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화 〉@35. 라인업 - 당신이 거느린 여자가 얼마나 많은 거예요?
"여기는 수빈이. 대학에 다니고 있고. 2학년."
이번엔 테이블 저쪽의 어린 여자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지금까지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던 수빈이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진짜 미인이네. 오빠가 한 말이 오히려 모자라잖아?"
지아가 지금까지 참아왔던 탄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상큼하게 웃고 있는 수빈에게서는 그녀가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실험 정신이 투철한 외골수라는 사실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게 머리가 좋은 사람이 이렇게 이뻐도 괜찮은 거야? 세상에."
지아는 영업용 멘트를 잔뜩 꺼내 놓는다.
원하는 목표를 찾으면 절대 놓치지 않는 베테랑 보험 설계사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나와 함께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 조금은 신선했다.
"머리가 좋아?"
은희가 다시 끼어들었다.
지아가 내게서 들은 수빈이 한국 제일의 명문대학교 경제학과 재학중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와! 진짜 대단하네. 거기 학생이면 전교 1등은 해야 하지 않아? 이쁘고 똑똑하고. 진짜 엄친딸이네."
은희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진학해서 법조계에 들어갈 생각이라고 했죠? 영웅씨한테 그렇게 들었는데, 혹시 내가 알고 있어서 기분 나쁘거나 그렇지는 않았어요?"
"하나도 안 나빠요. 겨우 그 정도로 기분이 나쁘면 어떻게 아저씨랑 만나겠어요."
수빈은 뭔가 뼈가 들어있을 법한 대답을 한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은 모두 무언으로 같은 생각임을 전했다.
"흠흠... 이쪽은 지연이. 마찬가지로 대학생. 수빈이보다 한 살 어려."
마지막으로 지연을 소개했다.
"전 아저씨 육변기 1호에요!"
지연이 폭탄을 터트렸다.
풉! 캑!
지연과 수빈을 바라보며 음료를 마시던 은희가 사래가 들려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지아도 깜짝 놀라 어쩔줄 몰라하다가 날 바라본다.
"첫사랑도 애인도 오랜 친구도 아니니까 그건 양보할 수 없어요."
지연은 당당하게 자신만의 자리를 선포했다.
"저기. 우리 그런 말은 삼가하기로 했잖아..."
"그런 약속 한 적 없어요."
지연은 냉담하게 내 말을 부정한다.
"하하... 꽤 독특한 캐릭터네. 얼굴도 미인이고, 피지컬도 압도적이고, 거기에 저렇게 독특한 맘에 든다. 반가워요.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봐요."
지아가 손을 내밀었고, 지연도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언니 굉장히 우아해요. 맘에 들어요. 우선 서열은 나보다 높은 거 같으니까 미움 받을 짓은 안 할게요."
지연의 말에 수빈을 제외한 모두가 또 다시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음. 언니는 굉장히 건강해보여요. 되게 음란할 거 같아."
지연이 지아에 이어 은희를 바라보며 한 마디 했다.
풉!
간신히 사레에서 해방되어 음료로 목을 가라앉히려던 은희는 지연의 말에 다시 한 번 입에 든 음료를 뿜고 말았다.
이번엔 꽤나 머금은 음료가 많았던지, 그녀의 앞에 앉아있는 수빈에게까지 튀고 말았다.
"쿨럭! 어머나! 미안! 어떻게 해! 고의가 아냐! 진짜..."
은희가 난감해 어쩔줄 몰라한다.
"괜찮아요. 고의라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언니 서열이 제일 높아보이니까 더한 것도 참을 수 있어요."
수빈의 말을 듣고 은희는 울어버릴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서. 서열은..."
"음. 잘 모르겠어. 이 언니가 더 높은 것도 같고..."
수빈이 진지하게 지아와 은희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난 저 언니."
지연이 손을 뻗어 은희를 가리켰다.
"오래된 쪽이 더 높아."
"그래도 서로 사귀던 사이가 더 높지 않을까?"
수빈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양이다.
"오빠..."
지아가 날 바라보며 어떻게든 해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그렇게 당황한 모습은 나로서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내가 당황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문제도 되지 않았다.
다행이다.
"말 했잖아. 둘 다 통제가 안 된다고."
이 자리를 마련할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 알았다기 보다는 난장판이 되리라는 것을 예상한 것이지만.
