨는 아닌가요?"
보라는 본능적으로 수빈 또한 자신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네요."
수빈이 웃으며 대답했고, 보라가 미소지었다.
"지금은 이혼 절차를 진행하고 있어. 보라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딸인 은영이와 함께 살고 있지. 얼마 전에는 영어 학원에 취업했어. 지금까지와는 달리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게 될 거야."
다시 내가 보라의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해주었다.
"여전히 그분에 대해서는 미안한 감정이 남아있는 거죠?"
"물론이죠. 하지만 고마움이나, 존경 따위의 감정으로 억지로 관계를 이어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어요. 그 사람에게도 내게도."
"맞는 말이로군요."
수빈은 보라의 말을 이해했다.
아마 세상에 그녀보다 보라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달리 없을 것이다.
수빈은 내 행적을 전부 알고 있는 유일한 여자이고, 나와 수빈 둘 중에, 보라와 같은 감정의 변화를 겪어본 사람은 수빈 뿐이다.
"젖어있네요."
수빈이 보라의 음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보라의 그곳은 바로 눈에 띌만큼 젖어있었고, 지금도 그곳에선 투명한 액체가 밑으로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어요. 이 무서운 곳에 내려왔을 때부터. 어쩌면 오늘 아주 끔찍한 꼴을 당하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부터 이렇게 되었죠."
"혹시?"
수빈이 내게 물었다.
지금 보라의 몸을 달아오르게한 그 어떤 능력을 사용했냐는 물음이다.
난 고개를 저어 그렇지 않다 말해주었다.
처음 몇 번을 제외하고는 보라에게는 캐스팅 카드를 그리 많이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섹스를 한 회수에 비하면 아주 적은 비율이다.
하지만 보라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캐스팅되지 않아도 아주 극단적인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수빈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인가를 알아낸 모양이다.
"이렇게 얼마나 메달려있었어요?"
이야기가 끝나고 수빈이 보라에게 물었다.
"음... 글쎄요. 여긴 시계가 없어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52분 정도?"
응? 그녀의 대답에 난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정말로 딱 52분이 지났다.
재미있는데? 보라에게 이런 재능?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동안 무섭지 않았어요?"
"전혀요."
"이 남자가 언제 온다고 했나요?"
"아뇨. 그냥 기다리고 있으라고만 했죠."
보라는 여전히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에라도 이 남자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이사람을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정말로 이 남자가 돌아오지 않는다면요?딱히 믿을만한 남자도 아니고."
"믿을만한 사람이 아닌 것은 틀림없어요. 변덕쟁이에,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남자이니까요."
보라는 나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 그녀와 보낸 시간이 가장 길었고, 우리의 관계가 그만큼 치열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요. 기다리라고 해놓고 어디선가 이쁜 여자를 발견하면 보라씨를 내팽기치고 가버릴 사람이잖아요."
음... 그정도는 아닌데...
하지만 난 변명하지 못했다.
"혹시 그렇다해도 괜찮아요. 저 남자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어요. "
"잘못하면 이렇게 고통스럽게 죽을 수도 있잖아요? 지금도 꽤 힘들죠? 그런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참을 수 있어요?"
"저 남자를 즐겁게 할 수 있다면 죽음도 기쁠 거예요. 하악!"
보라는 무슨 상상을 한 것인지, 갑자기 신음을 내뱉었다.
수빈은 묵묵히 그녀가 느끼는 쾌락의 순간들을 지켜보았다.
"하아... 미안해요."
보라의 쾌락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충분히 강렬했다.
"괜찮아요. 뭐. 나라고 다를 것도 없는데."
수빈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난 이 남자와 섹스에 중독된 것은 아니에요."
보라가 변명처럼 말했다.
"사실은 이제와서는 단지 이 남자와 함께 있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죠. 내가 필요한 것은 육체적인 관계가 아니에요. 이 사람에게 소유되었다는 확신이 필요할 뿐이죠."
보라의 말을 듣는 동안 수빈의 눈빛은 아주 조금 흔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곧 그녀는 미소를 되찾았다.
"맞아요. 관계의 증명이 훨씬 더 중요하죠. 그런데 알면 알수록 걱정할 필요는 없더라고요. 이 남자 욕심이 많아서 자기 여자라 생각하면 절대 놓아줄 사람이 아니에요. 또 나름 관리도 하는 거 같고요."
수빈은 나름 보라에게 힘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중요한 건 저 남자가 날 어떻게 하는지가 아니에요. 나 스스로가 증명하는 것이 전부이죠."
보라는 내게 애정을 갈구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애정을 증명하기만을 원할 뿐이다.
내가 그녀에게 한 모든 행위를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수빈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난 보라의 몸을 내려고, 그녀를 묶은 로프를 풀어주었다.
메달려 있던 시간이 길었기에, 꽤나 고통스러웠던지, 그녀는 제대로 서있지도 못했다.
난 그녀의 몸을 안고 고문실을 벗어나와 사무실로 가서 침대에 뉘였다.
난 보라를 캐스팅하고, 옷을 벗었다.
아무래도 몸의 근육이 다친 것 같으니 치유를 할 필요가 있었다.
침대 위의 보라는 애정으로 가득한 눈으로 날 기다렸다.
수빈은 자신도 끼워달라는 말은 하지 않고 묵묵히 우리의 섹스를 지켜보았다.
첫 번째 섹스가 끝났을 무렵, 수빈은 어느새 벌거벗은 채, 침대 한쪽에 앉아 우리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즐기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의 차례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난 두 번, 세 번, 보라의 몸을 탐닉했다.
보라는 언제나처럼 기쁘게 날 받아들였다.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
보라가 쾌락을 이기지 못하고 실신을 한 뒤, 난 나름 혼자 즐기며 함께 쾌락에 빠져있던 수빈이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고민중이에요."
"뭐가?"
"지아 언니 파벌에서 보라 언니 파벌로 옮겨야 할지 말이죠."
"흐음?"
"이렇게 막강한 다크 호스가 있었을 줄이야."
수빈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군다나 정말로 그런 거에 관심이 없을 분이라서, 내가 2인자가 되면 실질적인 권력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파벌 놀이 재미있어?"
"물론이죠. 굉장히 재미있어요. 아저씨는 모르겠지만, 이건 단순히 나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면?"
"왕의 여자들이 맨날 파를 갈라 싸우는 것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하던 건줄 알아요?"
"무슨 궁중물이라도 찍는 거야?"
"음... 비슷해요. 실질적으로는."
수빈의 말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뭐. 비상한 아이이니, 나름 생각이 있겠지.
난 왠지 더 물어보다가는 말려들 거 같아서 그만 이쯤에서 관두려 했다.
"그런데 난 벌써 지아 언니한테 충성을 맹세했단 말이에요. 여기서 말을 갈아타면 지아 언니랑 척을 지는 거잖아요."
어쩐지 이 아이 굉장히 진지하다.
"그렇게 파벌 놀이가 좋으면 수빈이 파벌을 만들면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