사실 한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네 여자가 한 자리에서 만난다는 것은 일대 사건이고, 필연적으로 난장판이 될 수밖에 없다.
"통제는 잘 되요. 시키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지연이 잘라 말했다.
"난 지연이랑은 달라요. 좀 궁금한 걸 참지 못할 뿐이에요."
"궁금한 게 서열이야?"
은희가 숨을 고르며 물었다.
"그럼 난 빼. 난 영웅이 여자가 아니니까."
은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요? 같이 섹스 안 해요?"
수빈의 물음에 은희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그건... 지금은 아니니... 여하튼... 난 아냐."
은희는 얼굴이 빨개지며 손을 내밀고 마구 흔들었다.
지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뭔가 눈치를 챈 모양이다.
지난번 은희를 술취하게 해놓고 마음대로 범해버린 일은 은희도 나도 지아에게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 일로 지아도 알게 될 거 같다.
"흠... 확실히 조금 특별한 관계인가 보네. 역시 언니가 서열이 제일 높아."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전부 주지 않는 쪽이 승산이 높지."
수빈도 지연에게 동의했다.
지연과 수빈이 그렇게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있는 은희와 지아의 얼굴엔 당혹스러운 표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진짜 밀고 당기기의 경우나 그렇지. 쉽게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워. 하지만 한때 진지하게 사귀던 사이였다면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겠지. 난 언니한테 걸겠어."
수빈은 이제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지금 둘이 뭐 하는 거야?"
지아가 참다 못해 물었다.
"줄타기요."
지연이 대답했다.
"응? 줄타기?"
"라인을 정해야 할 거 아녜요? 어차피 피라미드의 정점에 설 수 없다면 라인이라도 잘 타야 되죠. 저 나쁜 남자한테 제일 중요한 사람들이 언니들이라면, 처음부터 줄을 잘 서야지 나중에 편해진다고요."
이번엔 수빈이 설명했다.
"하하..."
지아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다시 날 바라보았다.
"진짜 너희가 뭘 오해하나본데. 난 남자 친구도 따로 있어. 영웅이랑은 그냥 친구라고. 그러니까 그 줄타기 하려면 얘한테 하면 돼. 응?"
뭔가 두려움을 느낀 은희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흠. 그런 특혜를 인정한다?"
수빈이 골똘히 고민에 빠진다. 그녀가 생각한 서열이 맞는것인지 고민하는 모양이다.
"아냐. 특혜라기에는 너무 위험해. 조금만 잘못하면 나락이야. 그래. 언니예요. 난 언니 파벌의 2인자를 목표로 하겠어요."
수빈이 지아를 바라보며 선언했다.
"파벌이라니. 무슨 소리야. 오늘은 그런 거 때문에 보자고 한 거 아니야."
지아가 어떻게든 상황을 상식적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소용 없는 일이다.
어차피 이런 자리가 상식이 통할리 없다.
더군다나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여자가 셋이나 된다.
지아는 욕망이 강한 여자이기는 하지만 나름 상식이 있는 여자이다.
하지만 은희도 수빈도 지연도 절대 상식인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
"아냐. 이런 건 조금 모험이 필요해. 난 언니 파벌. 하지만 2인자까지는 바라지 않아요."
지연은 자신의 선택에 만족한 모양이다.
"근데 왜 파벌 이야기를 자꾸 하는 거야?"
은희가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조금은 어른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아저씨한테 여자가 계속 꼬일 테니까요."
지연이 말했다.
"꼬이는 게 아니라 꼬신다고 표현해야지."
수빈이 말했다.
"여하튼 여자들이 많아지면 필연적으로 파벌이 생기기 마련이에요. 그리고 파벌 싸움에서 밀리면 고달파지겠죠. 이모저모로."
갑자기 지아와 은희가 동시에 날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미간을 찌푸리고 날 보다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왜? 그걸 납득하는데?
어른이 되어서 아이들 하는 말에 넘어가면 안 되지 않아?
하는 항변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난 아주 잘 알고 있다.
여자들과는 절대 말싸움을 하면 안 된다. 이론이 기반이 된 이성적인 토론? 전부 필요 없다.
남자는 절대 여자를 이길 수 없다.
더군다나 지금은 4대1의 구도이다.
지금으로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 최고이다.
"여자들이 세 명 이상이면 필연적으로 파벌이 생겨요. 뭐. 남자도 마찬가지려나? 여하튼 남자들 사이의 일은 상관 없고, 벌써 여기 모인 사람만 넷이잖아요. 그리고 아마 이보다 두 배는 더 있을 거예요. 그렇다고 자기 행동을 숨기는 사람도 아니니까, 저 사람의 여자들은 부대끼기 마련이에요."
역시 설명은 수빈의 역할인 모양이다.
모두들 그녀의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조차 납득하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여자가 한 남자를 목적으로 하고 모여있다면, 차라리 파벌을 인정하는 편이 나아요. 괜한 혼란만 초래하게 될 무질서한 상황 보다는 서열이 정해진 파벌이 두엇 있어서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해야 하죠."
또다시 모두 끄덕끄덕.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어차피 파벌이 생긴다면, 미리 파벌의 권력자에게 빌붙는 쪽이 현명해요. 점점 여자가 많아지면, 결국 서열의 아래로 밀릴 수밖에 없잖아요?"
"좋아. 파벌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은 인정할게. 하지만 나나 은희 언니가 제일 서열이 높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워."
지아가 말했다.
"우선 너희가 미모에서 우리보다 월등한 것은 너무 명백해."
"딱히 언니가 나나 지연이보다 미모가 못하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수빈이 바로 반박했다.
"맞아. 언니는 나보다 이뻐. 가슴은 내가 크지만."
지연이 말했다.
"그래. 너희 셋은 다들 미인들이니까 난 그냥 시녀라도 하면 되겠다..."
은희가 조금 풀이 죽어 말했다.
"언니가 이쪽 지아 언니보다는 조금 외모에서 딸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 사람이랑 10대때부터 만나던 사이라는 것은 그걸 상쇄하고도 남을만큼 커다란 장점이에요.
남자들은 원래 오래된 사랑에 목을 매기 마련이죠.
사실 새로 들어오는 여자 중에 우리보다 더 이쁜 여자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건 또 새로운 가능성에 비하면 아주 불안정한 장점에 불과해요.
그러니까 어쨌든 언니가 유리한 건 사실이에요."
수빈이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는 동안 은희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는 모양이다.
"이 언니가 원래 말을 좀 싸가지 없게 해요. 그래도 틀린 말은 안 하더라구요."
지연의 말을 듣던 지아와 은희가 어처구니 없어 지연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싸가지 없는 쪽이 누구냐는 표정이었다.
"언니가 걱정해야할 사람은 여기 모인 다른 여자들이 아니라, 이 나쁜 사람의 첫사랑이에요.
아마 언니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은데, 혹시 따로 있는 거라면, 진짜로 조심해야 해요."
수빈의 거침 없는 말이 끝나고, 세 여자 모두 날 바라보았다.
"그러지 마. 나 첫사랑이 누구인지 기억도 안 나."
여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언지 알기에 난 미리 방어막을 쳐보았다.
"위험 수위가 높아졌어요. 첫 사랑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복수일 거 같네요."
수빈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진짜 독특한 친구들이다."
지아가 자리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을 해본다.
"우리 기획이랑 아주 잘 어울릴 거 같아. 명문 대학에 다니는 엄청난 미녀에 말도 아주 잘하고."
지아가 수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굉장한 미인인데 몸은 너무 매력적이야. 그리고 톡톡튀는 매력이 있어. 두 사람 다 탐 나."
이번엔 지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너희 프로그램에 어울리겠다."
은희가 조금은 걱정되는 얼굴로 동의했다.
"무슨 말이에요?"
이번엔 어린 여자들이 궁금해한다.
난 단지 그녀들에게 누구를 한 번 만나보자 권했을 뿐,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실은 내가 이번에 프로젝트 하나를 맡았어. 일종의 예능 프로그램인데, 거기 참여할 사람이 필요했거든.
기존 연애인 섭외는 얼추 되었는데, 함께할 신선한 얼굴들을 아직 찾지 못했어.
그래서 영웅씨한테 한 번 부탁을 해봤지. 혹시 주변에 이쁘고 매력있는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고."
지아는 그녀들과의 만남을 요청한 이유를 밝혔다.
나와 다시 만나고,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결혼을 취소한 뒤로, 방송국에서 프로젝트 하나를 맡게 되어 준비에 여념 없던 지아가 내게 그런 요청을 해왔을 때, 딱 두 사람이 머리에 떠올랐다.